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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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다. 유전적인 문제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시간대로 여행을 하는 헨리와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클레어의 사랑을 다룬다. 이 둘의 만남과 헤어짐과 그리움과 사랑을 읽다 보면 어느새 시간을 잊게 된다.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자 sf소설이다. 시간을 여행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하여 정말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함께 한 시간이 이렇게 뒤섞여 있으면서 강렬하게 연결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길 정도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서로를 만난 나이가 각각 다르다. 헨리가 클레어를 처음 만난 것이 스물여덟이라면 클레어가 헨리를 처음 만났을 때 여섯 살이었다. 이 둘의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맞다. 이 둘은 산술적으로 계산되는 나이를 초월하여 각각 처음 만나게 된다. 이렇게 이상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헨리가 가진 병이자 능력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시간대로 여행하는 것이다. 멋져 보이지 않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시간 여행을 꿈꾼다. 과거로 미래로 마음껏 여행을 하면서 현재 느끼는 아쉬움을 되돌아보고, 지금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경이로움을 바란다. 하지만 헨리의 시간 여행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 단 하나의 행복이 바로 스물여덟 이후 그와 함께한 클레어를 시간여행 속에서 만난 것이다. 부수적으로 미래에서 온 그가 과거의 그에게 경제정보를 줘서 어느 정도 부유함을 가지게 하는 정도다. 결코 그들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헨리의 시간여행은 자신이 바라는 시간으로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시간여행을 떠난다. 헐벗은 채로 언제인지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타난다. 언제 다시 그가 돌아온 시간대로 돌아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살기 위해 나쁜 짓을 익히고 연습하고 실천으로 옮긴다. 몰래 문을 따고 들어가 옷이나 돈을 훔치고, 소매치기로 다른 사람의 지갑을 슬쩍 빼낸다. 벌거벗은 상태로 나타나다 보니 가끔은 폭력으로 상대편 옷을 빼앗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처음 클레어가 헨리를 만났을 때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현실의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주 나타나면서 그녀에게 하나의 우상처럼 되었다. 몰래 숨겨둔 비밀연인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그의 모습은 어쩌면 그 또래의 아이들보다 우쭐함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미래에서 온 어른이 그녀의 단 한 명의 사랑이 될 것이라곤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찾아온 다양한 나이 대의 헨리가 그녀에게 계속적인 신선함과 즐거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는 순간 그에 대한 환상과 기대와 그리움은 이 세상 무엇보다 강렬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한다.  

 

 얄팍한 물리학 지식은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기존에 보았던 시간여행에 대한 모든 공식이 깨어진다. 미래의 헨리가 과거의 헨리를 만나서 정보와 생존 기술을 가르쳐주고, 과거의 헨리가 미래의 헨리나 클레어를 만나서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된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다른 시간대의 두 헨리가 공존하고, 미래가 과거로 와서 미래의 결정할 수 있는 조그마한 변화를 일으킨다. 다양한 차원의 세계가 공존한다면 무리가 없지만 이 소설은 하나의 시간대만 존재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물리학은 멀리하고 단순히 두 남여의 만남과 헤어짐만을 생각한다면 독특하고 기발하면서 황홀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누가 더 행복했을까 생각해본다. 여섯 살부터 헨리를 그리워하고, 단 한 명과 사랑을 나눈 클레어일까? 아니면 다양한 여자들을 만나고 경험한 끝에 스물여덟에 클레어를 만난 헨리일까? 개인적으로 클레어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헨리의 과거가 주는 아픔이나 자신도 모르게 하는 시간여행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다양한 경험과 많은 여자란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록 클레어가 헨리의 갑작스러운 시간여행에 불안을 느끼고, 다시 나타남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하여도 말이다.  

 

 두 남여가 만나는 나이와 시간은 정말 다양하다. 재미난 것은 클레어의 시간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헨리의 나이만 자꾸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연출로 보인다. 미래의 헨리가 현재에 나타나서 채워주는 시간과 감정들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만으로 이렇게 흥미롭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니 대단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준 “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2권 354쪽)란 문장에 함축된 감정의 깊이와 울림이 강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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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켈리그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
데이비드 알몬드 지음, 김연수 옮김 / 비룡소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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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가끔 번역 소설에선 낯선 작가보다 번역자에게 더 눈길이 가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몇 분의 번역가는 출판사의 광고에 어느 정도 신뢰감을 준다. 뭐 이것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실패 확률은 적다. 이 소설이 획득한 휘트브레드 상이나 카네기 상에 대해 내가 잘 모를 경우 더 번역자를 믿는다. 가끔 이렇게 시작한 인연이 문학상이나 작가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청소년 소설이다 보니 술술 읽힌다. 어려운 문장이나 내용이 없다. 한 소년의 성장을 다루었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지의 존재와 새로운 동료가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둠을 물리친다는 구조인데 모험소설처럼 읽히는 대목도 있다. 켜켜이 쌓아 놓은 짐들 사이에서 발견한 미지의 존재와 그를 구하기 위한 주인공 마이클과 미나의 행동은 아이들이 주변에서 가장 쉽게 펼칠 수 있는 모험이다. 사실 오래된 집이나 커다란 창고는 환상과 모험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마이클 집은 근심 걱정이 있다. 바로 마이클의 여동생이 아픈 것이다. 아기의 아픔은 가족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새롭게 이사한 집의 상황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차 두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차고는 전 주인의 짐으로 가득하다. 바로 이 공간에서 마이클은 신비한 존재 스켈리그를 만난다. 환차처럼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는 그를. 거미줄과 청파리와 회색 먼지로 가득한 그를. 이 만남은 뒤에 만날 새로운 친구 미나와 더불어 소설의 큰 줄기이자 핵심이다.  

 

 미나는 특이한 아이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엄마에게 교육 받는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외우고, 새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소녀다. 옆집에서 살고 인사하고 지내던 중 미나가 자신의 비밀 장소를 알려주면서 둘은 스켈리그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역자도 지적했지만 미나가 새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 중 많은 곳이 스켈리그와 연관성이 있다. 미나는 마이클에게 좋은 친구이자 모험의 동료이고 비밀 공유자이며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스켈리는 어떤 존재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그는 천사다. 하지만 작가는 천사라고 단정 짖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와 다르다. 중국 음식을 신의 맛이라 칭찬하고, 청파리나 부엉이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는 그와 천사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조금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래도 그가 천사가 아닐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다. 또 그는 마이클의 마음과 연결된 존재다. 마이클이 가장 힘들 때 그는 다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된다. 미나와 그를 옮기고,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희망을 가져다주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불안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멋진 한 구절이 있다. “가끔 우리는 세상 모든 일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고 그 이상은 상상하는 법을 배워야해.”(219쪽) 여기서 스켈리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다만 상상 속에서 존재한다. 우린 자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내면보다 외부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스켈리그는 마이클의 내면이 외부에 투사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너무 많이 나갔나? 읽는 순간 내내 재미있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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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도둑
노어 차니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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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마 산타 줄리아나 성당에 경보음이 울린다. 세 번씩이나 울리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 제단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이 사라졌다. 그 그림이 바로 카라바조의 <성 수태고지>다. 장면이 바뀐다. 말레비치 협회의 제네비에브 들라클로쉬가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절대주의 구성 : 흰색 위의 흰색>이란 작품이 위작이라고 말한다. 퇴근하면서 지하 수장고로 내려간다. 걸려 있는 작품들을 둘러보다 그 그림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뛰어난 두 작품이 사라졌다.  

 

 사라진 두 작품을 두고 가브리엘 코핀과 장 자크 비조 형사와 그의 친구 장 폴 레구르지가 등장한다. 코핀은 카라바조의 작품을, 비조 형사 팀은 말레비치의 작품을 찾기 위해 불려간 것이다. 그리고 한 명 더 20세기 이전 작품 전문가인 배로 교수가 등장한다. 그는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협박을 받고 끌려간다. 이제 여기에 경매로 낙찰 받은 국립근대미술관의 말레비치 작품이 사라진 것을 조사하는 위큰든 형사가 끼어들면 중심인물들이 모두 등장한 것이다. 물론 작가가 숨겨놓은 인물이 몇몇 더 있기는 하다.   

 

 제목처럼 미술품 도둑에 관한 소설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본 낭만적인 도둑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 미술품 도둑이 하나의 중요한 산업이 된다. 이렇게 된 것에는 시장경제 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지고, 인간의 욕망이 그것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단 한 작품만 존재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으니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판매가격과 실제 가치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작가는 실제가치란 없다고 말한다. 판매가격이 그것이 훌륭한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 하는 것과 관계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격은 존재하고, 점점 고가로 변하는 미술품은 좋은 먹이감이다.   

 

 

 두 미술품과 각각 이것과 연관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엔 말레비치가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을 좇는 코핀 박사의 행적이 큰 성과를 거두기보다 경매장 풍경에서 시작한 말레비치의 작품이 사건을 만들고 변화를 부린다. 경매 낙찰을 받은 두 작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알 수 없는 남자들의 존재는 은근히 무게감을 지닌다. 그리고 비조 형사 팀이 절도범이 남긴 ‘CH347'을 추적하는 과정은 퍼즐 풀기의 재미를 준다. 이 두 콤비가 보여주는 식도락과 대화는 가끔 웃음을 짓게 만든다.  

 

 두 작품의 도난과 경매장 풍경과 도난당한 미술품을 좇는 수사관들 사이사이에 미술사 강의와 점점 거대해지는 미술품 도난 시장을 보여준다. 위작과 도난과 경매라는 단어들 사이로 드러나는 미술계의 모습은 흥미진진하고 가슴속에 의심의 씨앗을 뿌린다. 미술품 강의에선 몇 번을 읽지만 아직도 난해한 도상학적 사실들과 의미와 구성들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온다. 그리고 전문가의 권위가 거대해질수록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도 만나게 된다. 과학이 위작 등을 밝혀내지만 위작 전문가들이 새로운 도전으로 이를 뛰어넘는 과정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도둑맞은 그림들을 둘러싸고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작가는 이들의 관계를 꼭꼭 숨겨둔다. 뒤에 가서 이중 삼중의 속임수를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불만스럽다. 이 모든 사건을 뒤에서 조정한 사람이 있지만 그의 존재가 너무 갑작스럽다. 속임수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비중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의 활약이 너무 숨겨져 있다. 전체 구성에서 보면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 있고, 각각의 인물들과 사건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야 하는데 이 부분이 약한 것 같다. 한 번 들면 단숨에 읽게 만드는 매력과 몰입과 재미가 있다. 고혹적 미스터리, 폭포수 같은 반전 세례란 광고 문구가 맞기는 하다. 나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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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선혈 Nobless Club 15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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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장면으로 문을 연다. 쿠세인들의 주사위에 숫자 눈 대신에 사람 눈이 박혀 있을 것이란 소문이 있다. 물론 낭설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황제의 주사위다. 이 주사위는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이다. 재미난 것은 절망을 던진 후 희망을 던지는 것인데 반전이란 단어가 나오면 황제가 오히려 절망에 적힌 처벌을 받게 된다. 한 여자가 묶여 있고, 한 남자가 떨면서 주사위를 굴린다. 그 결과는 절망 그 자체다. 그리고 한 소년이 달려와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한다. 당연히 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끝으로 가면서 하나의 고리로 이어진다.  

 

 쿠세는 사막의 나라다. 이 곳 황제는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고 있고, 주변국을 속국으로 삼고 있다. 그러던 중 이 나라 황제의 동생인 레아킨이 가출을 한다. 그가 떠난 것은 감명 깊게 읽은 한 권의 소설 때문이다. 비오티란 작가가 쓴 것인데 감정이 메말라버리고 눈에 색을 빼앗긴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사막을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쿠세의 식민지인 라노프의 수도 옐린이다. 이곳에서 그는 죽은 탑이란 곳의 심판관으로 재직한다. 이 탑은 쿠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악랄하고 잔혹한 곳이다. 그가 처음 와서 사람들을 너무 쉽게 처형하는 것을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보다 감정이 메말라도 너무 메말랐다는 느낌이다.  

 

 그가 왕궁을 떠난 것은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이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 중심에 비오티란 작가가 있다. 작가에 대한 환상이 가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환상은 물론 깨어진다. 그가 품고 있던 이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만남에서 사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순정만화의 한 장면들 같다. 외형적 실망은 그녀가 지닌 문장의 힘으로 가려지고, 막말과 무례한 행동은 다른 매력으로 덮어진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넓은 강이 존재한다. 쿠세 황제의 동생인 레아킨과 라노프 독립운동의 희망인 라흐의 애인이었던 것과 신분의 차이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레아킨의 가슴 속에 감정을 집어넣는다. 비아티란 존재가 그의 돌 같은 감정에 균열을 불러온 것이다.  

 

 비아티로 향한 감정이 더욱 강렬해지면서 레아킨은 많은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 속엔 특권층이 가졌던 오만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와 비아티의 관계가 하나의 축으로 중심을 잡았다면 쿠세와 라노크의 정세와 죽은 탑과 귀스트로 이어지는 상황은 그 둘 사이의 틈을 더욱 벌리는 동시에 레아킨의 열정을 더욱 강하게 부채질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힘을 잃어간다. 애증이 뒤섞이고, 출생에서 비롯한 오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너무 빤한 반군의 활동은 뒤에 나오는 경계를 넘어선 존재와 더불어 비약처럼 느껴지고, 너무나도 쉽게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고귀한 가치와 대의는 하수구로 빠져버린다. 그것이 비록 욕망이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너무 쉽게 변하는 모습에선 바로 고개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작가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비아티와 주변 작가 친구들의 대화 속에 현재의 삶을 살짝 드러내고, 자신의 바람을 섞어 놓았다. 그리고 레아킨의 순정에선 고민도 주저함도 없다. 국가의 적을 살려달라는 요청에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군사를 죽여버린다. 이 부분에선 작가의 잔인함에 놀란다. 그의 메마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정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뒤에 시체에 남겨진 흔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장군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무자비하고 주저 없는 행동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조금씩 깨어지지만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첫 장면에 나온 상황을 풀어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알게 된다.  

 

 

 쿠세와 라노프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과 사람들의 삶은 피상적으로 다가온다. 역사를 중간에 집어넣어 상황을 만들었다면 이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선행되어야 한다. 단지 독립을 위해, 사랑을 위해란 감정의 흐름은 뒤에 나오는 출생의 비밀처럼 생뚱맞게 느껴진다. 중반까지 흥미롭고 재미있다가 뒤로 가면서 점점 매력을 잃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비약과 충실하지 않은 설명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다행히 잘 읽히는 재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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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북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유영희 옮김 / 끌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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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펼치는 순간 사람이 죽는다.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더 라스트 북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파피루스 서점에서 한 노인이 죽은 채로 발견되면서부터다. 외상 흔적도 없고, 누군가와 접촉한 적도 없다. 법의관은 심장마비로 판단하고 시체를 내어간다. 사건은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검시 결과를 보니 심장마비가 아니다. 갑자기 죽은 원인을 알 수 없다. 원인 불명의 사인이지만 단 한 건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또 다른 시체가 서점에서 발견된다. 이제 사건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 서점에서 세 사람이 연속적으로 죽는다. 그곳이 파피루스 서점이고, 서점의 주인 중 한 명인 베라와 형사 루키치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다. 처음엔 단순 관계자였던 두 사람이 시체가 한 구씩 늘어나면서 가까워지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형사와 시체가 반복적으로 발견된 서점 주인과의 사랑이라니 무서울 수도 있는 환경에 봄 향기를 불어넣어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을 정보를 주고받고, 루키치 형사는 베라와 사랑을 나눈 후면 꼭 이상한 악몽을 꾼 후 잠에서 깨어난다. 왜 그럴까? 한두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더 반복되면 의문이 생긴다.  

 

 시체가 계속 발견되지만 명확한 사인이 없다. 여기서 현대의 고전인 <장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소설에서 책을 둘러싸고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한 오마주다. 하지만 시체에는 어떠한 독극물의 흔적이 없다. 혹시 지금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독물이 있는 것일까? 의심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면서 국가안보국이 개입하게 되고 사건은 더욱 커지고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다.  

 

 시체가 발견되는 장소가 서점이다 보니 서점과 고객을 둘러싼 재미난 일과 사람들이 나온다. 자기 집에서 책을 가져와 책장에 꽂아두는 사람이나 자신이 산 책을 들고 와 한 장소에서 읽는 사람이나 책꽃이의 책들을 마구 뒤섞어 놓는 사람 등이 나온다. 베라는 이들을 환자라고 부르고, 그녀의 동업자는 기인이라 부른다. 어떻게 불리던 상당히 특이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중 한 명이자 아인슈타인으로 불렸던 박사 더 라스트 북에 대한 단서를 흘린다. 이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일까? 아니다. 작가는 더욱 미궁으로 사건을 밀어 넣고 독자를 혼란 속으로 빠트린다.  

 

 서점, 책, 형사라는 소재를 엮어 재미난 소설 한 편을 만들었다. 책 좋아하고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요소들이다. 거기다 사인도 제대로 모르고, 더 라스트 북이란 이상한 죽음의 책만 돌아다니고 있다. 뒤로 가면 이 책을 숭배하는 비밀 교단이 나와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제 갓 시작한 두 연인이 가는 찻집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다가온다. 현실과 상상과 꿈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장면들은 연쇄 죽음으로 더욱 깊숙이 감상 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 반전에선 어느 정도는 예감했을 수 있지만 아쉬운 느낌이 있다. 이 부분은 역시 정밀한 기계적인 구성이나 기존 소설이나 설명 등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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