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선혈 Nobless Club 15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상적인 장면으로 문을 연다. 쿠세인들의 주사위에 숫자 눈 대신에 사람 눈이 박혀 있을 것이란 소문이 있다. 물론 낭설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황제의 주사위다. 이 주사위는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이다. 재미난 것은 절망을 던진 후 희망을 던지는 것인데 반전이란 단어가 나오면 황제가 오히려 절망에 적힌 처벌을 받게 된다. 한 여자가 묶여 있고, 한 남자가 떨면서 주사위를 굴린다. 그 결과는 절망 그 자체다. 그리고 한 소년이 달려와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한다. 당연히 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끝으로 가면서 하나의 고리로 이어진다.  

 

 쿠세는 사막의 나라다. 이 곳 황제는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고 있고, 주변국을 속국으로 삼고 있다. 그러던 중 이 나라 황제의 동생인 레아킨이 가출을 한다. 그가 떠난 것은 감명 깊게 읽은 한 권의 소설 때문이다. 비오티란 작가가 쓴 것인데 감정이 메말라버리고 눈에 색을 빼앗긴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사막을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쿠세의 식민지인 라노프의 수도 옐린이다. 이곳에서 그는 죽은 탑이란 곳의 심판관으로 재직한다. 이 탑은 쿠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악랄하고 잔혹한 곳이다. 그가 처음 와서 사람들을 너무 쉽게 처형하는 것을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보다 감정이 메말라도 너무 메말랐다는 느낌이다.  

 

 그가 왕궁을 떠난 것은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이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 중심에 비오티란 작가가 있다. 작가에 대한 환상이 가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환상은 물론 깨어진다. 그가 품고 있던 이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만남에서 사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순정만화의 한 장면들 같다. 외형적 실망은 그녀가 지닌 문장의 힘으로 가려지고, 막말과 무례한 행동은 다른 매력으로 덮어진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넓은 강이 존재한다. 쿠세 황제의 동생인 레아킨과 라노프 독립운동의 희망인 라흐의 애인이었던 것과 신분의 차이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레아킨의 가슴 속에 감정을 집어넣는다. 비아티란 존재가 그의 돌 같은 감정에 균열을 불러온 것이다.  

 

 비아티로 향한 감정이 더욱 강렬해지면서 레아킨은 많은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 속엔 특권층이 가졌던 오만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와 비아티의 관계가 하나의 축으로 중심을 잡았다면 쿠세와 라노크의 정세와 죽은 탑과 귀스트로 이어지는 상황은 그 둘 사이의 틈을 더욱 벌리는 동시에 레아킨의 열정을 더욱 강하게 부채질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힘을 잃어간다. 애증이 뒤섞이고, 출생에서 비롯한 오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너무 빤한 반군의 활동은 뒤에 나오는 경계를 넘어선 존재와 더불어 비약처럼 느껴지고, 너무나도 쉽게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고귀한 가치와 대의는 하수구로 빠져버린다. 그것이 비록 욕망이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너무 쉽게 변하는 모습에선 바로 고개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작가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비아티와 주변 작가 친구들의 대화 속에 현재의 삶을 살짝 드러내고, 자신의 바람을 섞어 놓았다. 그리고 레아킨의 순정에선 고민도 주저함도 없다. 국가의 적을 살려달라는 요청에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군사를 죽여버린다. 이 부분에선 작가의 잔인함에 놀란다. 그의 메마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정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뒤에 시체에 남겨진 흔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장군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무자비하고 주저 없는 행동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조금씩 깨어지지만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첫 장면에 나온 상황을 풀어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알게 된다.  

 

 

 쿠세와 라노프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과 사람들의 삶은 피상적으로 다가온다. 역사를 중간에 집어넣어 상황을 만들었다면 이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선행되어야 한다. 단지 독립을 위해, 사랑을 위해란 감정의 흐름은 뒤에 나오는 출생의 비밀처럼 생뚱맞게 느껴진다. 중반까지 흥미롭고 재미있다가 뒤로 가면서 점점 매력을 잃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비약과 충실하지 않은 설명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다행히 잘 읽히는 재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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