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2
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엄기호 외 지음 / 교양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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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대목은 어려웠고 몇몇 대목은 흥미있었다.

 저자의 생각들을  아직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일방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문득 했다.

 내가 리뷰를 쓰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읽은 내 느낌.. 내가 받아들인 만큼 그리고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서재는 넓고 좋은 리뷰는 많고 이 책에 대한 글들도 좋은 것들이 많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이다.

 

 

한국남성들은 아비없는 자식과도 같다.

아비가 자식에게 몸으로 보여주며  따라하게 하는 역할모델을 하며 자식이 성장하는 법인데

어느 순간 한국 남성은 내가 따라야 할 롤 모델이 사라졌다.

일제와 함께 시작된 근대화에서는 이미 조국은 사라졌고 기존의 가치관은 땅에 떨어졌고

일본을 모방해서 살아남거나 그저 식민지하의 남성으로 열등하게 살아가거나 하는 방법밖엔 없다.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하는 관습은 우리것이 아니고 내게 익숙할 수 있는 방법은 여성의 것이거나 노예의 것뿐이다. 그렇게 혼란스럽게 스스로 자기가 어떤 모습을 해야하는지 급하게 결정하거나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광복된 후 들어온 서양의 문화와 정치를 단계를 건너뛰며 받아들인다.

더 좋아보이고 더 힘이 있어 보이는 문화를 걸치지만 그것 역시 내것이 아니어서 비틀리고 어딘가 품이 어정쩡한 형태로 내 몸이 되었다.

남자다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개숙인 남자라든가 어깨가 쳐진 가장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경제적 위기로 모두가 절망에 빠진 그 때 누구보다 남자들이 더 힘들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의 외로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내지 않았으면 그런 변화가 천지개벽할 일처럼 여겨졌을까?  여성도 함께 겪여내야 하는 일에 남자들에게 더 동정이 떨어지고 호들갑스러웠다.

가장이니까 자를 수 없고 여자가 나가는게 모양새가 좋지 않은가 하는 말들이 오간 것도 그때였고, 여자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다고 핑계를 댄 것도 그때였고 신문이나 문학이나 모든 것들이 남자를 위로하기바빴던 것도 그때였다.

세상은 늘 변한다.

내가 고작 반백년도 살지 못했는데 컴퓨터가 등장하고 핸드폰이 등장하더니 스마트 폰으로 바뀌고 인터넷으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없고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며 더 이상 개인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변하는 세상에 맞춰 변해야 하는 건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쩔 수 없는데

남자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 알았고 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라면 의례 그래야 하는 것들을 놓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자꾸 변하라고 하고 여성들은 변해가고 나의 영역은 점점 좁혀오고 이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걸까?

결국 남자다움 혹은 남성성에 집착하면 점점 세상이 좁아지는 것 뿐인데 그걸 바꾸려고하지도 않고 그저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ㄹ녀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버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 부터 멋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들어가는 글>에서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낫어과 함꼐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주의의 가장 큰 논쟁거리이자 이론과 실천의 어려움을 안긴다. 한국 남성들은 해방 후 친일 청산과 대미 사대주의 극복을 제일 과제로 삼앗지만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중략) 남성 세력간의 투쟁과 세력 교체(정권교제) 자체가 한국 사회의 정치적 전선을 독점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독자적 정치학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젠더는 모든 권력 관계의 모델이다. 특히 국제 정치학은 논리자체가 젠더 은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재현된다. 한국의 오랜 오세 콤플렉스는 실제 침략당한 경험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생성된 것이다. 한국남성은 '여성'으로 간주되거나 스스로 '여성'암을 자처했다. 자신은 영원한 식민지 피해자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주된 남성 문화를 '식민지 남성성'으로 명명하기 위한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남성은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나 민족과 동일시 한다.

2)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는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한다. 이때 자신은 강대국에 비해서 약자이므로 '여성'으로 정체한다.

3)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 남성이므로 강자에 저항하거나 강대국을 '이용해야하는 중대한 업무를 띠는데 이때 자기 옆의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꼐 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은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4) 여성해방은 계급 해방이나 민족 해방 이후의 과제이다

5) 이때 여성의 역할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하여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즉 여성은 성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대의이다.

6) 동시에 자신이 지쳤을 때는 언제나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정치적 '동지'여야 한다.

7) 자원ㅇ 부족할 때는 자국 여성에게 적의 '성적 노리개'가 도어 먹을 것을 얻어오라고 강요한다. 이때 우울해하거나 (이상의 날개) 자존심이 상해 여자를 도리어 두둘겨 패거나 여성을 혐오한다.  환향녀(화냥년)라는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매장한다.(안정효 은마는 오지 않는다) 혹은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해 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김기덕 해안선) 나 분노로 인해 스스로 미친다(남정현 분지)

8) 손상된 자신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ㄱ위해 어머니와 누이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거나 이 영화를 아버지에게 바친다

9)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일본)과의 투쟁에서' 우리에겐 위안부카드가 있다'며 외세 협박용으로 삼거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과 대신 경제 협력이나 군사 원조를 받아낸다. 강대국에게 군사력이 협상할 수 있는 힘이라면 한국 남성에게 그 자원은 여성이다.

10) 자신의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지만 강자는 멀리 있거나 강대국 자체도 균질적 존재 (여성이나 흑인이 있다)가 아니므로 도리가 없다. 결국 술을 마신다. 무겨력 자기 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상태에 있다.

 

                                            정희진 < 한국 남성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중

 

 

누구와 동일시할것인가 누구와 함꼐 무엇을 할것인가의 내용은 완전히 다시 쓰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의 기획이었던 근대는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으로 다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 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움직임은 헤러웨이(Donna J. Haraway0 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이다. 잰도룰 꾾임없이 이분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ㅍ평등하게 하지도 못했고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 결과 한국 남자들은 끊임없이 보편의 위치와 동일시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고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부 생식기의 기능에 집착하며, 자신들을 탈식민지화 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을 식민화함으로써 정신 승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남성문화로 승인하는 순간 남자들간의 차이는 사라져버린다. 남자들 간의 차이가 드러날 수 있어야 만 다시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이 반복 수렴되는 무한 루프를 멈출 수 있다. 그래야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성이 아니라 남자들의 남성성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탈 식민지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권김현영 < 근대 전환기의 한국의 남성성>

 

 

인간을 두가지 젠더로 인식하는 문화 장치이나 이를 자기 범주로 몸에 익히도록 하는 과정인 섹스-젠더 이분법 혹은 이원젠더체계는 언제나 근대 의료 기술과 인식론을 밑절미로 삼는다. (중략)

근대적 젠더는 늘 개인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분류하고 정의하여 한 개인을 교집합 없는 범주에 가두고 단 하나의 명료한 범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며 한 개인의 몸을 둘 중 하나의 범주에 오차없이 부합하는 형태로 만든다. 하지만 개인을 명료하게 만드는 작업은 언제나 남성이냐 남성이 아니냐로 나뉘고 트랜스젠더퀴어나 인터섹스 혹은 다른 젠더 범주의개인은 남성 범주와 무관하게 된다. 남성 범주는 민족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 민족 자체이기때문에 순수하다는 신화를 유지해야한다. 남성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이협하는 요소는 모두 비낭성 범주로 버려진다.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는 바로 이 과정 남성의 몸과 그 몸에 당연히 부착해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성을 여과하는 과정이며 특정한 남성 신체에 남성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는 신화를 영속하는 정책적 과정이다. 하지만 규법적 남성성은 트렌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중략)

근대 의료 기술은 남성성을 통해 제지위의 변화를 꾀했고 남성성은 의료 기술을 통해 제 실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렇게 구축된 실체는 불분명하다. 구체적인 것은 외부 성기 음경과 고환뿐이다. 이성애 관계에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음경이 있어야 비로소 의료 규범적인 남성이다. 재생산할 수 있는 음경이 있다면 자신의 젠더 인식과 상관없이 남성이어야 한다. 이것은 의학에서 신생아를 남성으로 판별할 때 가장 중시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아이러니하다. 근대의 이상게서 남성성은 과학적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 비합리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은 언제나 비남성성에 속한다. 아울러 자연적인 것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도 남성성의 성질은 아니라고 회자된다. 남성성은 과학적 이성이며 감정없는 판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과 이성을 자신의 밑절미 삼은 의학과 의료 기술기획이 규정한 남성/성은 외부 성기와 재생산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가 아니다. 성폭력 가해 남성이나 성구매 남성이 가장 많이 하는 항변은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항변은 성폭력 가해와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자 생물학 혹은 의학을 본질주의로 만들고 규범으로 만드는 과학적 실천이다. 즉 근대적 이성 과학적 합리성은 거의 언제나 남성 (혹은 지배규범) 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실천 양식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식의 언설은 의료 근대화가 기획하는 남성성의 핵심을 요약한다.

 

                                               루인 <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중

 

 

 

 

새로운 인간 개념은 존재 자체를 사회적으로 존재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사유하고 사회적인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민권을 다시 상상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하는 노동과 재생산하는 노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이 생산이자 재생산이며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생산과 재생산의 거대한  사회적 과정에 개입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그래서 시민권은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기 이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 혁신 될 필요가 없다. 이는 우리들이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두가지 다른 양상의 남성성이 출현했따. 이 둘은 국민국가의 주권적 존재인 남성의 위기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는 두가지 방식이다. 한쪽은 주권자로서 남성의 위기에 반응하여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 역시 기득권자가 아니라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성이 더는 주권의 독점자일 수도 생계 부양자일 수도 없는 재편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다음이 무엇이어야 하며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우치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어는 없다.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자기 연민의 언어이다.

그리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킨다. 이들이 운명 담론을 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따라서 이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보편성의 옹호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엄기호 <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중

 

 

 

우리는 남녀라는 성별 이분법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분법 부치와 펨이라는 이분법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대립적으로 있다는 섹스와 젠더 이분법까지도 모두 넘어서야 한다.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것은 두 개보다 더 많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숫자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을 깬다는 것은 대립된 한 쌍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언정성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항상 그렇게 명쾌하고 깔끔하게 분류될 필요가 없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이른바 이성애자 남성은 누구인가? 이성애자 남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어떻게 구분하고 판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성애자가 될 수 있었고 남성이 될 수 있었는가? 여성을 사랑하기에 이성애자가 된 것인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끌린 것인가? 이성애자 남성은 상대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을 어떤 감각으로 판단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다른 성별을 지녔는가? (중략)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 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러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나 ㄴ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남성서과 이성애의 정상성에 대한 믿음은 그토록 강력하면서도 인정성에 대한 믿음은 왜 이토록 허약할까?

이 시대를 뒤덮은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는 사실상 이성애자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의 작동때문이다.

 

                           정채윤 <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트랜스 남성의 남성성은 일견 전형적인 한남이 되고 싶은 욕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내가 처음 느꼈던 평범한 남성성은 일상에 만연해 있고 한남들이 과시하는 바로 그 남성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이나 페니스 유무를 비롯해서 신체적 차이등 들킬 위험을 내재화하는 맥락상 조건은 분명 다르지만 마초스러운 너무나 마초스러운 트렌스남성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과 구분짓는 게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의 규범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수행 불가능 그자체가 남성성의 특성이기도 하다. 언제나 지연되는 것 늘 실패하는 것 적절한 좌절을 추동력 삼아 사회적 남근이라는 성별 위계와 역할을 지속하는 것이 지배적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ㅏ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각의 남성 집단들이 바련하는 남성성이 그러하듯 트랜스 남성 역시 한남으로서 남성성이 지니는 수행 불가능성을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트랜스남성에게 남성성이란 언제나 획득할 수 엇음으로써 얻어지는 역설적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트랜스 남성의 트랜지션 과정은 그저 한남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렌스 남성의 남자되기 욕망과 실천은 결국 이 사회 주류 남성의 문화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트렌스 남성은 지금껏 그래왔듯 자신들의 맥락과 입장에서 성별 규범을 충실히 수행하고 남성성을 발현하며 살아갈 것이다. 트렌스 남성성은 한남이 됨으로써 한국 남자의 남성성을 충실히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 다른 방향의 변화를 만들지도 모른다"트래느 남성이 되거 싶은 것은 한남인가?"

 

                                                    준우 <트랜스 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남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

한국남성은 한국 남성으로 만들어진다.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국가에서 부여하는 주민번호 뒷자리를 홀수로 부여받는 순간 남자로 길러지고 만들어져간다.

내 의사나 성향 어떤 호르몬의 작용과는 상관없이 남자라는 틀에 들어간다.

남자답지 못하게.....

남자가  그러면 안되지....

남자가 이깐 일로....

남자라면 당연히....

어떻게 남자한테 감히...

남성은 권력이고  힘이고 세상의 기준이 된다.

세상은 남자와 남자가 아닌 나머지로 나뉜다.

그렇게 기준이 된 그들은 그 기준에 벗어나는걸 못견디고 두려워한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다 다르다고 하는데 세상에는 모두가 같은 남자와 다른 나머지들이 있다.

모두 같아야 하는 남자들은 힘들것이다.

나도 내가 아닌 것을 그런 척 하는게 힘들다는 걸 알고 그건 꼬마들도 몸이 배배꼬이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냥 다른 수도 있고 다양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편하다,

세상이 변하니까 내가 변해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변하하는 세상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움직여가는게 편하지 않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은 변해도 되고 달라도 되고 힘을 빼도 된다는 걸 아는 일이다.

페미니즘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좋은 방향이라는 걸 이렇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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