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의 저자가 이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로 하면 ‘조선을 바로 알자’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로 알자는 것인가? 저자는 조선을 지금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고 조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가의 의무가 아닌가? 그러나 그 의무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조선사 연구라고 저자는 본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역사학 개론에서도 말하지만 우리가 조선을 보는 시각은 너무나 지금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고 잇다는 것이다. 저자는 광해군의 복권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조선시대 내내 광해군은 혼군이었고 폭군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광해군은 실리외교와 민생에 주력한 명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축출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역사는 공리공론의 성리학자들이 사대주의를 내세우면서 나라를 망치고 양반의 기득권을 위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쇠락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그런가하고 묻는다. 광해군은 절대 민생을 염두에 둔 사람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잇는 것처럼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려 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공리공론의 계급적 이익만 추구한 양반 사대부들이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하고 그 시범으로 설치한 선혜청의 시도를 무산시킨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 집권시기 내내 한 일이라고는 궁전을 짓는 토목사업 뿐이었고 그 토목사업을 벌이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데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전시행정의 전형인데 뭔가 보여줄 것이 없는, 뭔가 업적을 낼 정책을 짜낼 머리가 없는 군주가 과시용으로 하는 전형적인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토목사업은 매년 재정의 1/4을 쏟아부어야 했고 임란 이후 망가진 나라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란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실용주의 외교라는 것은 바로 국내의 여력을 소진시키는 토목사업의 여파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정책일뿐이었다는 것이다. 군사력을 키울 재원을 토목사업에 모두 소진했고 국가경제도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후금에 대한 정책은 충돌회피일 수 밖에 없었고 명의 파병요청을 기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광해군의 복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의 토목사업에 대해선 가볍게 넘기거나 무시하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그 이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책의 다른 부분을 보면 저자는 그 의도가 인조반정 이후 집권세력에 대한 반감이 그런 식으로 나온 것이라 말하려는 것같다. 그런 반감에 대해서도 저자는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리공론만 일삼은 명분론자들이 쓸데없는 명분만 입에 올리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데 급급했던 것이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들 양반 사대부였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고 저자는 묻는다. 우선 대동법이 어떻게 확립되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보면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동법은 인조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는데 그 진행과정을 보면 양반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제도 자체의 논리에서 논의가 진행되었고 국가운영을 공공의 논리에서 생각하는 건전한 논의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율곡이 논의를 제기한 이후 200년이 지나 완성된 대동법의 정착과정은 계급이익의 논쟁이라기는 보다는 제도 자체의 논리에서 읽는 것이 제대로 된 독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동법의 논의는 양반 사대부들의 머리가 공리공론으로 굳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저자는 보는 것같다. 저자가 그런 사례를 자세히 분석하면서 보여주려는 것은 조선의 성리학이 조선의 힘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저자는 조선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엇는가란 질문을 한다. 지금의 헌법과 같은 것은 당시에 없었다. 경국대전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정부기구의 운영에 관한 법령집에 가깝다. 저자는 조선의 헌법은 삼강오륜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은 임금과 아버지, 스승을 말하면서 인간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삼강오륜이엇다는 것이다. 근대화 이후 유불선 3가에서 유교만 철저하게 말살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치의 운영원리를 규정하는 사상의 중심이 서양의 계몽주의의 정치철학으로 대체되면서 경쟁자인 유가가 말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철학인 유가 정확히는 성리학의 역동성이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이라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사림 세력이 정치의 주류로 자리잡기까지 조선은 유교가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나라였다고 말한다. 세조가 불경의 언해본을 국가사업으로 간행한 것, 명종대에 스님 보우가 권세를 떨친 것에서 보듯이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불교를 찍어누르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자신의 사상, 성리학이 조선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그라지지 않을까 불안해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초기를 거쳐 중기가 넘어가면서부터 성리학은 조선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선 성리학이 힘을 잃고 화석화되어 갔으며 그 혁신운동으로 양명학이 대두되고 청대에서는 고증학이 대두되는 등 성리학이 역동성을 잃어버렸지만 조선은 이제 막 성리학이 정착하는 단계였고 역동성을 뿜어내는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리공론과는 거리가 먼 단계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을 요약해본 것이다. 사실 위의 요약이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책은 일관된 주제에 따라 단일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쓰인 것이 아니라 여러 단편적인 논설을 모아 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요약해 본 것은 여러 편에 나뉜 저자의 주장을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책의 의미는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 있다. 저자가 이책에서 망한 나라는 말이 없다고 말하듯이 말이 없는 망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조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는가? 저자가 이책에서 묻고 있는 질문을 던져본 사람이라면 이책의 내용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책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책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고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책은 대중적인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깊이가 있는 저작이 아니란 말이다. 이책에서 조선의 긍정적인 면을 찾고자 한다면 의미가 있지만 이책으로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구 미디어 회사들에게 구글은 나폴레옹이다. 자유, 평등, 박애. 선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구호이다. 그러나 그 프랑스 혁명의 구호로 나폴레옹이 한 일은 제국 건설이었고 그가 선물한 것은 전쟁의 재앙이었다. '사악해지지 마라' 애매모호한 말이다. 그러나 그 구호를 내걸고 구글이 한 일은 구 미디어 회사들에겐 재앙이었다. 음반회사들에게 인터넷이 핵폭탄이었듯이 구 미디어 회사들에게 구글은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사악해지지 마라' 애매모호한 이말은 구글에게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뒤집으면 선해지라는 의미인 이말에 따라 구글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선의로 무장했고 엔지니어가 지배하는 구글에게 선해진다는 것은 세상을 더 합리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였다. 미국의 광고시장은 GDP의 1%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효과가 있다면 그 돈의 크기가 얼마더라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마케터들이 불평해 왔듯이 광고는 갈수록 효과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광고는 예술이 되었다. 우리는 쓸모가 없는 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알 리스의 말이다. 구글의 엔지니어들은 왜 광고가 쓸모가 없어졌는가? 질문했다. 그리고 해법을 내놓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광고가 무용해진 것은 가격에 거품이 끼었는데다 필요없는 사람에게 필요없는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왜 광고가 예술이 되었겠는가? 처음 광고가 나왔을 때는 단순했다. 상품의 장점을 알려주는 사실적인 정보전달 기능에 충실했다. 그러나 지금의 광고는 어떤가? 상품과는 무관한 그야말로 예술가의 '작품'이다. 광고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정보가 된다. 지금까지는 그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구글은 간단하게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해법은 지금 검색광고라 불린다. 검색광고는 대박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한 대박으로서 구글의 경이적인 성장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구글의 성장이 구 미디어 회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음반산업이 초토화된 것처럼 인터넷 덕분에 구 미디어는 구독자와 시청자를 잃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이젠 광고수입까지 뺐긴다면? 죽음이다. 구글은 언론사만 건드린 것이 아니다. 출판사들도 벌떼처럼 일어났다. 구글은 광고를 개선한다는 '선한' 의도로 언론사들을 적으로 돌린 것처럼 도서검색을 들고 나와 출판사들도 적으로 만들었다. 구글의 엔지니어들은 물었다. "왜 절판된 책을 보면 안되는거지?" 그리고 도서관에 잠자는 책들을 스캔해 검색할 수 있게 하는 프라젝트를 띄웠다. 음반사와 언론사들이 침몰하는 것을 지켜봐온 출판사들은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 생각했고 구글의 적이 되었다. 언론사와 출판사들만이 아니다. 구글의 엔지니어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걸어다니면서 검색을 할 수는 없는거지?' 그리고 안드로이드 폰을 제안했다. 이번엔 아이폰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애플과 전화회사들을 적으로 돌렸다. 구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세상을 좋게 만들겠다는 선한 의도로 한 일들인데 왜 공격을 받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90년대 반독점 소송을 당하던 시절 MS 역시 그랫다. 자신들은 분명 좋은 의도라고 생각했다. 저렴한 가격에 뛰어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시장에서 기업이 할 일이 아닌가?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MS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바로 나는 선하다는 오만 때문에. MS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제품이 좋아서 쓸 뿐이지 MS라는 회사 자체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구글은 가장 신뢰받는 브랜드이다. 그들의 '사악해지지 마라'는 구호를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구글이 선한 의도로 하는 일들은 소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를 화나게 만들고 적으로 만들었다. 좋은 의도라고 믿기에 다른 사람들도 좋게 생각해줄 것이란 순진함이며 내가 옳으면 옳은 것이란 오만함 때문이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 구글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왔고 많이 읽혔다. 위에서 요약한 내용이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이미 구글에 관한 책을 읽었거나 경제뉴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러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책의 가치는 내용보다 그 내용을 쓴 ㄴ 스타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자인 저자는 실제 구글의 경영진들과 구글에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회사의 경영진들을 여러해동안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현실을 보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디테일하게 쓰고 있다. 이책의 장점은 바로 그런 자료 수집에서 오는 현장감이다. 구글에 관한 책을 몇권 보았고 그중에서 기자가 쓴 책도 있었다. 그러나 이책처럼 여러해에 걸쳐 다양한 관계자들을 발로 뛰면서 자료수집을 한 책은 없었다. 자료의 치밀함 덕분에 이책은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예를 들어 실제 구글의 경영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책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책은 보지 못했다. 평점 4.5
19세기가 영국의 세기였다면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세계의 바다를 누비던 영국 해군이 세계에 질서를 만들었다면 20세기는 미국의 해군이 세계질서를 만들었다. 세계의 질서는 3차원이다. 3차원에는 다국적기업들이 세계시장이란 무대를 누비고 2차원에선 여러나라들이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3차원과 2차원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1차원이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차원은 군사적 차원이며 지정학의 차원이다. 1차원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의 패권을 쥐는 것이 세계질서이다. 경제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권을 휘두르는 것같지만 경제가 돌아가려면 2차원과 1차원의 질서가 있어야 하며 아래 차원의 지배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패권은 누가 쥐게 될까? 아직까지는 미국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미국의 경제력이 패권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21세기도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 용감하게 말한다. 물론 미국이 저물어간다고 보는 사람들도 앞으로 수십년은 미국이 리드할 것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그러나 100년을 더 간다고? 저자의 주장은 엉뚱하게 들린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저자의 근거는 3가지이다. 첫째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어느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둘째 그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두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패권을 쥐게 되는데 현재 미국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두 대양을 지배하고 있고 미국은 바다의 패권을 자국의 핵심 이익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한다. 셋째 물론 그 지배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패권은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미국은 앞으로도 패권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논거에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세번째이다. 미국이 앞으로도 패권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 저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논거는 미국은 아직 젊은 사회라는 것이다. 지난 500년동안 유럽의 문화를 보자. 500년전 대항해시대가 시작될 무렵 유럽의 문화는 야만성을 보였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연 스페인이 그랬다. 스페인제국을 산산조각 낸 종교적 광신은 그런 야만성을 더 없이 잘 보여주는 예이다. 사회가 야만적일 때의 특징은 자신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자연의 법칙과 같이 자명하다는 오만과 자신감이다. 그러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성숙해 가듯이 사회 역시 그렇다. 사회가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 문명화되면 오만과 근거없는 자신감은 줄어든다. 세상이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만할 정도로 경험이 쌓이고 세상을 알아가게 되면서 자신과 세계의 모순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자신감에 찬 시기에는 그러한 모순을 조화롭게 받아들이고 균형을 잡을 여유가 있다. 19세기까지 유럽이 그러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유럽은 퇴폐의 시대로 들어섰다. 냉소적인 태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것에 비해 더 나은 그 무엇은 없다’고 믿는다. 상대주의에 빠져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상대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믿으려는 사람을 경멸하며 특별히 싸워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아직 야만의 미성숙 단계라는 것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저자의 진단에 반대하기 힘들다. 저자는 문명화의 성숙단계에도 들어서지 않은 미국은 충분히 힘을 쏟아낼 능력이 있다고 본다. 지금 당장 미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가정하는 것같다. 저자는 미국이 앞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잠재력이 있다는 가정에서 21세기 패권의 방향을 예상한다. 저자가 이책에서 그리는 21세기는 20세기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저자는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온 전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바다를 지배한다. 해로의 통제권을 갖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된다. 둘째 그 통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국가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9.11 이후 아프칸과 이라크를 공격한 것을 그러한 전략으로 본다. 알카에다와 같은 급진세력이 이슬람권을 통합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아프칸과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실패한 전쟁이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이길 필요는 없다. 그 전쟁으로 이슬람권의 혼란은 이전보다 더 심해졋고 그 지역이 하나의 목소리를 낼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걸로 된 것이다. 저자는 21세기에 미국에 도전할 국가가 어떤 곳이 될지 예상해본다. 이슬람권은 그렇게 무력화되었다. 중국은 어떤가? 저자는 중국은 내부의 불안정성 때문에 미국에 도전할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분열되었다. 그 분열은 중앙과 연안지역의 갈등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외국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는 연안지역은 외국과 연합하여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했고 중앙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군벌을 형성했다. 마오는 내륙의 가난한 농민들의 힘을 동원해 연안지역을 누르고 통일을 이룬 것이다. 마오는 이후 중국의 문을 닫는 자폐적인 정책을 폈다. 덩 샤오핑 이후 개방은 100년전 중앙과 연안지역의 갈등을 다시 표면화시켰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중국경제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한다면 그러한 갈등은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중국경제가 지금까지와 같은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제성장이 둔화될 때 중국의 불안정은 표면화되고 중국은 분열되거나 적어도 중앙의 통제력이 무력화되면서 실질적인 분열상태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러시아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본다. 소련 붕괴 이후 경제와 인구구조의 모순은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모순의 무게에 눌려 러시아는 붕괴될 것이라고 저자는 내다본다. 그러므로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에 주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본다. 20세기부터 퇴폐기를 겪고 있고 인구학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유럽은 계속 몰락의 길을 갈 것이다. 미국의 눈길을 끄는 나라는 터키와 폴란드, 그리고 일본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본다. 터키는 안정적인 경제와 정치구조, 사회를 가진 터키는 젊은 인구와 경제성장에 힘입어 이슬람권의 맹주로 등극할 것이라고 저자는 본다. 그리고 러시아의 몰락을 등에 엎고 폴란드가 중유럽의 맹주가 될 것이다. 일본은 좀 다르다. 일본은 유럽처럼 인구학적 몰락의 길을 걷고 잇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불안정을 이용해 20세기초에 그랬던 것처럼 팽창주의 노선을 채택해 몰락의 길을 벗어나려 할 것이라고 본다. 미국은 세계의 중심인 유라시아의 어디에서도 자신의 패권에 지역적으로라도 도전할, 자신의 해로 통제권에 도전할 세력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미국은 터키와 일본의 팽창을 저지할 수 밖에 없고 이는 전쟁으로 발전할 것이라 본다. 독일과 일본이 20세기초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으려 한것과 마찬가지로 21세기에 터키와 일본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미국은 또 이길 것이라 저자는 본다. 이때의 전쟁은 과거와는 다른 전쟁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쟁은 누가 우주를 장악하는가가 될 것이라 저자는 본다. 우주에서 지구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지상으로 무기를 발사하는 통제센터가 우주에 만들어질 것이라고 본다. 물론 여전히 바다를 지배하는자가 패권을 쥐겠지만 그 바다를 지배하려면 우주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무기체계는 인구감소에 대응해 로봇공학에 의존할 것이며 기술변화에 따라 석유대신 전기가 무기운용의 에너지가 될 것이라 본다. 군용으로 쓰이는 전기는 막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를 얻기 위한 방법에도 혁명이 일어나 우주에서 태양열을 받아 전기를 만들고 전기를 마이크로웨이브로 변형 지구로 전송하는 방식이 군용으로 개척될 것이라 저자는 본다. 결국 군용으로 개발된 로봇공학과 발전기술은 20세기에 그랬듯이 경제를 바꿀 것이라 저자는 본다. 미국의 주간 고속도로는 군용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와 사회의 지도를 바꾸었다. 인터넷 역시 군의 데이터 전송을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경제와 사회를 뿌리채 바꾸었다. 21세기에도 마찬가지로 군의 필요에 의해 개발된 로봇공학은 인구감소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저자는 전망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물론 이책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내용이 있고 위의 요약에서 빠진 디테일들이 있다. 그러나 핵심은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전망이 맞을 지는 알 수 아무도 알 수 없다. 특히 미국의 패권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대담한 주장이 맞을 지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러나 저자의 예상이 맞고 안 맞고는 이책의 가치와는 큰 상관이 없다고 본다. 이책의 가치는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은 지정학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책은 그런 관점을 배우는데 충분하다. 평점 4.5
이책의 저자에 따르자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앙꼬 없는 찐빵이다. 좀 더 구체적인 비유를 들자면 펜티엄 프로의 하드웨어에 DOS를 돌리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가 가능한지도 한 세대 가까이 지났다. 그러나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는가?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 이유를 한국의 정치문화를 지배하는 사고방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지역주의란 단어를 잘못된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든다. 지역주의가 망국병의 원인이란 말이 떠돈지도 기억이 가물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런데 왜 지역주의가 문제인가?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주의의 문제를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표의 쏠림 현상, 둘째 자리의 쏠림현상 셋째 향리주의. 그러나 왜 이게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기 사람에게 표가 많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당선된 사람이 제대로 일을 하려면 생판 모르는 사람이나 적대 세력의 사람을 쓰기 보다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인선을 하는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저자는 탕평책이란 것은 우악스런 알도 안되는 정책이라 지적한다) 내 지역이 우선이라는 향리주의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지역주의가 도대체 왜 문제인가? 저자는 이해가 안된다고 말한다. 위의 3가지 중 호남에서 90% 이상의 표 쏠림이 있지만 그런다고 대한민국이 내전으로 조각이 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고 지적한다. 게다가 저자는 지역주의란 말을 하면서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보기에 지금의 지역주의라 불리는 현상의 원인은 광주사태 때문이라는 것이다. 광주사태란 황당한 경험을 한 호남사람들은 그 사태를 일으킨 정치세력을 불신할 수 밖에 없고 그 후계자인 세력에게 당연히 반감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영남의 표 쏠림은 또 다른데 김대중에 대한 반감으로 김대중의 후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표 쏠림 현상이 지역주의라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이고 다른 어떤 대안도 가능할 것같지는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표 쏠림이 나온다고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대한민국이 그것 때문에 무슨 망국병을 앓고 있는가? 저자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역주의를 문제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망국병이라 말한다. 실제 문제가 아닌 것을 이름을 붙여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몰아 공격하는 마녀사냥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가짜문제’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의 특징을 일차원적 합리주의와 선험주의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관념론적 사고방식이다. 저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미성숙의 특징으로 본다. 세상에는 항상 정답이 있고 진리는 하나라는 태도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런 사고방식을 산술적 합리주의라 말한다. 1+1=2라는 정답이 있듯이 세상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그 답을 아는 사람이라는 오만을 드러낸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으니 나와 다른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답이 여러 개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합리성이란 정해진 답을 찾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현실의 합리성이란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 합리성이란 답을 만들어가는, 진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할 뿐이다. 저자는 현실의 합리성을 입체적 합리성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옹고집 오만 덩어리들은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은 현실이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성 위에서만 성립하는 현실의 합리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답이 현실에서 부서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불확실성을 두려워 하는 제노포비아, 익숙한 것 알고 있는 것만을 지키려 하는 폐쇄적 사고방식이 한국의 정치문화를 질식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의 합리성이란 토론과 타협을 통해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할 뿐이다. 저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덜된 옹고집들은 자신과 다른 답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토론과 타협으로 자신과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것과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권력을 추구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하기 싫은 것을 힘으로 누르고 침묵시키려 한다. 이상이 이책의 저자가 말하는 바를 간단하게 요약해 본 것이다. 그리 낯설지 않은 주장이다. 한국문화의 폭력성에 대한 말은 많이 나왔고 파시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말들이 있었다. 이책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 많은 말들 중에서 이책의 가치는 그것을 정치에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대단히 장황하게 말하고 잇고 중언부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치 그중에서도 문화 그중에서도 담론의 형식에만 한정된다. 사실 읽어나가면서 왜 이렇게 두꺼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책의 제목처럼 모든 사람이, 정치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상당히 기초적인 개념까지 자세히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상당히 자세하게 사례를 들고 사례를 분석해나간다. 전체적으로 이책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저자가 의도한 것처럼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가 왜 이 모양인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잃을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이라면 저자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책의 저자 신영복은 학자로서보다는 장기수로 더 유명하다. 박 대통령 시절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20년 가까이 복역한 이력이 있다. 출소한 이후에는 성공회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전문적으로 중국고전을 연구한 학자도 아닌 사람이 쓴 책이 도움이 될까란 의문이다. 이책이 다루는 범위는 시경부터 시작해 유가, 도가, 묵가, 법가를 섭렵하고 있다. 전문학자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감옥에서 거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 그것도 경제학자가 쓴 책이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다. 충분히 타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의문을 불식시킬 만큼 잘 쓰여져 있다. 저자가 감옥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자가 감옥에서 주로 읽은 책은 중국고전들이었다. 독서 밖에 할 것이 없는 사람이 그 오랜 시간을 읽어 온 것에 대해 쓴 것이라면 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신뢰할만하다. 그렇다하더라도 감옥에서 혼자 공부한 것과 학계의 흐름을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한 사람과는 다르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중국고전에 대한 학계의 연구를 읽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이책에서 제자백가와 고전을 해석하는 틀은 중국학 분야의 컨센서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컨센서스에 따라 해석하면서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고 있어 충분히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이책을 읽을 이유가 있는가? 이책처럼 제자백가에 대한 입문서로 쓰인 책은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저자는 고전을 왜 읽어야 되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고전을 읽는 것은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천년도 더 전에 쓰인 중국고전을 읽어야 되는 이유를 지금의 시대를 읽는 관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익숙한 서양의 관점이 이 시대를 읽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잇다고 생각한다. 그 대안으로서 수천년전에 쓰여진 고전의 사고방식이 더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는 이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둘째는 이책은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책은 전공자나 학자를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다. 이책은 대학교양과목의 교과서로 쓰여진 책이고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틀을 근간으로 쓰여져 있고 읽기 쉽다. 그러나 이책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저자가 지금의 시대를 해석하는 틀이 낡았다. 저자는 맑스주의자이다. 그것도 상당히 낡은 맑스주의자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상당히 거슬리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의 관점이 이책에서 고전을 해석하는 데는 그리 큰 작용을 하지 않는다. 문화혁명을 전후해 중국에서 나왔던 우끼지도 않는 맑스주의적 해석과는 거리를 두고 잇다. 저자는 그 시대의 사상은 우선 그 시대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읽어낸 후에 그것을 지금을 읽는데 도움이 되도록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책은 전체적으로 잘 쓰인 입문서이다. 그러나 깊이가 없는 가벼운 책은 아니다. 이책은 강독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전체적인 해석을 소개하고 원문을 발췌해 그 원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그 책의 의미를 밝히는 식으로 구성된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소개되는 고전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도록 쓰여있다. 고전을 직접 읽기 전에 큰 그림을 그려보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