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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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가 이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로 하면 ‘조선을 바로 알자’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로 알자는 것인가? 저자는 조선을 지금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고 조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가의 의무가 아닌가? 그러나 그 의무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조선사 연구라고 저자는 본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역사학 개론에서도 말하지만 우리가 조선을 보는 시각은 너무나 지금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고 잇다는 것이다.

저자는 광해군의 복권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조선시대 내내 광해군은 혼군이었고 폭군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광해군은 실리외교와 민생에 주력한 명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축출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역사는 공리공론의 성리학자들이 사대주의를 내세우면서 나라를 망치고 양반의 기득권을 위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쇠락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그런가하고 묻는다. 광해군은 절대 민생을 염두에 둔 사람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잇는 것처럼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려 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공리공론의 계급적 이익만 추구한 양반 사대부들이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하고 그 시범으로 설치한 선혜청의 시도를 무산시킨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 집권시기 내내 한 일이라고는 궁전을 짓는 토목사업 뿐이었고 그 토목사업을 벌이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데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전시행정의 전형인데 뭔가 보여줄 것이 없는, 뭔가 업적을 낼 정책을 짜낼 머리가 없는 군주가 과시용으로 하는 전형적인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토목사업은 매년 재정의 1/4을 쏟아부어야 했고 임란 이후 망가진 나라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란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실용주의 외교라는 것은 바로 국내의 여력을 소진시키는 토목사업의 여파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정책일뿐이었다는 것이다. 군사력을 키울 재원을 토목사업에 모두 소진했고 국가경제도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후금에 대한 정책은 충돌회피일 수 밖에 없었고 명의 파병요청을 기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광해군의 복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의 토목사업에 대해선 가볍게 넘기거나 무시하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그 이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책의 다른 부분을 보면 저자는 그 의도가 인조반정 이후 집권세력에 대한 반감이 그런 식으로 나온 것이라 말하려는 것같다.

그런 반감에 대해서도 저자는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리공론만 일삼은 명분론자들이 쓸데없는 명분만 입에 올리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데 급급했던 것이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들 양반 사대부였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고 저자는 묻는다.

우선 대동법이 어떻게 확립되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보면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동법은 인조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는데 그 진행과정을 보면 양반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제도 자체의 논리에서 논의가 진행되었고 국가운영을 공공의 논리에서 생각하는 건전한 논의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율곡이 논의를 제기한 이후 200년이 지나 완성된 대동법의 정착과정은 계급이익의 논쟁이라기는 보다는 제도 자체의 논리에서 읽는 것이 제대로 된 독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동법의 논의는 양반 사대부들의 머리가 공리공론으로 굳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저자는 보는 것같다.

저자가 그런 사례를 자세히 분석하면서 보여주려는 것은 조선의 성리학이 조선의 힘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저자는 조선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엇는가란 질문을 한다. 지금의 헌법과 같은 것은 당시에 없었다. 경국대전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정부기구의 운영에 관한 법령집에 가깝다. 저자는 조선의 헌법은 삼강오륜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은 임금과 아버지, 스승을 말하면서 인간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삼강오륜이엇다는 것이다.

근대화 이후 유불선 3가에서 유교만 철저하게 말살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치의 운영원리를 규정하는 사상의 중심이 서양의 계몽주의의 정치철학으로 대체되면서 경쟁자인 유가가 말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철학인 유가 정확히는 성리학의 역동성이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이라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사림 세력이 정치의 주류로 자리잡기까지 조선은 유교가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나라였다고 말한다. 세조가 불경의 언해본을 국가사업으로 간행한 것, 명종대에 스님 보우가 권세를 떨친 것에서 보듯이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불교를 찍어누르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자신의 사상, 성리학이 조선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그라지지 않을까 불안해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초기를 거쳐 중기가 넘어가면서부터 성리학은 조선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선 성리학이 힘을 잃고 화석화되어 갔으며 그 혁신운동으로 양명학이 대두되고 청대에서는 고증학이 대두되는 등 성리학이 역동성을 잃어버렸지만 조선은 이제 막 성리학이 정착하는 단계였고 역동성을 뿜어내는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리공론과는 거리가 먼 단계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을 요약해본 것이다. 사실 위의 요약이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책은 일관된 주제에 따라 단일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쓰인 것이 아니라 여러 단편적인 논설을 모아 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요약해 본 것은 여러 편에 나뉜 저자의 주장을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책의 의미는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 있다. 저자가 이책에서 망한 나라는 말이 없다고 말하듯이 말이 없는 망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조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는가? 저자가 이책에서 묻고 있는 질문을 던져본 사람이라면 이책의 내용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책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책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고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책은 대중적인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깊이가 있는 저작이 아니란 말이다. 이책에서 조선의 긍정적인 면을 찾고자 한다면 의미가 있지만 이책으로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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