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 - 티베트에서 만난 가르침
현진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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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첫 페이지는 인상적이었다. 책표지에도 실린 이책의 첫번째 사진은 티벳의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그 구도가 눈을 사로잡는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찍은 이 사진의 구도를 따라가다보면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나오고 그 건물의 배경이 되는 푸르디 푸른 쪽빛의 하늘에 시선이 멈추게 된다.

하늘이 저랬었던가? 이책에 실린 첫 사진과 그 뒤의 사진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우리는 하늘 자체만으로는 하늘을 알지 못한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는 항상 땅을 배경으로 하늘을 이해할 뿐이다.

고비사막처럼 자갈 사막의 황량한 땅을 딛고 심해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쪽빛으로 물든 하늘.

이책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티벳의 풍경이다. 이책의 사진을 보면서 왜 티벳인들이 불교도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 장식이 없는 자연 앞에 내던져 사는 티벳인들에게 삶의 근본을 묻는 불교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책의 사진이 보여주는 티벳의 풍경은 피안도 차안도 부정하면서 텅빈 삶의 모습(空)을 깨닫도록 몰아세우는 중관철학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중관철학은 티벳의 대승불교의 중심철학이다.

이책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일관되게 중관철학의 심상이었다. 직관적으로 티벳을 느끼게(생각하거나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책은 다른 어떤 티벳에 대한 책들보다 티벳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책은 완전히 잘못 선택한 경우이다. 이책을 골랐을 때 생각은 스님이 쓴 티벳 여행기였다. 책을 받았을 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책은 티벳 여행기가 아니다. 물론 이책의 주인공은 티벳이지만 그 티벳은 지리적 단위로서의 티벳과 그 지리적 단위에 사는 티벳인들이 아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티벳은 인문지리적 대상으로서의 티벳이 아니라 저자가 티벳을 여행하면서 본 저자의 기억 속의 티벳이며 저자가 티벳 불교를 공부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저자 머리 속의 티벳이다.

이책의 구성은 2-3페이지 정도의 짫막한 에세이들이 나열되어 있고 에세이마다 1-2컷의 티벳 사진들이 배치된 형식이다.

에세이들의 질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그 에세이의 성격이 문제이다. 에세이들은 보통 명상 장르라고 불리는 책들과 비슷한, 또는 불교서적의 법어집과 비슷한 성격이라 보면 된다.

물론 티벳과 그 글들이 무관한 것은 아니다. 간간히 저자가 티벳을 여행하면서 본 것들에 대한 짧은 단상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저자가 티벳 불교를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풀어놓은 것이 주종이다.

알기로는 요즘 한국불교에선 남방불교가 유행인 것으로 아는데 저자는 드물게 티벳어를 공부하고 티벳불교를 파고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세이는 학술적이지도 않고 특정 종교인을 위한 것도 아닌 일반인을 위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쓰인 글들이지만 어느 정도 저자가 티벳 불교를 파고든 내공이 느껴진다.

그러나 티벳 여행기를 기대했던 입장에서 이책은 기대했던 책은 분명 아니다. 사진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내용을 알았다면 굳이 이책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대만족이다. 사진만이었다면 이책은 5점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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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명의 기원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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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영어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왔고 한인, 한어, 한자의 한은 한나라에서 온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이란 문명의 외양은 진나라 또는 한나라에서 이미 완성되어 그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나라와 한나라로 완성된 문명의 외양은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지나치게 조숙하지 않은가? 세계 주요문명중에서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문명은 중국이 유일하다. 그리고 기원전에 쓰여진 문헌을 지금도 그대로 읽을 수 잇는 문명 역시 중국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 연속성의 뿌리는 언제나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로 올라간다. 이 얼마나 조숙한 문명인가?

이책은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중국문명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 시대 이전이라면 하, 상, 주(구체적으로 서주)가 되는데 서주에 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있지만 하와 상은 전설에 속하는 시대이다. 20세기초 중국에선 그 시절은 아예 꾸며낸 허구일 뿐이라고 까지 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갑골문이라 알고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고고학적 발굴이 쏟아지면서 그 시대에 대한 지식이 쌓이기 시작했고 기록되지 않은 시대에 중국문명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시대에 관한 가장 뛰어난 개설서로는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1999)가 있다. 캠브리지 히스토리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이책 역시 해당 분야의 권위자들을 동원해 자신의 분야에 대한 개설을 하도록 위촉한 책으로 1200페이지에 달하는 이책 한권이면 역사 이전 중국에 대한 개관으로는 충분하다.

이책 역시 캠브리지 히스토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 쏟아져 나온 고고학의 업적에 기대어 춘추전국시대 이전 중국문명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책은 캠브리지 히스토리와는 성격이 다르다.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러명의 저자들이 동원된 캠브리지 히스토리와는 달리 저자의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잇다.

이책의 입장은 중국문명의 기본성격은 이미 신석기 시대와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중국은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문명이다. 그 이유는 집약적 농업에 따른 생산성에 있었고 바로 그 집약적 농업이 중국문명의 성격을 규정했다고 저자는 본다.

집약적 농업이 등장한 신석기 시대는 돌과 뼈, 나무로 만든 빈약한 농기구 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 빈약한 농기구는 노동력 투입의 증대를 요구하게 되었다. 농업의 노동력 요구에 따라 농업의 단위는 씨족을 단위로 하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중국의 씨족중심의 문화를 규정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씨족구조를 정치에 원용한 것이 주나라의 종법제에 기반한 봉건제였다. 그리고 유가가 가장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그 씨족문화를 대변한 것이 유가였기에 중국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집약적 농업은 사회와 정치의 인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농경사회에서 노인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식 때문에 우대받는다. 경로사상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집약적 농업은 집단의 협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연륜을 갖춘 리더를 요구했고 그것을 덕이라 부른다. 지도자로서의 덕은 연륜에서 나온다. 인자하고 후덕한 지도자란 중국의 리더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유가의 지도자 상은 그런 농업사회의 특징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리더에 대한 이상은 유목 수렵 전통의 유럽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을 인용하면서 유목 수렵사회에서 지도자는 더 많은 사냥물을 잡아오는 사람, 즉 뛰어난 영웅을 숭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농업사회라는 특성 때문에 중국은 무신론의 성격이 굳어졌다고 지적한다. 농업은 한곳에 붙박이로 사는 환경이다. 그런 환경에서 노인이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존중되는 것은 오랜 세월 반복되는 규칙성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주역은 그런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오랜 관찰에서 나온 성찰과 지혜를 말하고 잇다.

그런 환경에서 공자가 말하듯이 괴력난신은 발붙일 곳이 없다. 괴력난신은 농사에는 아무 쓰잘데가 없는 것이며 예외적인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잘해야 흥미거리에 불과하다.

물론 상왕조는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다. 상왕조의 최고신인 띠(帝)는 상왕실의 조상신이며 인격신이었다. 상의 왕은 제사장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주장된 천명사상은 탈종교화에 결정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주족의 최고신은 티엔(天)이었다. 티엔은 띠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신이다. 그러나 당시 대두되었던 天道無親(하늘은 특별히 친한 사람이 없다)이란 사상과 결합해 주족은 상나라가 정치를 잘못해 티엔의 천명을 잃었다. 티엔은 덕이 있는 자를 찾아 주족에게 천명을 주었고 주왕실이 티엔의 대리인인 天子로서 天下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뒤에 이 천명론은 맹자의 백성이 하늘이라는 역성혁명론으로 발전했고 동학의 人乃天으로 발전한다.

천명론에 따르면 티엔은 제사를 지낸다고 특별히 친해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덕이 있는 자에게 천명을 내릴 뿐이니 天德에서 人德으로 무게중심이 바뀌게 되고 신은 기독교의 신과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변덕쟁이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치일 뿐이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후에 도가에서 天이 道가 되면서 理神論으로 발전하고 거의 범신론이 되어버린다.

저자는 천명론이 중국문명의 합리성과 인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위대한 사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는 동시에 그 천명론이 중국의 한계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천명론에 따르면 천명을 받은 천자가 다스리는 것은 천하 즉 하늘 아래 모든 것이다. 시경에 따르면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것이 없고 하늘 아래 왕의 백성 아닌 자 없다. 여기서 중화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상왕조가 성립하기 전까지 중국의 문명이 특별히 주변 민족보다 뛰어나지는 않았다. 중국의 신화를 분석하면서 저자는 치우와 황제의 전쟁, 그리고 그후 여러 신화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화하족과 주변민족간에는 서로 반목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였고 특별히 화하족이 더 뛰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하 중류에서 발원한 화하족은 이후 다른 민족들을 밀어내고 흡수하면서 영역을 넓힌다. 산동반도에서 요서까지 살았던 동이족은 그 다툼에서 밀려 그러나 상왕조 이후 국가체제를 만든 화하족은 아직도 신석기 시절의 빈약한 경제구조와 생활방식, 정치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변민족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부터 형성된 오랑캐에 대한 중국인의 멸시는 근거가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먹을 것이 없게 되면 툭하면 침략해 자신의 것을 뺏어가고 사람을 끌고 가는 작자들을 경멸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우월의식은 주변민족과 교류를 하면서 발전해온 중국문명의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중화주의에 물들었던 한, 송, 명 시절 중국은 정체되었고 중국의 발전은 대개 이민족의 정복왕조가 들어섰던 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저자는 예로 든다.

이상이 이책에 나타난 저자의 중국문명관을 요약해 본 것이다. 물론 위의 요약은 여기 저기 이책에 흩어져 있는 저자의 주장을 하나의 주장으로 줄거리를 만들어 엮어본 것이다. 이책의 목적은 위와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맞다. 그러나 이책은 논문이 아니다. 이책의 우선적인 목적은 20세기 후반의 고고학적 업적과 기존에 신화로 기록되어 있던 역사의 흔적을 합해 글로 쓰여지지 않았던 중국문명의 뿌리를 탐색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적으로서 이책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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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세계경제의 라이벌 - 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중국.인도.일본의 미래전략
빌 에모트 지음, 손민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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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자면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책의 저자인 빌 에모트는 The Economist의 편집장을 지낸 바 있다. The Economist의 문체가 그렇듯이 그 잡지의 편집장을 지낸 사람인 만큼 이책의 문체는 단문 위주의 간명한 문장에 위트가 넘치고 요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적인 문장이다.

그런 문체로 쓰여진 이책의 내용은 사실 그리 대단할 것은 없다. 이책의 요점은 이렇다. 앞으로 아시아의 역학관계는 기존의 강국인 일본과 신흥강국인 중국, 인도 사이의 3각관계가 규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간의 관계는 협력보다는 경쟁이 지배할 것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인 주장이다. 저자가 이런 주장의 근거로 드는 것은 3국간의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3국간에는 신뢰가 있어본 적이 없다. 한국도 일본과의 관계에서 항상 겪고 있듯이 과거사 문제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중국과 인도 사이에도 역사적으로 이렇다할 신뢰가 있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두 나라간에는 티벳문제를 사이에 두고 갈등과 대립을 보여왔을 뿐이다.

그런 3국이 이제 서로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앞으로 이들의 관계는 협력보다 경쟁이 우선될 것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인 주장이다. 저자는 다루고 있지 않고 중국이 억지주장을 근거로 티벳을 점령한 이유는 인도에 대한 견제이다.

사실 티벳을 차지한다고 해서 중국이 이로운 것은 없다. 인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전통적으로 인도와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티벳을 지배해야 히말라야로 차단된 인도와의 지정학적 장벽이 안전하게 되기 때문에 중국은 티벳을 내놓을 수가 없다. 중국의 의도는 인도도 알고 있다.

3국간의 관계가 경쟁적일 것이라는 것은 그리 깊은 생각이 필요치 않은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읽기 위해 이책을 읽을 이유가 있는가? 그 주장만 알기 위해서라면 이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400페이지가 넘는 지면을 할애하면서 3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망, 그리고 20세기 아시아 지역의 전체적인 지정학적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이책을 읽을 가치는 바로 그런 저자의 개관에 있다.

예를 들어 중국과 일본, 인도의 경제와 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전망을 보자.

중국의 경우 저자는 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까지 중국이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위적으로 저평가된 위안화와 저임금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흑자가 쌓인 상황에서 더 이상 인플레를 누를 수 없는 상황이 가까워 오고 있고 국내의 여유노동력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70년대 초 일본이 겪은 상황이다.

성장률이 둔화될 때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공산당이 민주화로 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공산당으로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성장의 둔화를 적절히 관리하면서 지금까지 국가 관리능력으로 정당성을 얻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능력을 보여주면서 정당성을 얻는 방법이 유력하다. 이러한 방향의 모델은 자민당이 장기집권 비결과 같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본 전문가인 저자는 일본에 대해서 조건부 낙관론을 펴고 잇다. 일본이 지금까지 20년동안 제자리 걸음을 한 것이 앞으로도 지속되리라 볼 근거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두가지 근거이다. 20년동안 투자가 정체되어 한국은 물론 중국에게 치고 올라올 여지를 주었던 만큼 앞으로 추격자들을 다시 추격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생산성을 올리고 그 생산성이 인구감소를 상쇄할 정도가 된다면 일본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문제는 인구문제만이 아니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을 정치가 마비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저자는 일본의 정치적 특성을 지적한다. 지난 20년동안 일본은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20년동안 일본의 개혁을 저자는 스텔스 개혁이라 말한다. 여기저기서 눈에 띄지 않는 개혁들이 쌓여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개혁들이 효과를 나타내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저자는 말한다. 혁명은 메이지 유신 한번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지적하면서 그렇게 개혁하는 것이 일본의 천성이라고 지적한다.

중국과 일본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상당히 예리하다. 전체적으로 이책의 요점은 앞에서 말할 것처럼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그 요점을 지지하기 위해 저자가 드는 논거와 현상의 분석들은 특별하다. 그리고 이책의 가치는 그 특별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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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즐거움의 발견 - 우울한 현대인이 되찾아야 할 행복의 조건
스튜어트 브라운 & 크리스토퍼 본 지음, 윤미나 옮김, 황상민 감수 / 흐름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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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 있네’ ‘집에서 노는 백수’ 흔히 쓰는 말이다. 이런 말들에서 논다는 말은 부정적이다. 이런 말들에서 논다는 말은 진지하지 않다, 생산적인 뭔가 의미있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논다는 것이 과연 그런가?라고 묻는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놀이라는 것은 본능에 속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놀이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는 영역은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을 관할하는 뇌간이라는 것이다. 보통 도마뱀의 뇌라고 말하는 영역이 이에 해당한다.

놀이는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면서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저자가 알래스카에 갔을 때 몇 달은 굶은 것 같은 북극곰을 보았다. 그런데 이 곰에게 친구의 허스키가 다가갔다. 그리고 곰과 개는 서로 놀기 시작했다. 식욕을 놀이 욕구가 누른 것이다.

그러면 왜 놀이 욕구가 본능에 속한 것일까? 사실 놀이는 비용이 든다. 놀 때 드는 시간과 에너지는 생존의 차원에서 보면 낭비이다. 아무 결과도 낳지 못하는 활동에 왜 에너지를 들이는 것일까? 자연은 낭비를 싫어한다. 그렇다면 놀이는 식욕, 성욕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놀이의 목적은 보통 학습이라 말한다. 놀이를 하면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사냥하는 법을 배우며 사회성을 키운다. 실제 상황에서 싸움과 사냥을 배워야 한다면 실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성을 키워야 한다면 실수와 실패에 따른 대가가 너무 크다. 놀이는 실제 상황에서 치뤄야 할 대가 없이 실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놀이를 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다. 그러면 그 배운 것이 뇌에 새로운 뉴론 네트웍을 만들면서 그 결과가 새겨진다. 놀이는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다.

놀이는 그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본능에 속한 욕구가 된 것이며 놀이를 하면 그 대가로 놀이를 관장하는 뇌가 보상으로 즐거움이란 보상을 준다.

뭐 좋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세상을 배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아이들은 잘 놀아야 겠지. 그렇지만 다 큰 어른에게 놀이가 무슨 소용이지? 먹고 살기 바쁘다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우리가 보통 놀이에 대해 갖는 선입견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른에게도 놀이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의 환경은 불확실성으로 넘친다. 그러한 환경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어서도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 욕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직관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성인에게도 놀이는 중요하다는 저자는 말은 옳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질문에 저자는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만큼 명쾌하고 분명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성인에게도 놀이는 중요한 삶의 수단이라는 것은 유머감각이 매력의 으뜸이고 예술이 중요한 삶의 방식으로 남아있다는 것에서 옳다. 그리고 저자는 이 두가지 예에서 성인에게 놀이가 무엇인가를 풀어나가는 것같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수많은 말이 있어왔다. 예술이 무엇인가란 질문은 곧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란 질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란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아름다움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그 내용으로 정의하지 않고 형식으로 정의한다면 미에 대한 정의는 가능하다.

현대 미학의 결론이랄 수 있는 미적 무관심성론이 바로 그런 접근법이다. 우리가 무엇을 예술작품이라고 정의하는가를 생각해보자고 이 이론은 말한다. 인상파의 그림도 예술작품이고 변기를 작품이라 제시한 뒤샹의 ‘샘’도 미술작품이라면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 두가지를 모두 예술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두가지를 감상할 때 우리는 어떤 용도로 관심(interest)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샘’이란 작품을 볼 때 그것에 소변을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인상파의 작품을 볼 때 벽의 구멍을 가릴 용도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대상이 목적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무 목적이 없는(disinterest)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이 예술인 이유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놀이 역시 그렇다. 우리가 놀이를 하는 것은 아무 실용적인 목적이 없다. 아무 목적이 없을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이 자체에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끼며 또 하고 싶어한다.

예술은 놀이가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할 때 얻는 것과 놀이를 할 때 얻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책에 자주 인용되는 사례들은 대개 일에만 치여 살다 지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인간관계도 무덤덤하게 되다 파국을 맞는 것들이다. 저자는 왜 그렇게 되는가에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 놀이를 하면서, 목적이 없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그런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명한다.

그 메커니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저자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가지 정도로 설명이 가능할 것같다.

첫째는 놀이는 거리두기의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한다. 변기가 미적 대상이 되면 소변을 보는 변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다른 태도로 보게 되듯이 놀이를 하면 목적으로 가득한 삶의 시간과 공간을 다른 의미로 볼 수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서 바라본 삶은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자신의 삶에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둘째 거리두기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여유이다. 저자는 이것을 아이러니 감각이라 말한다. 보통 우리가 유머감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갖는 것은 여유이다. 눈앞의 일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만 유머가 가능하다.

거리두기와 그 거리두기에서 가능한 여유는 삶에 여유를 준다. 그리고 여유가 있을 때 사람들은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고 뭔가 변화를 줄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삶에 여유를 갖자. 많이들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는 막연하다. 이책은 여유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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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 시크한 신자유주의 도시 뉴욕에 관한 편파적 보고서
탁선호 글.사진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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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cy Now! 이책의 마지막 장에 소개되는 라디오 프로의 제목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소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장이며 뉴욕의 현재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은 어떤 곳인가? 저자는 이책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시크한 뉴욕이 정말 시크한 곳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뉴욕의 시크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뉴욕이란 이름은 세계의 변방에 사는 우리에게 세계의 중심을 말하며 중심의 라이프스타일을 말하는 곳이다.

뉴욕 스타일, 뉴요커가 즐기는 것이란 말은 최고의 것을 말하고 창조적인 삶을 말하며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말하는 뉴욕 스타일이란 실체가 있는 것인가? 실체란 말이 지나치다면 그 실상은 무엇인가? 저자는 묻는다.

우리에게 뉴욕 스타일의 상징은 스타벅스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스타벅스가 최고의 커피는 아니다. 물론 질 좋은 원두를 쓰기 때문에 고품질의 맛을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맛이 최고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타벅스에 가는 것은 아니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가 갖는 호소력은 미국식 소비문화의 호소력이며 미국의 아이콘인 뉴욕의 호소력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그 소비문화가 우리가 열광하는 뉴욕의 실체라는 것이다.

뉴욕 스타일이란 말이 상징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60-70년대 반문화와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개성을 중시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며 ‘뉴욕’이란 잡지에 소개되었던 그들의 감수성이 상업화된 문화이다. 그 문화는 살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의 문화이다. 그러나 그 문화가 가능하게 된 기반은 뉴욕의 특성인 다양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한다.

힙합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저자는 본다. 힙합이 태어난 것은 흑인들의 게토였다. 흑인들은 자신의 삶의 고단함과 울분, 절망을 거리에 모여 몸으로 표현했고 재즈가 그렇게 태어났듯이 힙합은 그들의 거리 문화에서 태어났다.

뉴욕의 힘은 바로 그런 소수의 약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그 힘이 가능했던 것은 다양성을 관용하고 포용하는 여유에서 나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주류 백인은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계의 소수인종들이 모여사는 곳, 미국에서 가장 다양성이 넘치는 곳인 뉴욕의 매력은 그 다양성이 뿜어내는 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 대한 불관용이 뉴욕을 지배하게 되면서 뉴욕은 갈수록 다른 글로벌 시티들과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를 들어 소호 지역을 보자. 소호지역은 원래 공업지역이었다. 거주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임대료가 싼 곳일 수 밖에 없었고 뉴욕의 살인적인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작업실과 거주지를 겸하는 곳을 찾아 소호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예술가들의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몽마르트 거리가 그렇게 되었듯이 예술적 분위기라는 것이 상품화가 되면서 소호 거리는 돈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정작 예술가들은 다른 곳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소호 거리의 변화는 돈의 논리가 뉴욕을 어떻게 획일적인 장소로 바꾸고 있고 다양성이란 뉴욕의 힘이 어떻게 자본화하면서 파괴되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소호거리의 역사는 부동산 시장의 논리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미국의 보수화는 뉴욕의 다양성을 확실하게 파괴해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빈민층에 대한 복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사라져 가면서 시장에서 실패한 자는 무능한 쓰레기일 뿐이며 위험한 범죄자 후보일 뿐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갔다는 것이다. 줄리아니 시장이 벌인 범죄와의 전쟁은 그런 분위기를 대표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9.11 사태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불관용의 시선이 어떻게 뉴욕의 다양성을 죽이는지, 다양성이 넘치는 리버럴의 도시로 불리던 뉴욕이 어떻게 다른 미국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바뀌고 있는지 이책에서 보여주려 한다.

‘시크한 신자유주의 도시 뉴욕에 관한 편파적 보고서’란 이책의 부제는 이상에서 요약한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있다. 이책은 뉴욕의 매력에 대해 말하는 책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지금이 뉴욕의 멋진 곳을 탐험하는 책도 아니다. 이책은 미국의 보수화가 뉴욕에선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 결과를 왼쪽에서 바라본 음울한 보고서이다.

그렇다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책의 가치는 위에서 말한 저자의 목적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400페이지에 가깝고 그 페이지의 상당지면을 컬러 사진으로 채우고 있고 가능한 뉴욕의 다양한 거리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이책은 어느 정도 저자의 의도를 실현하고 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와 같은 체계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뉴욕이 어떻게 바뀌고 있다는 현상은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 현상들 너머에 저자가 신자유주의라고 요약하고 있는 본질적인 흐름은 애매모호하게 암시하는 수준에서 넘어간다. 결국 이책은 현상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역사적 흐름 위에서 살펴보는 장기적 시선과 뉴욕 구석구석의 다른 책들은 다루지 않는 어두움을 훑고 잇다는 점에서 이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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