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 - 우울한 현대인이 되찾아야 할 행복의 조건
스튜어트 브라운 & 크리스토퍼 본 지음, 윤미나 옮김, 황상민 감수 / 흐름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놀고 있네’ ‘집에서 노는 백수’ 흔히 쓰는 말이다. 이런 말들에서 논다는 말은 부정적이다. 이런 말들에서 논다는 말은 진지하지 않다, 생산적인 뭔가 의미있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논다는 것이 과연 그런가?라고 묻는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놀이라는 것은 본능에 속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놀이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는 영역은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을 관할하는 뇌간이라는 것이다. 보통 도마뱀의 뇌라고 말하는 영역이 이에 해당한다.
놀이는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면서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저자가 알래스카에 갔을 때 몇 달은 굶은 것 같은 북극곰을 보았다. 그런데 이 곰에게 친구의 허스키가 다가갔다. 그리고 곰과 개는 서로 놀기 시작했다. 식욕을 놀이 욕구가 누른 것이다.
그러면 왜 놀이 욕구가 본능에 속한 것일까? 사실 놀이는 비용이 든다. 놀 때 드는 시간과 에너지는 생존의 차원에서 보면 낭비이다. 아무 결과도 낳지 못하는 활동에 왜 에너지를 들이는 것일까? 자연은 낭비를 싫어한다. 그렇다면 놀이는 식욕, 성욕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놀이의 목적은 보통 학습이라 말한다. 놀이를 하면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사냥하는 법을 배우며 사회성을 키운다. 실제 상황에서 싸움과 사냥을 배워야 한다면 실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성을 키워야 한다면 실수와 실패에 따른 대가가 너무 크다. 놀이는 실제 상황에서 치뤄야 할 대가 없이 실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놀이를 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다. 그러면 그 배운 것이 뇌에 새로운 뉴론 네트웍을 만들면서 그 결과가 새겨진다. 놀이는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다.
놀이는 그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본능에 속한 욕구가 된 것이며 놀이를 하면 그 대가로 놀이를 관장하는 뇌가 보상으로 즐거움이란 보상을 준다.
뭐 좋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세상을 배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아이들은 잘 놀아야 겠지. 그렇지만 다 큰 어른에게 놀이가 무슨 소용이지? 먹고 살기 바쁘다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우리가 보통 놀이에 대해 갖는 선입견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른에게도 놀이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의 환경은 불확실성으로 넘친다. 그러한 환경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어서도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 욕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직관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성인에게도 놀이는 중요하다는 저자는 말은 옳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질문에 저자는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만큼 명쾌하고 분명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성인에게도 놀이는 중요한 삶의 수단이라는 것은 유머감각이 매력의 으뜸이고 예술이 중요한 삶의 방식으로 남아있다는 것에서 옳다. 그리고 저자는 이 두가지 예에서 성인에게 놀이가 무엇인가를 풀어나가는 것같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수많은 말이 있어왔다. 예술이 무엇인가란 질문은 곧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란 질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란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아름다움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그 내용으로 정의하지 않고 형식으로 정의한다면 미에 대한 정의는 가능하다.
현대 미학의 결론이랄 수 있는 미적 무관심성론이 바로 그런 접근법이다. 우리가 무엇을 예술작품이라고 정의하는가를 생각해보자고 이 이론은 말한다. 인상파의 그림도 예술작품이고 변기를 작품이라 제시한 뒤샹의 ‘샘’도 미술작품이라면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 두가지를 모두 예술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두가지를 감상할 때 우리는 어떤 용도로 관심(interest)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샘’이란 작품을 볼 때 그것에 소변을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인상파의 작품을 볼 때 벽의 구멍을 가릴 용도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대상이 목적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무 목적이 없는(disinterest)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이 예술인 이유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놀이 역시 그렇다. 우리가 놀이를 하는 것은 아무 실용적인 목적이 없다. 아무 목적이 없을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이 자체에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끼며 또 하고 싶어한다.
예술은 놀이가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할 때 얻는 것과 놀이를 할 때 얻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책에 자주 인용되는 사례들은 대개 일에만 치여 살다 지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인간관계도 무덤덤하게 되다 파국을 맞는 것들이다. 저자는 왜 그렇게 되는가에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 놀이를 하면서, 목적이 없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그런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명한다.
그 메커니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저자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가지 정도로 설명이 가능할 것같다.
첫째는 놀이는 거리두기의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한다. 변기가 미적 대상이 되면 소변을 보는 변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다른 태도로 보게 되듯이 놀이를 하면 목적으로 가득한 삶의 시간과 공간을 다른 의미로 볼 수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서 바라본 삶은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자신의 삶에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둘째 거리두기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여유이다. 저자는 이것을 아이러니 감각이라 말한다. 보통 우리가 유머감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갖는 것은 여유이다. 눈앞의 일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만 유머가 가능하다.
거리두기와 그 거리두기에서 가능한 여유는 삶에 여유를 준다. 그리고 여유가 있을 때 사람들은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고 뭔가 변화를 줄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삶에 여유를 갖자. 많이들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는 막연하다. 이책은 여유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