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 관련서적을 보아온 사람이면 다양성에 관한 논의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직장 내의 다양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는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발전된 논의이고 미국에서 나온 경영서적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다양성 논의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런 서적의 논의는 남의 일로 들린다. 여성이나 장애자는 몰라도 흑인이나 외국출신 심지어는 동성애의 직원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는 전형적인 미국식 상황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불행하게도 그런 논의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대기업만 해외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왠만한 중소기업도 중국에 공장이 있고 베트남에 진출해 있다. 국내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일터에 외국인이 있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이책의 논의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이책의 저자는 다양성 관리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소수인종과 성, 나이, 장애, 성적 취향에 대한 차별은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당하다. 그러나 직장 내에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옮음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유는 두가지이다. 갈수록 사업의 범위가 세계화되어가고 노동인구의 감소로 인적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있다. 능력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출신이든 성별이 어떻든 가릴 형편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다양성의 문제는 차이를 인내하는 관용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성의 문제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포용의 문제이다. 다양성의 포용은 분명한 이점이 있다. 조직내에 다양성이 있을 때 조직은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고 변화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다양성의 관리는 더 이상 “나는 너의 다른 점을 인내한다”가 아니라 “나는 너의 다른 점이 필요하다. 우리 함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 다양성은 혼합이며 포용은 그런 혼합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포용해야 하는가? 포용은 인정과 이해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의 조직문화는, 특히 대기업의 문화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흔히 하는 말로 대단한 천재도 대기업에 들어가면 둔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모난 돌이 되지 않는 것이 생존의 첫걸음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모난 돌을 모난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조직의 문화에 다양한 인력이 더 잘 받아들여져 조직의 역량이 넓어지고 풍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책의 상당부분은 이해에 관한 것이다. 페루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페루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국적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장애인을 어떻게 이해하며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등으로 이야기를 넓혀간다. 포용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를 이해한 다음 그 다른 점에서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들이 이해받는다고 그리고 조직내에 자신의 자리가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이 이책이 말하는 바를 거칠게 요약해 본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책은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의 논의는 한국인에게는 남의 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포용이란 개념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포용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느낀다면 이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책은 여러권이 나와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뿌리인 만큼 대항해시대는 과거의 지나가버린 흥미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항해시대를 다룬 책들은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를 다룬 책들보다 질도 높다. 대항해시대를 다룬 책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이책의 저자가 번역한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많고 뛰어난 책들 위에 이책이 더해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책의 의미는 ‘보충’이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책은 저자가 번역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보론이랄 수 있다. 이책은 대항해시대의 경제사에 관한 것도 그 시대의 정치경제학도 아니다. 이책은 대항해시대에 관한 통사가 되려 하지 않는다. 다른 대작들은 베니스, 피렌체, 밀라노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포르투갈/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세계경제의 패권이 이동하는 역사의 흐름을 다룬다. 이책은 그런 대작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책은 통시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다룬 그런 책들과 달리 공시적인 관점을 취한다. 대항해시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그 시대의 단면을 잘라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의 구성은 그 시대의 항해술이 어떠했고 군사적 기술이 어떠했는지, 어떤 화폐가 쓰였는지, 노예무역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환경의 변화는 어떠했는지, 질병이 어떻게 세계화되었는지 종교가 어떻게 강요되었고 수용되었는지, 문화는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등과 같은 질문에 따라 대항해시대를 알아나간다. 그러므로 이책은 일관된 스토리라인이 없다. 그러므로 대항해시대의 연대기는 다른 책에서 이미 읽었다고 전제하고 그 연대기에 대한 보론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책은 단순히 대항해시대에 관한 독립된 논문을 모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책에는 저자의 일관된 관점이 살아잇기 때문이다. 이책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대항해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려면 브로델과 세계체제론이 말하듯이 15세기부터 지금까지 세계는 일관된 흐름 위에서 만들어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00년의 역사는 하나의 세계라는 단어가 실체가 되어간 세계화의 역사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세계화의 역사는 폭력의 세계화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계화는 탐욕과 오만이란 동기로 휘둘러진 폭력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지구가 묶여가는 역사였다고 말한다. 저자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브로델의 논의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책을 읽기 전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같은 통사를 읽었다고 가정하는 것같다. 그러므로 이책의 논의는 그런 통사의 논의를 전제한 상태에서 전개된다. 저자의 논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른 것이란 브로델의 논리를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럽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핵심도시가 있으면 그 도시 주변지역으로부터 그 도시로 물자와 사람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경제이며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들 간의 교역 네트웤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자본주의 역시 그런 교역 네트웤으로부터 만들어졋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다른 것은 그 네트웤을 폭력적으로 재조직한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교역 네트웤은 상업적인 것이었고 상인들간의 네트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네트웤에 참여한 유럽인들은 국가를 등에 업었고 국가의 폭력을 이용해 그 네트웤을 자신들에 유리하게 재조직했다. 네트웤에서 이윤율이 높은 부분을 자신들이 차지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이전의 시장경제와 다른 것은 그 폭력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책의 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 폭력성이 어떤 것이었고 그 폭력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이다. 이상이 이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책은 저자가 번역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보론으로 읽을 때 그 가치가 있다. 평점 4.5
이책을 선택한 것은 도쿄 여행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일본만화를 보다보면, 그리고 일본 관련 서적을 보다보면 도쿄의 지명이 자주 언급된다. 시부야, 긴자, 아키하바라 같은 지명을 워낙 많이 듣고 보다보니 이름 자체는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름들이 동대문, 서울역, 시청앞, 압구정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울의 지명들이야 그곳을 가보았으니 이름과 장소가 연결이 되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바다 건너 남의 나라 도시가 서울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시부야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건물들이 있으며 길은 어떻게 나있으며 그곳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런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책을 선택한 것은 그런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이다. 일본 관련 서적을 읽다 도쿄도청사가 언급이 되었다면 이책을 사전처럼 활용해 도청사는 어디에 있고 어떤 곳이며 어떻게 생겼는가를 확인하는 용도로 쓰기 위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책은 대만족이다. 가격에 어울리지 않게 700페이지에 가까운 묵직한 두께에 아트지에 4도로 사진이 빽빽하게 인쇄된 이책은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서울만 하더라도 이 정도 분량으로 커버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서울과 비슷한 규모인 도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의 설명은 짧막짧막하게 끊어지는 설명들로 채워질 수 밖에 없고 실린 사진들도 작은 데다 한두컷 정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권으로 도쿄에 대한 사전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책의 가치는 충분하고 넘친다. 물론 이책은 그런 식으로 활용하라고 만든 책은 아니다. 이책은 여행가이드북으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여행가이드북으로서 이책은 어떨까? 원래 목적을 생각할 때 이책은 같은 목적으로 나온 다른 책들보다 잘 만들어졌다. 정보량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레퍼런스로 활용하려는 개인적인 목적에는 흠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가방에 부담없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작게 만들어질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책 크기가 작아질 수 밖에 없고 덩달아 사진의 크기도 작아질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책 크기가 크고 사진이 컸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이드북이란 용도로는 그것이 맞다. 평점 4.5
이책의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말에 나왔던 '모바일 혁명이 만드는 비즈니스 미래지도'를 통해서였다.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도 유행하면서 그책 이외에도 모바일 2.0에 대한 다양한 책들이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다. 시중에 나온 모든 책을 본 것은 아니지만(불가능하다) 올 상반기에 읽어본 관련서적 중에서 이책의 저자가 쓴 책이 가장 잘되어 있었다. 우선 책에 소개되는 사례가 가장 풍부했고 그 사례에 대한 설명과 그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하는 모바일의 트렌드가 일목요연했다. 그리고 사진이 다양하게 활용되어 감을 잡기 좋게 되어 있는 편집도 모바일 2.0에 대한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셜네트웤에 대한 이책 역시 모바일 2.0에 대한 저자의 이전 서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마도 이책은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SNS의 사례들을 가장 다양하게 소개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 관련 서적으로 400페이지가 넘는 책은 분량의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만큼 SNS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책 한권으로 SNS가 어떤 것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이러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그런 서비스를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메뉴 사용법까지 소개하고 있으며 실제 그런 서비스와 관련된 이용팁까지 알려준다는 점이다. 그렇게 내용의 폭이 넓다보니 다른 책에서 본 내용들을 또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책들과 달리 분량이 넉넉하다보니 다른 책보다 더 설명이 자세하다. 이미 다른 책에서 읽은 사례라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책은 단순히 현상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책은 그런 현상을 어떻게 마케팅에 이용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목표이다. 이책의 후반은 그런 비즈니스적 측면에 할애되어 있다. 이책에서 소개되는 마케팅 전략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SNS를 활용한 마케팅은 이전의 일방적인 푸시전략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SNS는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SNS의 커뮤니케이션은 AISAS(Attention, Interest, Search, Action, Share)로 요약된다. 이전의 광고와 홍보를 이용한 마케팅에선 주의를 끌고 흥미를 유발하면 끝이었다. 관심이 생겼으니 검색해보고 구입까지 이어지면 대만족이다. 그러나 SNS가 도입되면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방향이 양방향이 되면서 피드백이 가능하다. 공유가 더해진 것이다. 주의를 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끌었으면 그 다음은 마케터의 손을 떠나 사용자들 간에 입소문이 퍼지고 평판이 만들어지는 공유가 일어나고 사용자들로부터 기업의 방향으로 피드백이 일어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SNS는 양방향이기 때문에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신뢰위에서만 지속성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앞으로 SNS의 진화방향을 말한다. 저자는 앞으로 인터넷은 노마드웹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책을 끝낸다. 저자는 노마드웹이란 말로 인터넷이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필드로 완성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웹 1.0은 IP 위에 웹 페이지란 레이어가 있는 것일 뿐이었다. 정적이었다.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기만 하고 거기에 코멘트를 달고 피드백을 하더라도 결국 단속적 피드백일 뿐이므로 일방성이 방향만 바꾸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SNS는 페이지 위에 사람이라는 레이어가 더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려고 그 책에 관한 페이지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마찬가지로 그 책을 구입할 생각을 하는 다른 사람이 오프라인의 서점에서 처럼 보이고 그 책을 구입하는데 관해 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책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서평같은 것이 포스팅되어 있어야만 했지만 그 책을 구입한 사람과 바로 연결되어 질문을 할 수 있는 식이 될 것이다. 저자가 전망하는 웹의 미래는 갈수록 오프라인의 커뮤니케이션과 닮아가는 방향이며 그것을 노마드웹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상이 이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간추려 본 것이다.위에서 말했듯이 이책은 상당히 분량이 넉넉하다. 물론 이책의 많은 내용은 다른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이책의 1/4은 위키노믹스와 거의 겹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책을 읽었더라도 읽었던 내용이더라도 이책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평점 4.5
감각은 의미의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감각에 대해 갖는 생각이다. 그런데 감각도 의미가 있다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랄 수 있다. 그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란 말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마샬 맥루한이다.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는 ‘미디어의 이해’에서 맥루한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 한줄도 채우지 못하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미디어는 메시지를 실어나르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정말 미디어가 도구일 뿐이고 메시지는 미디어로부터 중립적일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맥루한의 업적은 바로 그런 의문을 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책에서 맥루한은 사회의 미디어가 구어에서 인쇄매체로 바뀌고 다시 라디오와 TV로 바뀌면서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메시지의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감각의 역사란 제목을 가진 이책은 바로 맥루한이 제기한 질문에서 등장한 분과에 대한 입문서로 쓰여졌다. 이책의 질문은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제기했던 이론으로부터 그 이후 어떤 발전이 있었는가를 요약하면서 이 분야에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맥루한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을 감각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혁명이라 말하면서 그 것을 ‘분수령’의 시점이라 말했다. 이후 구어에서 문어로 사회의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시각이 다른 감각들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쇄기가 발명된 시절은 원근법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후 역사가들은 이 이론을 검증하기 시작했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메시지를 만드는데 있어 시각의 비중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계몽주의 이후 역사에서 청각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다른 감각 역시 무시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책은 맥루한의 분수령 이론 이후 감각사라는 분야의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요약해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상당히 흥미있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책의 논의를 읽다보면 논의가 상당히 빈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분야 자체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고 그다지 많은 연구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로는 이 분야의 사료 자체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책이 다루는 주제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분야 자체가 생소하듯이 업적 자체가 일천하기 때문에 입문서로 쓰여진 이책에 실린 내용도 풍부하거나 깊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분야의 논의가 어느 수준에 와 있고 어떤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목적이라면 이책의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