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를 다루는 책은 여러권이 나와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뿌리인 만큼 대항해시대는 과거의 지나가버린 흥미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항해시대를 다룬 책들은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를 다룬 책들보다 질도 높다. 대항해시대를 다룬 책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이책의 저자가 번역한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많고 뛰어난 책들 위에 이책이 더해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책의 의미는 ‘보충’이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책은 저자가 번역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보론이랄 수 있다. 이책은 대항해시대의 경제사에 관한 것도 그 시대의 정치경제학도 아니다. 이책은 대항해시대에 관한 통사가 되려 하지 않는다. 다른 대작들은 베니스, 피렌체, 밀라노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포르투갈/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세계경제의 패권이 이동하는 역사의 흐름을 다룬다. 이책은 그런 대작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책은 통시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다룬 그런 책들과 달리 공시적인 관점을 취한다. 대항해시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그 시대의 단면을 잘라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의 구성은 그 시대의 항해술이 어떠했고 군사적 기술이 어떠했는지, 어떤 화폐가 쓰였는지, 노예무역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환경의 변화는 어떠했는지, 질병이 어떻게 세계화되었는지 종교가 어떻게 강요되었고 수용되었는지, 문화는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등과 같은 질문에 따라 대항해시대를 알아나간다. 그러므로 이책은 일관된 스토리라인이 없다. 그러므로 대항해시대의 연대기는 다른 책에서 이미 읽었다고 전제하고 그 연대기에 대한 보론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책은 단순히 대항해시대에 관한 독립된 논문을 모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책에는 저자의 일관된 관점이 살아잇기 때문이다. 이책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대항해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려면 브로델과 세계체제론이 말하듯이 15세기부터 지금까지 세계는 일관된 흐름 위에서 만들어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00년의 역사는 하나의 세계라는 단어가 실체가 되어간 세계화의 역사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세계화의 역사는 폭력의 세계화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계화는 탐욕과 오만이란 동기로 휘둘러진 폭력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지구가 묶여가는 역사였다고 말한다. 저자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브로델의 논의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책을 읽기 전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같은 통사를 읽었다고 가정하는 것같다. 그러므로 이책의 논의는 그런 통사의 논의를 전제한 상태에서 전개된다. 저자의 논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른 것이란 브로델의 논리를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럽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핵심도시가 있으면 그 도시 주변지역으로부터 그 도시로 물자와 사람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경제이며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들 간의 교역 네트웤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자본주의 역시 그런 교역 네트웤으로부터 만들어졋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다른 것은 그 네트웤을 폭력적으로 재조직한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교역 네트웤은 상업적인 것이었고 상인들간의 네트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네트웤에 참여한 유럽인들은 국가를 등에 업었고 국가의 폭력을 이용해 그 네트웤을 자신들에 유리하게 재조직했다. 네트웤에서 이윤율이 높은 부분을 자신들이 차지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이전의 시장경제와 다른 것은 그 폭력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책의 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 폭력성이 어떤 것이었고 그 폭력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이다. 이상이 이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책은 저자가 번역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보론으로 읽을 때 그 가치가 있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