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 - 타임패트롤 시리즈 3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6
폴 앤더슨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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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타임 패트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이책에서 저자는 승자들이 악의적으로 왜곡한 패자들에 대해 다룬다.

번역서의 제목이기도 한 첫편에서 저자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이웃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은 실제 어떤 사람들이엇는가를 파고든다.

우리가 페니키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다. 그리스인들처럼 상업민족이었으며 무역로를 따라 해외식민지를 건설했으며 그 중 하나인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말살당했다. 그들의 주 상품은 달팽이를 짜서 얻는 자주색 염료와 유리였으며 알파벳을 창시하였고 자음만 기록하는 그들의 알파벳 시스템이 헤브라이어의 알파벳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거기에 모음 시스템을 더해 오늘날의 알파벳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 정도가 우리가 페니키아인들에 대해 아는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을 읽은 사람들이면 페니키아인들에 대해 몇가지를 더 알 수 있다.

구약에 나오는 바알신은 페니키아인들의 주신이었다. 그러나 굴어들어온 돌인 유대인은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페니키아인 즉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해야 했다. 그러나 선주인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고 마치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듯이 가나안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들과 전쟁을 벌여야 햇고 그들의 신은 악신이 되어야 했고 악인이 되어야 했다. 바벨탑에 대한 구약의 악의적인 왜곡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아도니스, 헤라클레스가 원래 페니키아인들의 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바알 역시 풍요의 자연신일 뿐이었다.

악의적인 왜곡은 신전의 娼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전에서 여자가 몸을 팔게 하는 것을 보고 음탕한 종족이라 유대인들은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교리에 따른 것으로 교리에 따라 처녀는 결혼 전에 처녀성을 신전에 헌납하는 것을 요구받았고 그때 한번 뿐이었다. 그후에는 정숙하게 살았다. 유대인들과 같은 정조관념을 갖고 잇지 않다고 즉 자신들과 다르다고 틀렸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오늘날 레바논에 사는 필리스틴인들과 유대인들은 우호관계를 맺게 된다. 이편에서 저자가 다루는 것은 솔로몬 왕 시절 페니키아의 중심지였던 티레이다. 기원전 10세기 철기시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티레는 소아시아 지역의 무역중심지였다.

이편의 제목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은 성서에 나오는 것으로 솔로몬의 부를 나타낸다. 그러나 솔로몬의 부라는 것은 모두 티레를 통해 들어온 것이었다. 티레는 유대가 세계와 연결되는 창이었다. 솔로몬의 업적이라는 예루살렘의 성전도 티레의 왕궁을 축소해 그대로 모방한 것일 뿐이었으며 성전을 짖는데 동원된 거의 모든 자원과 기술자는 모두 페니키아에서 온 것이었다.

3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스라엘인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놓을 수 있던 솔로몬의 힘도 티레의 원조와 동맹에 기대어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책의 저자는 페니키아인들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런 모든 것들보다 제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개인의 차치와 권리를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페니키아인들이 그런 이론을 갖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철학면에서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가와 상인을 겸한 무역상은 페니키아인들의 이상형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자율적인 인물상 말입니다. 지금 그들의 고향을 통치하는 히람 왕은 이집트나 동방의 신권왕이 아닙니다. 히람이 왕권을 조상에게서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을 보면 수페트suffet, 즉 판관을 의미하는 士師들을 주재하는 정치 지도자에 더 가깝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사사들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티레는 전성기의 베니스 공화국과 많이 비슷합니다. 저는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 특히 티레의 강한 영향을 받고 민주제를 발달시켰다고 확신합니다.”


저자는 이책의 2편, ‘몸값의 해’에선 남미를 정복한 미치광이 스페인들은 실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다룬다.

콜럼버스의 소위 ‘신대륙 발견’은 인디언들에겐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의 주역은 야만스런 광신자들인, 기사란 직함을 쓰는 스페인 깡패들이었다는 것이 보통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역사서들의 공통된 평이다.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 별 이의가 없다.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는 수백년동안의 싸움은 그들의 기질을 만들었다. 실제 그 사업은 신앙의 이름을 걸고 이슬람 도시의 부를 약탈하고 착실한 농부였던 이슬람교도들을 농노로 착취하는 말 그대로 수지맞는 정복사업일 뿐이었다. 수백년을 그런 사업을 하면서 스페인 귀족들에게 밴 것은 무엇을 생산하는 것보다 남이 생산한 것을 뺐는 것이 휠씬 손쉽다는 것이었고 그런 습성은 남미를 정복할 때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복한 남미가 독립한 후에도 귀족적인 과시욕과 낭비벽, 약탈벽 이외에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이 없었던 작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에겐 그럴듯한 문명을 이룰 무엇이 없었다.

이정도가 보통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역사서들이 스페인인들에 대해 언급하는 상식적인 평가이다. 저자는 특별하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여러분은 영어권의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몇 세기 동안이나 영국의 라이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포로파간다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실제로는 종교 재판 따위로 악명이 높은 스페인인들은 다른 동시대인들에 비해 특별히 악랄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나라보다 차라리 나은 점도 있었죠. 이를테면 코르테스 본인이나 토르케마다(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소 소장)조차도 어느 정도는 정의롭게 현지인들을 대하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는 정복당한 현지인들이 조상의 땅에서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특히 영국인들과 그 후계자인 양키와 캐나다들이 현지인들의 씨를 거의 말리다시피 했다는 사실에 비추면 말입니다.”

물론 저자는 16세기의 기준으로도 스페인인들은 ‘괴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인들의 신대륙 정복은 완전히 사악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선하지도 않았다. 코르테스는 적어도 아즈텍족의 소름끼치는 집단적 인신고양을 중지시켰고 피사로는 개인의 존엄과 가치라는 개념이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두 침략자 모두 현지인들의 동쟁자들이 있었다. 그럴만한 동기를 가진 동맹자들이.” “잉카가 지배하는 나라는 평화롭고 순진한 사람들이 살던 곳은 아니었습니다.. 잉카 제국은 사방팔방을 향해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체주의 국가였죠. 삶의 온갖 소소한 부분까지 국가에서 통제를 했으니까요. 순순히 지시에 따른다면 냉대를 받지 않았지만 지시를 어기는 사람들은 가차없는 응징을 받았습니다. 귀족들조차 자유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신권을 가진 왕인 잉카만이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죠.”

물론 그런 잉카제국을 무너트린 코르테스가 선인을 아니다. 지금의 우리로선 그렇게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야만스러우면서 그 모든 악행을 신의 이름으로 태연히 행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그는 괴물이 아녜요. 우리 기준으로 보면 잔인하지만, 그건 태어난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해요. 야심적이고 탐욕스럽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고결한 기사로 여기고 있어요.

저자는 물론 스페인 정복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정신착란으로 보이는 그들의 신념과 행동이 그 시대에선 정상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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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바이러스 - 그 해악과 파괴의 역사
헤르만 크노플라허 지음, 박미화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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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는 애매모호하다. DNA만 있고 생명유지에 필요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생물이라 부르기 뭐하다. 그러나 이 생물이라 부르기 곤란한 것이 피해자의 세포에 들어가면 생물로 바뀐다. 숙주 세포의 RNA와 DNA까지 조작해 숙주의 세포를 자신의 DNA를 복제하는 공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저자는 자동차가 들어간 인간사회는 바이러스가 들어간 세포와 같다고 말한다.

자동차를 받아들인 사회는 모든 것을 자동차를 중심으로 재조직한다. 자동차가 다닐려면 당연히 도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것이 요구하는 도로는 걷는 사람을 위한 길이나 마차, 자전거 등의 다른 운송수단과는 전혀 다르다.

바퀴라는 것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평평하고 균일한 도로가 있어야 한다. 그런 노면이 없으면 바퀴는 극히 비능률적인 운송수단이 될 뿐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동차용 도로가 다른 수단들과 다른 요구를 하는 것은 폭이다. 자동차는 속도가 높다. 그러나 그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진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몰려면 속도가 높아지면서 둔해지는 감각에 방해되는 것들이 주변에서 치워져야 한다.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그만큼 도로의 폭이 넓어야 하고 자동차만을 위해 공간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런 자동차를 받아들이면서 사람이 사는 거주지도 달라졌다. 오늘날 도시의 도로를 보자. 상권분석을 할 때 도로의 건너편은 상권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건널목 하나 건너는 장애로도 도로 사이의 통행은 급감하기 때문이다. 넓은 도로를 따라 사람들의 생활권이 조각조각 나눠진다.

도로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면서 지역을 근거로 한 생활권이 망가졌다. 저자는 상가와 직장, 주거지가 인접해 있어 걸어서 닿는 거리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던 생활권이 자동차 도로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고 말한다.

실제 도시계획을 보면 주거지와 상업지가 분리되어 있다. 주거지에선 개인적인 생활이 이루어지고 일을 하고 쇼핑을 하는 공간이 따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자동차는 숙주인 인간사회의 공간 자체를 자신에 맞춰 재편하도록 강요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동차에 빠지게 되어 있다고 저자는 인정한다.

사람은 에너지 효율성이 극악인 동물이다. 사람의 근육에너지에서 8%만이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 속도가 걷는 것에서 속보로 주행으로 올라갈 수록 그 효율은 떨어진다. 효율이 극악이다 보니 인간은 정주생활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동차를 모는 데 드는 에너지는 걷는 것의 반이다. 그러나 반을 쓰면서 그 효율은 수십배로 나온다. 자동차가 주는 속도감에 뇌는 취할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약과 비슷한 효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희생된 것을 보자. 자동차를 위해 도시공간이 사람의 생활감각에 맞지 않게 조각나 버렸다. 그뿐인가? 자동차는 필연적으로 소음과 매연을 토해낸다. 자동차의 소음치는 사람에게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스트레스 상태로 몰아간다. 도로주변에 사는 사람은 만성스트레스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매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매년 100만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소음과 매연으로 인한 질병 사망은 200만으로 추정된다.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무서운 바이러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그런 자동차가 왜 필요한 것인가? 시간절약을 말한다. 물론 자동차를 가지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시간이 절약되더라도 시스템의 시간은 줄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서울주변에 위성도시가 생긴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자동차로 시간이 절약된 만큼 주변 위성도시에서 출퇴근이 가능하게 되므로 거주지가 주변으로 분산된다. 그리고 자동차가 있으니 교외에 대형쇼핑센터가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으로 시간이 절약되더라도  시스템의 시간은 줄지 않는다.

이상에서 저자의 논지를 요약해 보았다. 교통시스템을 설계하는데 직접 참여한 경험이 풍부하고 교통계획과 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실무경험과 강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책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저자는 모든 것이 자동차를 우선으로 돌아가는 도시계획에 대한 불만을 이책에서 토로한다.

저자가 드는 사례들과 그 사례들을 설명하는 논리는 위에서 본 것처럼 신선하다. 우리가 당연히 그런 것으로 생각하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게 왜 그래야 하는지 저자처럼 의문을 던지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세에 계획되었던 도시설계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보행자를 기준으로 설계된 중세도시는 자동차가 당연히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듯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고 생활권을 근거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삭막한 도시와는 다른 사람사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자동차 중심으로 도시공간이 만들어지고 교통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동차가 없이는 지금의 시스템이 굴러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 물류의 흐름이 자동차의 속도를 전제로 그 속도의 시간으로 맞춰져 지금의 시스템이 굴러간다. 지금의 시스템을 포기하려 할까? 의문이다.

저자의 대안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의 대안이 비현실적이더라도 지금의 시스템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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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기업 - 위대한 기업을 뛰어넘는
최상철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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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잘 쓰인 책이다. 그러나 제목과는 상관이 없다. 이책의 제목만 보면 Good to Great나 Built to Last가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위대한 기업이나 성공한 기업을 보고 어떤 배우자는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책이다. 이책의 주제는 기업경영의 일반론과는 상관없는 일본유통업의 역사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20년이 그리고 어쩌면 30년이 될지도 모르는 일본의 유통업은 비참함 그 자체이다. 얼마전에도 도쿄 도심의 백화점이 폐점한다는 뉴스가 들렸었고 이마트와 비슷한 양판점의 산 역사인 다이에는 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내내 구조조정 중이었다.

20여년간 진행되고 있는 디플레이션과 소자고령화는 아무리 맷집 좋은 거인도 쓰러트리기에 넘치도록 충분했다.

그러나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근래 경영서적의 화두였던 유니클로와 같은 패스트패션, 100엔샵, 세븐일레븐 등과 같은 새로운 업태가 이전 유통업을 대표하던 백화점과 양판점의 빈자리를 채워간 것이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유통이엇다.

이책은 90년대를 경계로 이전의 우세종이엇던 백화점과 양판점의 역사와 함께 이후 유통업의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편의점, SPA, 카테고리 킬러 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너무 방대한 주제가 아닌가? 하나씩만 따져도 책 한권으로 될까 말까한 주제가 아닌가? 내용이 부실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책은 일본 유통업의 교과서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각 업태의 대표적인 업체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리고 어떻게 쇠퇴했는가를 살펴보면서 왜 어떤 업태가 흥하고 망했는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왜 다른 업태가 파고들게 되었는가를 요령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창업자를 중심으로 그 업체의 역사를 그리면서 읽는 재미가 있게 그려간다.

그런 식이다 보니 약점도 잇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기초로 가필하여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결여되기 쉽다. 그러나 이책을 읽어가다 보면 일본 유통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그리는 일본유통업의 역사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잇을 것이다. 일본에서 근대적 유통이 시작된 것은 백화점과 함께 이다. 100년도 더 전에 미쓰코시가 처음 백화점 선언을 했을 때 처음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미국에서 개화한 백화점의 역사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백화점은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고급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의 범위로는 오히려 오늘날의 양판점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에선 백화점을 연 것이 기모노를 팔던 업체들이었고 고급품을 중심으로 햇다. 그런 백화점 영업을 바꾼 것을 저자는 오사카의 한큐백화점이라 말한다. 전철회사였던 한큐가 백화점을 시작한 것은 회사의 전철노선을 따라 거주하는 가정주부들이 도심까지 가지 않고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쇼핑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였고 세계최초로 터미널 백화점을 개점한다. 목표가 그랫기 때문에 대중을 상대로 한 저가격 정책이 채택된다. 이후 이런 대중노선은 일본 백화점의 모델이 된다.

이후 백화점과 재래시장으로 양분된 유통업에 다이에가 양판점이란 업태를 소개하면서 유통의 지도가 바뀐다. 60년대 이후 일본내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대중시장이 들어섰고 그런 시점에서 양판점이 확산될 수 잇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디플레이션과 소자고령화로 시장 자체가 축소되면서 확대되기만 하는 대중시장을 배경으로 탄생한 백화점과 양판점은 축소균형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시장 자체의 축소보다 더 심각한 것은 100년전, 50년전 만들어진 업태의 기본모델에서 벗어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관성대로 영업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유통업의 우세종인 백화점과 양판점이 무너져갈 때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양한 업태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패스트 패션과 같은 카테고리 킬러나 편의점, 100엔숍 같은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 업태들이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백화점과 양판점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진단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을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다시 정리해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약으로는 이책의 맛을 알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실 잡지에 연재된 것을 묶은 것이기 때문에 각 편마다 나름의 호흡이 있고 그 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프레임이 빈약하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식의 타임라인으로 정리되는 어떤 주장이 있다기 보다는 각 업태의 대표업체들의 역사를 듣는 이야기의 재미가 이책의 맛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유통업의 역사와 현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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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와 애플Inc. - 세상을 뒤집은 기업 애플의 30년 성장스토리
마이클 모리츠 지음, 김정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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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부터 시작된 아이폰 쇼크와 함께 스티브 잡스와 애플에 관한 서적이 쏟아지고 있다. 이책의 제목만 보면 요즘 쏟아지는 스티브 잡스와 애플 관련의 또 다른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아마 아이폰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스티브 잡스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같은 내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책은 애플의 창업자들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애플의 전성기가 끝나고 애플의 내리막이 시작되기, 매킨토시 출시 전야인 1983년까지를 다룬다. 아이팟과 아이폰과 같이 요즘 경영서의 화두인 제품에 관해서 에필로그에 다루어지고 있고 스티브 잡스가 사망 직전인 애플을 어떻게 기사회생시켰는가에 대해서도 다루어지지만 이책의 주제는 애플이 왜 그리고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아메리칸 아이콘’이란 별명에 걸맞는 회사가 될 수 있었는가이다.

물론 아이팟 이전 컴퓨터 회사로서의 애플에 관한 서적도 많고 스티브 잡스에 관한 책은 더 많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많고 많은 책들과는 주제를 다루는 깊이에서, 다루는 방식에서 그리고 주제를 이해하는 저자의 관점에서 다르다.

이책의 저자는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의 부모 세대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워즈니악의 아버지가 직장인 록히드를 따라 스탠포드대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 팰로 앨토와 쿠퍼티노 등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된 지역에 하나씩 방위산업체들이 자리를 잡고 HP와 인텔, 내셔널 세미컨덕터 등의 회사들이 자리잡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워즈니악과 잡스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회사를 세우게 된 실리콘 밸리는 어디서나 엔지니어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런 환경에서 기술과 친숙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살았던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잡스와 워즈니악의 어린 시절은 다른 책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잇는 내용이다. 그러나 다른 책들에선 저자와 같이 하나의 환경으로서 실리콘 밸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컴퓨터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런 전자기기를 직접 만지고 만드는 것이 숨쉬는 것과 다를 것이 없게 생각되는 환경을 그리면서 애플은 물론 그후 70년대 많은 IT 기업들의 모태가 되었던 홈브류 모임의 성격을 그려나간다.

홈브류 회원들의 특징은 바로 그런 기술을 숨쉬고 살던 지역의 젊은이들이 모인 것이었고 그 모임을 기반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성장한다. 애플도 그 모임의 회원들에게 자작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기판을 팔려고 시작되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모임 회원들이 주로 보유했던 알테어 컴퓨터를 위한 베이직 언어를 파는 것으로 시작되엇다.

워즈니악은 당시 HP에서 잡스는 아타리에서 일하고 잇었다. 그들은 자작용 보드를 파는 것을 부업으로 생각했지 전업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그 부업이 어떻게 본격적인 사업으로 확장되었는지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회사를 차리게 되면서 자금난에 시달리고 인력란에 시달리고 시장을 찾아내야 하는 압박감 등 창업기에 어느 기업이나 겪게 마련인 악전고투를 실감나게 그리고 실제 그 과정을 겪거나 적어도 관찰한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든 디테일을 잘 묘사한다. 저자가 애플의 창업과정에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벤처 캐피탈을 운영하면서 겪은 경험이 잘 녹아든 것으로 보인다.

창업초기의 악전고투를 극복하기 위해선 부족한 것을 찾아내고 얻어야 했다. 저자는 모든 것이 부족한 창업초기에 어떻게 투자를 받고 투자자의 인맥을 동원해 인텔이나 내셔널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을 데려오고 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애플이 어떻게 안정을 찾아가는가를 자세하게 실감나게 그린다.

그리고 애플의 성공 이후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책의 가치는 독보적이다. 50명도 안되는 작은 가족적 공동체에서 수백명 수천명으로 늘어나면서 모든 회사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듯이 체계화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체계가 잡히면서 어떻게 조직이 경직된 관료화가 진행되는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런 관료화와 함께 창업초기의 역동성과 기동성이 사라지고 창조성도 메말라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그려나간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이책은 요즘 유행하는 아이폰 쇼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책이다. 그보다는 창업의 악전고투와 성공 이후 관료화되어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문제들에 관한, 기업경영에 관한 더 일반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창의성과도 별 관련이 없다. 물론 이책에서 스티브 잡스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이책에서 스티브 잡스는 애플 초창기의 여러 창업자들 중 한명일 뿐이며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질 뿐이다. 이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애플이다.

아이폰이나 스티브 잡스 때문에 이책을 읽으려 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애플이란 회사나 실리콘 밸리의 초창기를 알고 싶거나 기업의 탄생과 성장통을 알고 싶다면 이책의 가치는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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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경영학 - 당신의 비즈니스를 위협하는 경영학의 진실
매튜 스튜어트 지음, 이원재.이현숙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君子不器,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말이다. 논어에 나오는 이 구절은 남 위에 서는 자 즉 리더는 어떤 기술에 매인 전문가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리더를 그렇게 본 것은 중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영제국 시절 영국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공자의 말(君子不器)대로 정치는 직업 정치가가 아니라 비전문가가가 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치에만 묶이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며 경험의 폭과 인품의 넓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처칠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프로급 화가였으며 대처의 정적인 히스는 요트 애호가이자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취미의 다양함은 정치가의 됨됨이를 말했다.

정치는 정치의 기술자가 아니라 경험의 폭과 인품의 넓이를 갖춘 ‘신사’가 하는 것이라는 것이 영국의 전통이었다.

이책의 저자는 경영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좋은 경영자는 세상에 대한 폭럽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좋은 경영자는 타인을 어떻게 존중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좋은 경영자는 솔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좋은 경영자는 자신을 잘 알고 세상을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다. 이런 뜻에서 당연히 좋은 경영자는 좋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경영대학원에 있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말한다.

교육과 훈련은 다르다. 전통적인 교육은 군자나 신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시험의 과목이나 옥스캠의 교과목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실제 현장에선 쓸모없는 교양을 가르쳤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군자나 신사가 될 교양인을 목표로 하지 않고 전문가가 될 기술자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런 기술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맥킨지에서 컨설턴트 경력을 시작했던 저자는 MBA 학위를 받지 않았던 것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맥킨지와 같은 일류 컨설팅 회사에선 MBA에서 배우는 지식은 3주면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제 업무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실제적이라 생각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는 학문 자체가 쓸모없고 오히려 위험하기 까지 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책은 왜 경영학이 위험한가에 관한 길고 긴 진단서이다.

저자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인 테일러부터 시작해 테일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간주의 경영을 제시한 메이오 그리고 전략적 경영을 제시한 앤소프와 포터 그리고 경영학의 대중화 시대를 연 탐 피터스를 검토하면서 경영학은 과학이 아니라 신학이라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경영학이 대학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분투하던 19세기말, 테일러의 등장은 복음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원가회계를 제시하면서 기업을 수치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작업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재조직하여 생산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테일러의 주장은 과학이기를 원하고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던 신생학문, 경영학에 복음이었다.

테일러의 주장은 점점 관료화되어가고 있던 당시 기업경영의 흐름과도 맞아떨어졌다. 이후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라는 주장은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정점에 달한다.

그러나 갈수록 테일러주의의 한계가 분명해진다.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의 효율만 주장하고 통제만 주장하는 테일러는 경영현실의 일부를 말할 뿐 전부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관료적 통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테일러의 관점은 기업의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기업은 사람이며 의사소통과 신뢰 위에 서야 한다는 메이오의 인간중심주의가 각광을 받는다.

그러나 메이오의 인간중심주의는 진정한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계를 드러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테일러주의가 환영받은 것은 경영자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경영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계획하고 생각하는 두뇌로서의 관리자와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만 하는 노동자를 구분하는 테일러의 주장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메이오의 인간중심주의는 그런 테일러주의의 경직성에 대한 대안인 것처럼 보엿다. 그러나 메이오가 실제적으로 주장했던 내용과 그 내용이 받아들여진 것은 회사를 더 인간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문화를 말하고 동기부여를 말하고 열정을 말할 때 메이오와 경영자들이 생각한 것은 당시 갈수록 반항적이 되어가던 노동자들을 어떻게 하면 더 유순하게 말 잘 듣게 할 수 있는가라는 조종하는 대상으로서이지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었다.

물론 조직은 의사소통과 신뢰 위에 서야한다는 메이오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경영자들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왜곡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의사소통과 신뢰라는 가치는 2년짜리 훈련으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과 같은 MBA 교육시스템에서 그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전략적 경영은 경영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전략적 경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공허한 탁상공론일 뿐이엇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앤소프와 마이클 포터의 전략론은 과거의 사례를 분석할 때는 뛰어나다. 그러나 실제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는데는 소용이 없다. 그 이유는 전략적 분석이 현실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략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략론의 화려한 차트와 도표, 목록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현실에 대한 정보가 완전하다는 가정이 충족되어야 하며 현실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보가 완전하고 현실이 안정적이라면 왜 전략이 필요한가? 화려한 기획안이 실제 경영에선 무용지물이 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전략은 단순할수록 더 유용하고 효과적인 이유이다. 불확실성을 전제한다면 전략 역시 현실의 불확실성과 유동성에 맞춰 변할 수 있게 단순하고 유연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무용한 전략론이 왜 그렇게 각광을 받았는가? 그 이유는 테일러주의가 각광을 받은 것과 같은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략론이 등장한 것은 사업부로 나뉜 M형 조직이 등장한 때와 같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자원을 분배하고 사업부간의 업무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최고경영진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것이 전략론이었다는 것이다. 최고경영진을 고객으로 하는 전략 컨설팅이 각광을 받고 최고의 수수료를 받은 것은 그들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해주엇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테일러주의, 인간중심주의, 전략경영 모두 경영자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그들의 존재를 변호하는 신학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실에 대한 과학으로서 그들은 기껏해야 현실의 일면만을 보여주면서 현실을 왜곡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과학으로서 경영학은 실패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란 주장을 철회하고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한다면 경영학은 많은 것을 줄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영 과학에 대한 공헌자라는 측면에서 테일러는 실망만 준다. 그러나 (계급갈등이라는) 사회적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엄격한 작업 분석에 관한 메시지는 철학적으로 아주 흥미롭다. 엘턴 메이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약속한 조직 과학은 사기이다. 그러나 경영에서 사람이 제일 중요갛고 신뢰가 협동의 기반이라는 그의 주장은 너무나 옳다. 전략 이론가도 대체로 마찬가지이다. 전략에 대한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리고 아퓨날을 내다보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경영이론가들이 제기하고 그들이 제공한 통찰에 대한 질문은 그럴듯한 실제적인 경영 학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역사에 속한다. 그리고 경영학은 철학으로 가르키고 연구해야 한다.”

이상이 이책의 논리를 정리해본 것이다. 이책의 구성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논리구성물로서 경영학의 과거 핵심이론들을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검토해보고 그 헛점을 지적하고 그 경험과학으로서의 한계를 저자 자신이 컨설턴트로서의 경험과 컨설팅 업계의 허위의식을 보여주면서 경험적으로 논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영학서적은 많고도 많다. 그러나 이책처럼 그 한계를 메타이론적으로 검토하는 책은 드물고 그 희소성이 이책의 가치이다. 그러나 그 경험적 논거에서 많은 한계가 있다. 주요 이론틀에 대한 논리적 공격에서 저자는 그리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잇는 논증을 하지 못한다. 물론 자신의 직업적 경험을 근거로 제시하고 잇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논거로서는 한계가 잇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책에 제시된 저자의 경험을 일반적 증거로 생각하기에는 보편성에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며 이론틀에 대한 저자의 일반론적인 공격과 기껏해야 간접적으로 연결될 뿐이다.

그러나 이책의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읽는다면 이책의 논지를 자신의 경험에서 증명해 나가야 할 가설로서 과제로서 받아들여야 할 문제제기로 생각한다면 이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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