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바이러스 - 그 해악과 파괴의 역사
헤르만 크노플라허 지음, 박미화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는 애매모호하다. DNA만 있고 생명유지에 필요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생물이라 부르기 뭐하다. 그러나 이 생물이라 부르기 곤란한 것이 피해자의 세포에 들어가면 생물로 바뀐다. 숙주 세포의 RNA와 DNA까지 조작해 숙주의 세포를 자신의 DNA를 복제하는 공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저자는 자동차가 들어간 인간사회는 바이러스가 들어간 세포와 같다고 말한다.

자동차를 받아들인 사회는 모든 것을 자동차를 중심으로 재조직한다. 자동차가 다닐려면 당연히 도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것이 요구하는 도로는 걷는 사람을 위한 길이나 마차, 자전거 등의 다른 운송수단과는 전혀 다르다.

바퀴라는 것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평평하고 균일한 도로가 있어야 한다. 그런 노면이 없으면 바퀴는 극히 비능률적인 운송수단이 될 뿐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동차용 도로가 다른 수단들과 다른 요구를 하는 것은 폭이다. 자동차는 속도가 높다. 그러나 그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진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몰려면 속도가 높아지면서 둔해지는 감각에 방해되는 것들이 주변에서 치워져야 한다.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그만큼 도로의 폭이 넓어야 하고 자동차만을 위해 공간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런 자동차를 받아들이면서 사람이 사는 거주지도 달라졌다. 오늘날 도시의 도로를 보자. 상권분석을 할 때 도로의 건너편은 상권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건널목 하나 건너는 장애로도 도로 사이의 통행은 급감하기 때문이다. 넓은 도로를 따라 사람들의 생활권이 조각조각 나눠진다.

도로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면서 지역을 근거로 한 생활권이 망가졌다. 저자는 상가와 직장, 주거지가 인접해 있어 걸어서 닿는 거리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던 생활권이 자동차 도로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고 말한다.

실제 도시계획을 보면 주거지와 상업지가 분리되어 있다. 주거지에선 개인적인 생활이 이루어지고 일을 하고 쇼핑을 하는 공간이 따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자동차는 숙주인 인간사회의 공간 자체를 자신에 맞춰 재편하도록 강요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동차에 빠지게 되어 있다고 저자는 인정한다.

사람은 에너지 효율성이 극악인 동물이다. 사람의 근육에너지에서 8%만이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 속도가 걷는 것에서 속보로 주행으로 올라갈 수록 그 효율은 떨어진다. 효율이 극악이다 보니 인간은 정주생활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동차를 모는 데 드는 에너지는 걷는 것의 반이다. 그러나 반을 쓰면서 그 효율은 수십배로 나온다. 자동차가 주는 속도감에 뇌는 취할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약과 비슷한 효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희생된 것을 보자. 자동차를 위해 도시공간이 사람의 생활감각에 맞지 않게 조각나 버렸다. 그뿐인가? 자동차는 필연적으로 소음과 매연을 토해낸다. 자동차의 소음치는 사람에게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스트레스 상태로 몰아간다. 도로주변에 사는 사람은 만성스트레스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매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매년 100만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소음과 매연으로 인한 질병 사망은 200만으로 추정된다.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무서운 바이러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그런 자동차가 왜 필요한 것인가? 시간절약을 말한다. 물론 자동차를 가지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시간이 절약되더라도 시스템의 시간은 줄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서울주변에 위성도시가 생긴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자동차로 시간이 절약된 만큼 주변 위성도시에서 출퇴근이 가능하게 되므로 거주지가 주변으로 분산된다. 그리고 자동차가 있으니 교외에 대형쇼핑센터가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으로 시간이 절약되더라도  시스템의 시간은 줄지 않는다.

이상에서 저자의 논지를 요약해 보았다. 교통시스템을 설계하는데 직접 참여한 경험이 풍부하고 교통계획과 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실무경험과 강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책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저자는 모든 것이 자동차를 우선으로 돌아가는 도시계획에 대한 불만을 이책에서 토로한다.

저자가 드는 사례들과 그 사례들을 설명하는 논리는 위에서 본 것처럼 신선하다. 우리가 당연히 그런 것으로 생각하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게 왜 그래야 하는지 저자처럼 의문을 던지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세에 계획되었던 도시설계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보행자를 기준으로 설계된 중세도시는 자동차가 당연히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듯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고 생활권을 근거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삭막한 도시와는 다른 사람사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자동차 중심으로 도시공간이 만들어지고 교통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동차가 없이는 지금의 시스템이 굴러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 물류의 흐름이 자동차의 속도를 전제로 그 속도의 시간으로 맞춰져 지금의 시스템이 굴러간다. 지금의 시스템을 포기하려 할까? 의문이다.

저자의 대안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의 대안이 비현실적이더라도 지금의 시스템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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