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 - 당신이 절대 모르는 경제기사의 비밀
김진철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A신문의 젊은 B. 아침 7시. 자명종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겨우 일어난다. 눈도 못뜨고 세수는 하는둥 마는둥 집을 나서니 7시 30분. 여의도 한국거래소 기자실에 도착하니 8시 30분. 30분 늦었다.

조간신문을 대충 흝어보고 증권사 리포트를 뒤져본다. 오늘은 무슨 기사를 써야 하나 고민이다. 어제는 준비해둔 기획기사로 때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보도자료 몇 건 처리해 보내야 할 것같다. 금감원 사이트에서 기업공시도 체크한다. 9시 30분까지 겨우 보도자료 2건 기사보고 올렸다. 팀장한테 잔소리 듣겠군. 10분도 안되었는데 팀장 전화다. 월말에 금융특집 건이 걸려 있다며 유행하는 펀드 중 기획기사로 쓸만한 것 없냐교 묻는다.

지난달에도 그거였는데 또? 전화받고 이것저것 취재좀 하니 11시다.

C증권사 홍보팀 과장 D와 점심 약속 장소가 좀 멀다. 11시 50분 복집에 도착. 어제 과음을 햇다는 D. 그래도 한잔 안 할구가 없다. 둘이서 한병을 비웠다. 마침 C증권의 새 상품을 취재해야 했다. D는 상품의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몇가지를 더 묻고 이 상품이 소비자에게 얼마나 인기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추가 자료를 요청했다./

기자실에 앉으니 1시 30분. 기사마감은 늦어도 4시까지는 해야 하고 보통 3시에서 3시 30분까지는 보내야 한다. 졸리지만 그래도 써야 한다. 또 보도자료를 기사화하는 것이지만 취재는 해야 한다. 전화를 돌린다. 좀더 구체화하고 전문가들의 코멘트도 땄다. 3시가 다 되어 기사 한 꽂지 보냈다. 두번째 기사는 그래픽거리를 뭘로 해야 하나? 표는 식상하고 다른건 없나? 3시다 주식시장이 마감했다. 마감 상황을 확인한다. 기사는 쓸 것이 없다. 그래픽거리. 보도자료 낸 곳에 전화를 건다. 아무래도 어렵겠다. 1-2시간만 더 여유가 있어도 생각이 날텐데. 표로 때우자. 보내니 4시가 넘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금융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기획기사거리가 없는지 찾아봐야 한다. 증권사 홍보팀에 전화를 돌린다. 내일까지 자료를 받기로 했다. 6시. 7시에 저녁 약속이 있다. 이것저것 자료를 잧아본다. 벌써 시간이 되었다.

시끄러운 고깃집. E 운용사 사람들은 와있다. 미안하다며 인사를 한다. 1차 시작, 오늘도 3차는 가겠군. 내일이 걱정된다. 모르겠다. 기사가 될만한 정보든 아니든 업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

이책이 보여주는 경제부 기자의 일상이다. 도무지 여유가 보이지 않는 하루이다. 빡빡한 일정은 갈수록 더 조여진다. 신문사의 경영악화로 인원충원은 되지 않으니 기자 한명이 커버해야 할 업무는 갈수록 늘 뿐이다.

그러다보니 심층취재 같은 것은 꿈도 못꾸는 일이다. 보도자료가 고마울 뿐이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그러다 보니 보도자료나 앵무새처럼 옮기는 ‘발표 저널리즘’이란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자포자기로 월급쟁이가 되어버리는 현실이라 저자는 말한다.

경제부 기자라면 경제에는 한가닥 하는 전문가일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물론 기자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다. 저자는 기자란 know what이 아니라 know who의 전문가라 말한다. 그 분야에서 누구에게 물으면 되는지 아는 사람이 기자이고 그런 전문가 네트웤을 꿰고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기사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데 전문가 사회 자체도 부침이 심하다. 그런 기자 찾기가 쉽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기사를 왜 읽어야 하는가? 그나마 경제의 흐름을 따라가는 수단이고 다른 대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기자들이 쓰는 기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잇느냐가 된다. 문제는 기사의 질만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편집회의가 아니라 광고전략회의”라는 경제기자들의 농담이 문제라는 것이다. 경제지가 핵심매체로 부상하고 종합지에서 경제면이 중요하게 된 것은 외환위기를 전후해서이다. 일본에서 그랬듯이 경제면이 중요해진 것은 재테크가 유행하면서 부터였다. 경제면이 돈이 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제면이 중요해진 것은 인터넷의 대두로 종이매체가 사양길로 들어서게된 시기와 일치한다.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영악화에 시달리는 신문사는 기사와 광고를 맞바꾸고 광고주인 기업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최근 갤럭시S 관련 기사를 그 예로 든다. “기사와 광고의 상관관계에 대해선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알만한 일이 최근 스마트폰 열풍을 타고 벌어졌다. 아이폰에 상처 입은 대표적인 우리나라 기업은 삼성전자. 삼성이 들고 나온 샐럭시S폰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하이폰에 대해서 거의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기사들이 경제면에 도배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갤럭시S 출시와 함께 아이폰은 보안에 문제가 있다는 등 비판적인 기사가 주를 이뤘고 갤럭시S는 아이폰의 아성을 무너트릴만큼 강력하다는 내용이 주로 보도됐다. 하루아핌에 아이폰의 질이 떨어질 리도 없는데 갤럭시S 칭찬기사와 아이폰에 대한 비판기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걸 우연의 일치로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경제기사에서 제대로 된 정보는 찾아보기 어렵고 서민들 입장에서 돈이 되는 정보는 더더욱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경제의 흐름을 알고 안목을 키우기 위해선 경제기사를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저자는 어떻게 경제기사를 읽을 것인가 알려면 기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논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엘 마이어로위츠 Joel Meyerowitz 열화당 사진문고 26
콜린 웨스터벡 지음, 신가현 옮김, 조엘 마이어로위츠 사진 / 열화당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리의 사진(street photography)’이란 장르가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일종인 거리의 사진은 ‘있는 그대로(candid situation)’를 모토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법 상으로 스트레이트 포토의 일종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거리의 사진은 거리, 공원, 해변, 매장, 집회와 같은 공공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장소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에 관심이 있고 거리를 거리답게 하는 것들에 관심이 있다. 거리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제가 될 수 있다. 그 무엇이든 카메라라는 기계의 시선으로 그것의 순수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가 그냥 지나치던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기에 거리의 사진은 아이러니한 것이 보통이며 주제와 거리를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조엘 마이러로위츠의 세계는 다르다. 그는 분명 거리의 사진가이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아이를 찍은 사진을 보자. 울먹이는 표정으로 어쩔줄 모르며 안절부절하는 아이가 카메라를 바라본다. 사진의 중심에 후드에 파묻힌 아이의 주변에는 등뒤에서 어깨를 잡고 있는 남자 손과 아이의 옆에서 또 아이를 잡고 있는 여자의 손이 있으며 우측 의 배경엔 위를 보는 노파가 메우고 있다.

“퍼레이드 사진을 찍던 시절에 나는, 어린아이는 어른과 아주 다른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날 카메라에 새 필름을 넣으려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우연히 군중 틈에 낀 한 남자 아이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낮은 자세로 있으면서 어른의 세계에 제압당한 어린아이의 느낌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그후 몇 주 동안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사진을 찍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쇼핑백과 카메라, 부모나 다른 어른들의 펄럭이는 외투자락, 손에 들고 있는 불을 붙인 담배 등, 아이들은 이런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키가 일 미터가 채 되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두렵게 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다른 거리의 사진가들과 다르다. “로버트 프랭크가 미국인의 삶에서 비극적인 면을 보았다면 마이어로위츠는 흥겹고 희극적인 삶을 포착했다. 여러 해 동안 마이어로위츠와 함께 작업했던 게리 위노그랜드가 거칠고 도전적인 시선을 가졌다면 마이어로위츠는 관대하고 애정어린 시선을 보여주었다. 또한 리 프리들랜더가 냉소적인 유머 감각을 소유했다면 마이어로위츠는 천성적으로 낙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넉넉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이 마이어로위츠의 사진이 제시하는 것처럼 흥미롭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거리의 사진은 시선이 냉정하다. 시선이 냉정하기에 컬러보다는 흑백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왔다. “사진에서 흔히 정의하듯이, 흑백사진은 차가운 느낌을 주어 아이러니, 거리감, 예술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그러나 마이어로위츠의 천성에는 그런 냉정한 시선이 어울리지 않았던 것같다. 그는 거리의 사진 전통에선 처음으로 컬러 사진을 시도한다.

“컬러 사진은 따뜻하고 풍부하며 흥겹고 열정적인 느낌을 잘 전달한다.” 그러나 거리의 사진가들은 흑백사진을 고집했었고 현장사진은 흑백인 것이 공식처럼 되었었다.

“사진은 품격이 떨어지는 통속적인 대중매체라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예술로서 당당히 자리를 구축했다. 사진이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사진 자체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구해내야 했다. 그 어떤 예술 분야보다도 컬러 사진은 이러한 미학적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컬러 사진이 광고와 키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매체라는 이유로 예술 사진가들은 오랫동안 이를 기피해왔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 컬러가 온통 흔해지면서 흑백사진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도래햇는데, 이렇게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것은 사진 매체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의미했다. 1970년대 중반 무렵에 이르러서 당시 독립적으로 작업을 하던 소수의 미국 사진가들이 컬러 사진의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로위츠는 그 소수 중의 한 명이엇다.

그가 컬러를 도입한 이유를 보여주는 사진은 1962년 뉴욕의 거리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다. 이 사진은 유리 너머의 장면을 찍은 것이다. “한 상가의 유리창 너머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처녀가 남자친구의 넘겨 올린 머리를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고 있다. 그녀의 손길은 어릴 적 인형의 머리를 다듬어 주던 방식과 같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이 연인의 은밀한 장면을 찍으려고 했을 때 나는 커다란 용기를 내야 햇다. 그러나 이들과 나 사이에 놓인 유리창이 처녀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동작을 포착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보호해주었다. 사진을 찍은 후 나는 곧바로 다음 장면을 찾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사진에서 여인의 빨간 드레스를 빼고 유리창에 비친 저녁 노을의 노란 색조를 빼고 걷어진 블라인드의 연두색을 뺀다면 연인의 관계는 묘사할 길이 없다.

컬러를 시도한 후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풍경사진과 도시사진 작업을 병행했다. 컬러를 도입하면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글스턴의 색채는 자극적인 반면에 쇼어의 색채는 희미하고 창백하며 때로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다. 이들의 작업은 제각기 상업적 사진이 활용하는 색채의 풍요로움에 의도적으로 반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리창 너머에는 목이 드러나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성이 등을 보인 채 자기 남자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다. 마이어로위츠는 이들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컬러 필름에 내재된 색채의 풍부함을 그대로 수용해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색채를 운용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의 이후 작업의 특성은 베르사이유 궁을 찍은 사진에서 잘 나타난다. “마이어로위츠는 컬러 사진의 묘사적 특성에 이끌려 색채 자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사진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그가 1966년에 찍은 인적조차 찾을 수 없는 텅 빈 베르사유 궁의 궁정 사진에서 그 윤곽을 드러냈다. 베르사유 궁 전면의 벽돌 하나하나는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선명하다. 이 사진에는 오로지 색채만이 묘사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사진에 대한 작가 자신의 말이다. “이 사진은 규모와 세부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적 하나 없는 궁전은 인형극이나 바그너의 작품을 상연하기 위해 준비된 텅 빈 무대처럼 보인다. 비바람이 몰아친 직후 미약한 햇살이 비치는 궁전은 황량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잇다. 바닥에 깔린 포석과 건축물의 벽돌, 석판과 같은 조그마한 부분들이 보는 이에게 현실감을 일깨워 준다. 이처럼 풍부한 세부를 통해서 우리는 이 거대한 공간이 연극적 환영이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라고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10년 만에 읽었다. 페이퍼백으로 나왔을 때부터 갖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책장에 모셔두기만 했었는데 번역본이 나오고도 1년이 더 지나 읽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뭐 그런 책이 이책만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전후일본사에선 워낙 유명한 학자라 대학원에서도 저자의 책을 두 권 읽었었다. 이 책 자체도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유명세를 탔었는데 아마존에 주문할 필요없이 일찌감치 국내서점에서도 페이퍼백으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번역본이 나온 것은 2009년이니 원서가 1999년에 나오고도 강산이 변했으니 책의 유명세나 가치에 비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아마 일본을 주제로 했기 때문이지 않나 짐작해보지만 아마 미군정기간을 다룬다는 마이너스 주제가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전후사의 흐름은 미군정기에 결정되었다. 오늘의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군정기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80년대 사회과학 논쟁은 해방전후사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전후사 역시 미군정기에 기본방향이 결정되었다. 오늘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전후사의 원형이 결정된 미군정기를 알아야 한다.

흔히 전후일본의 특징을 developmental state라 요약한다. 개발국가 또는 발전국가라 번역하기도 하는 이 용어 이외에도 학파에 따라 여러가지로 전후일본의 특징을 설명하지만 developmental state가 쇼와 시기 일본의 정치경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개념틀인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전후일본은 전전일본을 어머니로 하고 미국을 아버지로 태어났다고 보며 7년 8개월의 미군정기에 잉태되었다고 본다.

“21세기 초기 시점에서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변함없이 연속적으로 갖고 잇는 측면을 찾기 보다는 192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89년에 실질적으로 끝난 하나의 큰 순환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수십년에 이른 그 세월은 짧은 것이었고 폭력과 변화가 난무하는 시기엿지만, 정밀히 관찰해보면 전후 ‘일본 모델’을 특징짓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교배형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 모델은 전쟁 중에 그 원형이 만들어졌고 패전과 점령에 의해 강화되어 그 후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 이 기간의 특징은 일본이 허약하다는 끊임없는 공포감이며, 최대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가 최상층에 의한 계획과 보호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고가 일반적으로 ㅕ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관료제적 자본주의는 승자와 패자가 어떻게 일본의 패전을 감싸 안았는가를 바로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패전 직후에 유포된 장난기 어린 신조어를 사용해서 말하면 이른바, ‘일본 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스캐파니즈 모델(a SCAPanese model, 미군정 총사령부와 일본인의 합작에 의한 모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미군정의 처음 목표는 일본이 다시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평화(또는 비군국화)와 민주주의’로 요약되었다. 군정 초기 맥아더는 물론 미군정사령부(GHQ)의 분위기는 이상주의적이었다.

“한 사람의 개성이 역사에 흔적을 남긴 독특한 사례였다. 맥아더와 그 휘하의 열성적인 개혁가들은 메시아적 열정을 드러내 보였다.”

초기 GHQ의 이상주의와 사명감은 맥아더가 ‘점령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 불렀던 일본 헌법,당시 세계에서 (그리고 지금도)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만든 것에서 잘 나타난다.

GHQ의 ‘제헌의회’를 구성한 젊은 군인들은 헌법을 만들면서 “일본인들을 가르친다든가 하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오로지, 일본인들이 자기 자신의 지도자에게서는 얻을 수 없었던 덜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고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이상을 간직한 총명한 (그리고 대부분 쩖은)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가슴뛰는 임무는 상상하기 힘들다. 비록 천황가의 국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뭐든지 새로이 그려낼 수 있는 백지였다.”

GHQ 장교들이 “만들어낸 일본은 미국의 축소판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상적인 입헌 군주제 중에서도 가장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체제를 지향”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열거한 장은 인권과 관련해서 세계 역사상 가장 자유주의적인 법 조항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양성의 본질적 평등’이라는 미국 헌법에서조차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내용까지도 들어갔다.”

당시 아사히 신문은 ‘어딘지 모르게 맞지 않는 빌려입은 양복’이라고 적었지만 “헌법안은 전쟁에 지고 산산이 조각난 땅 위에 희망과 이상을 비추는 등대로서 주목을 끌었다. 20세기 중엽의 가장 선진적이고 개명된 ‘절충적’ 사고방식을 체현한 헌법의 채택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일본인들의 귀에 들어갔다. 주권행위로서의 전쟁을 방기함은 이 민족이 스스로 세0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끔 ㅎ랬다. 4류 국가로 하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온 이 자부심 강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놓칠 수 없는, 마음을 달래주는 새로운 내셔널리즘이었다.”

그러나 그 헌법은 “상자 속에 봉해진 자유였다.” 주권이 천황에서 국민에게 넘어간 헌법은 기술적인 이유로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선물”이 되어야 했다. ‘평화와 민주주의’가 점령군이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었듯이 말이다.

이것은 ‘점령기 내내 계속된 모순’이었다고 저자는 평한다. 새 헌법이 보장한 자유는 ‘배급된 자유’였고 헌법의 민주주의는 ‘주어진 혁명’이며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모든 것이 (일본인의 노력 없이) 그저 주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폭탄과 소이탄이 갑자기 그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그 하늘에서 평화의 선물이 쏟아졌다.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 무혈 혁명!” 당시 만화의 해설이다.

“민주주의 개혁자들은 동시에 식민지 총독이었고 다른 상황에 놓인 다른 미국인들처럼 그들 역시 감상적 제국주의자였다. 승전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행정관들은 갤브레이스가 ‘고상한 목적에서 비론된 오만한 확신’이라 부른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미국의 개혁가들이 위로부터 민주 혁명을 추진하면서 느낀 육욕만큼 강력한 감정은 동방의 적대자를 개조해 서구 기준으로 최소한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드는데서 오는 것이엇다. 일본에서 점령 초기의 ‘군국주의 일소와 밎주화’ 정책을 지배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상주의, 오만 그리고 원망, 즉 ‘전쟁을 벌이려는 의지’를 영원토록 없애 버릴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려는 소명 의식이엇다.”

강렬한 ‘십자군식 사명의식’은 일본을 전례없는 실험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으로 전철될 수 밖에 없는 시도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혁명이 지속되려면 밑으로부터 행해져야 한다. 군부 독재하에서 제대로 된 민주 혁명이 자리 잡지 못했던 일본인 만큼 따지고 보면 맥아더 한 사람의 지령이나 마찬가지엿던 신식민주의 군부 독재 하에서는 할 할 것도 없었다.”

물론 맥아더의 혁명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혁명은 희망의 불을 밝히고 상상력의 섬광을 빚어냈다. 미국의 지배는 낡은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에 균열을 초래했고 이는 전례 없는 개인의 자유와 아울러 미처 예기치 못했던 여러 형태의 민중 표현의 만개로 이어졋다.”

GHQ의 헌법안은 1주일만에 작성되었다. 이후 수십년간 이어진 헌법이란 거창한 문서가 1주일만에 나올 수 잇었던 것은 GHQ의 젊은 군인들이 일본인들이 정부안에 반대해 풀뿌리로 만든 헌법초안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헌법으로 “천황의 신민들은 시민이 되엇다.” 그러나 그 시민들은 ‘집단적 피로감’에 지친 사람들이엇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제2차 세계대전은 1941년 12월에 시작되어 3년 8개월 뒤에 끝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1931년 만주 정복에서 시작하여 자그마치 15년간이나 전쟁상태에 있엇다.”

전쟁의 결과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서 최소 27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1941년 일본 인구 7400만명의 3-4%에 필적하는 수치였다.” GHQ의 추산에 따르면 “1946년 현재 일본은 전체 국부의 약 33%, 전체 잠재 소득의 약 33-50%를 잃은 것으로 보았다. 농촌 지역의 삶의질은 전전에 비해 65% 수준으로 비농촌지역에서는 거의 35%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파악되엇다.”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은 900만명이 넘었다. “요코하마에 상륙해 도쿄까지 진격한 부대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에 할말을 잃거나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일본인들에게 종전 자체가 ‘해방’이었다. 그 해방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이었다.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삶을 되찾았다.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멍한 충격 속을 헤매다가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내 안도감은 사라지고 피로와 절망이 사람들을 덮쳣다. 광범위하게 퍼진 심각한 심리적 붕괴 상태는 그전까지는 단순한 일반 명사에 지나지 않았던 ‘교다쓰(허탈)’이라는 말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무력화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도 무력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날 그날 먹을 것을 확보하는 데 급급해야 햇다. 밥상 위에 먹을 것을 올려놓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된 시절이엇고 굶주림과 물자 부족으로 점철된 나날이엇다. 단 하루라도 식량 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영양실조야 말로 그 시절을 대변하는 말이엇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지치고 물질적으로 고통받는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평한다.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었을 때 한 여학생이 떠올린 생각은 이제는 눈에 불을 켜고 개구리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식용으로 쓸 개구리를 잡는 것은 아이들에게 할당된 일이었다.) 물론 얼마 안가 그녀의 안도감은 시기상조였단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게 15년동안 나라를 망친 엘리트들은 새 나라가 되어서도 “엘리트들은 정부나 민간 모두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존재들이엇다 전후에 일본의 엘리트들이 보인 혼란과 부패상, 그리고 부조리에 의해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엇다. 경제혼란은 무모한 전쟁 수행과 패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지만 전후의 경제 위기가 태평양 전쟁보다 더 오래 지속된 데에는 미국과 일본의 정책적 결함과 각종 부정부패가 한몫했다.” “그저 하루 하루 먹고사는 생활이 다시 찾아오게 된 것은 1949년이 지나서부터였다.”

패전 직후 “경찰 보고서는 대중의 혐오감이 극에 달해 ‘군부 및 민간 지도자에 대한 심각한 불신, 불만, 반감’으로 번져 가고 나아가 ‘군부 자체에 대한 증오감’으로 번져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했다.”

“패전은 특권층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자아냈고 빈곤은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패전으로 권위의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면서 “사회 안에 갑자기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 것 같았다.”

“전전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가 뿌리째 무너지고 잇었다. 농지 개혁에 의해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으로 구성되는 입법부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또 헌법 개정에 의해 주권재민의 원칙이 처음으로 확립되어 미국 헌법보다도 더 광범위한 인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의 중심에는 군국주의를 부정하는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인정되지 않았던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가 인정되고 교육 개력에 의해 학교 교육 과정을 자유화하고 남녀 공학이라는 평등주의를 추진했으며 대학 진학이라는 엘리트 육성의 길을 확대했다. 민법을 개혁한 결과,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지탱해 온 법적 근거가 무너지고 이혼이나 상속 등에서 여성의 입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고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그러나 그 공간을 메운 것은 다시 전전의 질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의 민주주의 혁명은 취약하고 뿌리 없는 것이었다.” 잠시 좌파가 득세해 회당이 집권하기도 했지만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좌파는 대안세력이 되기에는 부족했고 신뢰를 얻지 못했다.

물론 “일본에는 ‘변화’라는 전통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현질서를 보존하도록 교육받지 않았으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0년대 이해 끊임없이 변화의 격랑을 헤쳐 온 사람들이었다. 전쟁은 이런 전통에 가속도를 더했다. 위기감이 강회되었으며 현질서에 대한 불만도 깊어만 갔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그들은 ‘새로운’ 일본을 구축해 나아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맥아더의 혁명에 대해 일본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위로부터의 혁명’은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권위주의적으로 위로부터의 강력한 지도에 의해 현실을 180도 바꾸어 버리는 방식은 일본에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엇었고 미국 개혁자들이 일본 점령정책에서 성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던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 정치극의 감초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군주, 벽안의 쇼군, 가부장적인 군사 독재자, 허풍기 있고 솔직한 가부키 주인공이었다. 맥아더는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위광에서는 천황과 같은 존재엿지만 천황보다 친근하며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민주주의를 약속한 권위주의가 지닌 역설과 도전이 여기에 표현되었다. 최고 사령관은 위대하며 그러니까 민주주의도 위대하다는 것이 대다수 일본인의 반응이었다.”

새 헌법에 따라 천황의 신민은 시민이 되엇지만 실제로 그들은 점령군의 신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새 군주는 군국주의자들이 그랫듯이 언론을 검열하며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져다준 유산 중 하나는 곧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사회화하는 것이었다. 정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집단적 체념과 대중은 실제로 사태의 진전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관념에 대한 집단적 체념의 강화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정복자들은 합의된 의견을 조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다양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 그들은 침묵과 순응이 더 훌륭한 정치적 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정복자들이 이런 의식을 강화하는 데 얼마나 크게 성공했던지 그들이 일본을 떠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미국인을 포함해서 비일본인 다수가 그와 같은 태도를 일본의 특성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승자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상명하달에 기대어 통치했고 평등사상을 옹호하면서도 스스로는 불가침의 특권계급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명령을 실행하는 일본인 관료들은 “전쟁을 위한 국가 총동원이 절정에 달했던 때보다도 훨씬 더 큰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상징햇던 맥아더라는 한 개인이 연기한 제왕의 역할은 억압과 전쟁, 잔학의 시대를 통해 통치권을 행사해 온 천황을 떠올리게 햇다. 그리고 ‘수퍼 행정부’로서의 GHQ의 행동양식이 점령이 끝난 뒤에도 유지되어 일본 땅의 관료들에게 계승되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미국은 이 신흥 중상주의 국가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 되었다. 그것은 초기 개혁 정책이나 ‘역코스’의 공헌이라기보다는 점령군이 임무 수행을 위해 선택한 방법 그 자체에 의한 공헌이었다./ 점령군은 정책 모표만 보면 개혁에서 재건으로 크게 방향을 전환했지만 경제 전체에 대해서는 상부로부터 엄격히 통제하는 방법으로 일관했다.

점령군은 민주주의를 진작시키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왔지만 ‘실제로는 부분적으로 관료주의를 진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 관료주의적 유산이 주로 경제에’ 남게 되었다. 점령 시절의 고나료 조직은 항복 전에 일본이 이미 공고하게 쌓아 올린 전시 관료제 위에 날림으로 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새로운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1952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착실히 재건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사전 - 당신의 운명을 바꿔줄 위대한 질문 100
좌우명연구회 지음, 박혜령 옮김 / 토네이도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국민학교 다닐 때 교문을 들어서면 수위실 옆 공터에 신문팔이들이 앉아있엇다. 요즘은 나오지 않는 소년신문을 팔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 신문을 사서 본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집에서 꽤 오랫동안 소년동아일보(제호가 맞는지는 모르겠다)를 구독햇었다.

당시 그 신문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여러가지가 실려 있었는데 즐겨 봤었던 것은 연재만화와 과학상식이라든가 역사상식 등이었던 것같다. 애들용답게 삽화가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외에도 챙겨봤던 것이 오늘의 명언 (제목이 아마 맞을 것이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날 그날 짧막한 명언들이나 속담 또는 4자성어등이 실렸는데 영어원문이 같이 실리는 것이 기본 포맷이었다. 그때 외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 정도이다.

그 당시는 명언을 모아 편집하는 책들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도 집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백과사전 크기에 1000 페이지가 세계명언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왜 그런 기획이 당시에 많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사이 소리소문 없이 그런 기획이 사라진 이유도 모르겠다.

글쎄 왜일까?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명언 같은 짧은 말은 내용을 담기에는 너무 가볍다. 가벼운 말이기에 내용이 있으려면 무게를 읽는 사람이 채워넣어야 한다. 그러기엔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나부터가 뜬 구름잡는 듯한 아포리즘 형식은 읽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의 명언을 읽던 어릴 때를 지나면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소화불량과 연관된 것이었다. 최대한 많이 우겨넣고 소화되지 않는 것은 그냥 흘려버리는 식이었다. 아포리즘 같이 되새김질을 하면서 소화될 때까지 씹는 것은 논외의 일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소화불량이 걸린다. 정보는 늘지만 정보로 받아들일 지식이 지혜가 없는 말은 그냥 배설되어 잊혀지는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현명해지는 것과는 성장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조금만 느리게 살 때가 된 것일까.

막상 느리게 살려고 해도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하다. 생각을 느리게 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보통 시간에 대해 과서는 뒤에, 현재는 지금, 미래는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데스산맥에 살고 있는 인디언 부족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아이마라족은 과거의 위치를 물으면 시야의 앞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과거의 사건들은 이미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앞쪽에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래의 사건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등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아이마라족의 생활에 깊숙이 배어 있다. 그들에게 ‘내일’은 ‘사람 등 뒤의 어느 날’이다. 오랜 조상은 앞쪽 멀리 있고, 미래 세대는 어깨 뒤 저편에 있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조상들의 지혜에서 인생을 배우고 깨닫는다.”

‘시간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란 챕터에 실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앞에는 10여개의 아포리즘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역류하지 않고 흘러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책은 이야기와 아포리즘들을 편집한 책이다. 예전에 많이 나오던 책들과 달리 아포리즘만 담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도 같이 편집한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아포리즘에 해설이 없듯이 이야기에도 해설은 없다. 이야기가 위에서 보듯이 아포리즘과 내용적으로 연관은 있지만 딱히 해설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포리즘을 나열하듯이 이야기도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행간을 읽으면서 메워넣으라는 말이 된다. 목차를 보면 주제별로 아포리즘을 편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놓은 아포리즘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엉성한 편집이다. 그러나 엉성하기에 이책은 가치가 있다. 엉성하게 짜인 사이 사이를 띄엄 띄엄 천천히 읽어가면서 의미를 메워넣다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된다.

느리게 읽어갈 수 밖에 없기에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하면서 여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책읽기의 명상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덮고 나면 여전히 바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스스로에게 느리게 느리게를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 이책의 가치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패의 향연 - 최후의 금기어를 논하다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지음, 오승우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패는 언제나 끔찍한 경험이다.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야 한다. 명백한 목표나 계획이 없어도 뭔가 하긴 해야 한다. 월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것이 실패의 구조이다.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 미래는 소멸한다. 자신의 현재와 과거가 한꺼번에 흔들리는 탓에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계획과 비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로 끔찍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실패를 한계의 경험이라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게 된 것은 모더니티의 현상이라 말하며 실패는 모더니티의 산물이라 말한다. 물론 실패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실패는 영웅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전통에 매인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정해진 밭일을 하고 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그는 마을 농부의 딸과 결혼할 것이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농부가 될 테고 여자아이라면 다른 농부와 결혼할 것이다. 그의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의 삶에는 오직 풍작과 흉작의 구분만 있다. 그가 나는 것은 자연의 영원한 순환뿐이다. 그는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밭을 가는 자로 신이 정해준 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겐 실패란 말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다시 말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를 오만한 자라 말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오만한 자,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몰락을 말해왔다. 오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은 설명할 수 없는 지혜로 사물과 인간에게 각자의 자리를 정해주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지적인 수준을 쌓아서도 이 세계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도 안되었다. 갈릴레이의 행동이 이단이엇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가 아니므로 남자처럼 행동해서는 안되었다.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이유이다.”

불가해한 신의 계획에 따라 살았던 중세사람들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그들도 재산을 잃고 흉작을 경험하며 사업이 망하고 가족을 잃을 수 잇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신이 원한 것이며 벌이었다. “그들은 신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언제나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대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오셀로, 맥베드 역시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신이든 운명이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에 휘둘리는 존재들이며 고대와 중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리어왕은 허영, 맥베스는 야심, 오셀로는 질투에 의해 파멸한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운명이 있다. 이야기는 자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기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오만불손했던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가 도덕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관객들은 비로소 균형과 질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효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피와 살로 빚어지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화려하고 저작적이며 인위적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개념처럼 여겨진다. 그들의 대사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과 너무나 거리가 멀고 관념적이어서 대화가 아니라 시적인 웅변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연설과 웅변의 시대는 흘러갔고 완전한 영웅이나 완전한 악인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안정효)

운명의 꼭두각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햄릿은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존재’가 아닌 “현대성을 지닌 존재로 넘어간 인물’이라 말한다. “그의 실패는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흠(아마도 겁쟁이 같은)에 기인하지 않는다. 햄릿이 실패하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관점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고 해결이 불가능하다.”

저자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았던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근대의 시작을 읽는다. “고대 비극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운명이 작용했다. 얼었던 시냇물이 봄에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듯 정의와 복수가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이런 고대의 비극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

햄릿이 자기 실패에 책임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또 극장 관객의 머릿속에 제기되지도 않았을것이다. 햄릿의 상황은 고대 비극에 등장하는 문제거리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햄릿의 실패는 복합성으로 나타난다. 즉 많은 요소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그는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혼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는 자아실현, 전통(피의 복수), 그리고 신의 심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저자는 햄릿을 현대로 넘어가는 인물로 본다.

그러면 근대(modern)는 어떤 시대인가? “지난 수세기동안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계는 고정되어 있었고 넘을 수 없은 선이엇다ㅓ. 그러나 근대가 동트면서 한계는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근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행복은 유럽의 새로운 사상’이라고 자코뱅당의 생 쥐스트가 말했듯이 행복은 모더니티의 언어가 되었다. 행복할 권리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프랑스혁명 인권선언문에 들어간다. 누구에게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실패의 권리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계는 고무줄과 같다. 뛰어넘을 수 있고 뛰어넘어도 되고 뛰어넘어야만 한다. 한계는 가상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공중분해되지 않는다. 이런 세계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편에서는 점점 더 높은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이런 세계에서 비롯된다. 이 세계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세계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성공하고 누구나 실패한다.”

타고난 대로 살던 농부의 세계는 사라졌고 세계를 떠받치던 신의 질서는 증발해버렸다. 그러나 신의 축복를 재해석한 청교도들은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세계로 재창조한다.

“청교도들이 해석한 예정설은 구교와 신교의 분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예정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유래한다.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 신이 모든 이간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미리 예정해둔다는 내용이다. 죽어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잇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세의 교리는 인간의 노력을 애초부터 차단했다.” 그리고 그 교리는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이 교리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받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증거를 스스로 만들었다. 일종의 트릭이었다. 일상의 규칙을 정하고 규칙을 잘 지키면 신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규칙을 실천하는 것 자체를 선택의 증거로 보았다. 그들은 노동을 중시했고 노동이 그들의 예배였고 로사리오 묵주였다. 그들은 쉼 없는 노동으로 신에게 헌신했다.

금전적 성공을 거둔 기업가는 그 성공을 신이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내린 상이라고 이해했다. 성공은 신의 선택이었고 실패는 신의 심판이엇다. 성공은 도덕적 헌신의 결과였고 실패는 개인의 죄였다.”

록펠러는 청교도들의 성공관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저자는 말한다. 록펠러만큼 기이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무자비한 사업가이면서 관대한 자선가였던 록펠러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신과 비밀 거래를 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부가 신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록펠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간단했다. 그로 하여금 재능을 선보이고 사업을 하게 한 신은 자신을 실패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가차없이 권모술수를 부린 것이든 합법이든 불법이든 전혀 상관 없었더ㅏ. 설사 그가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파멸시킨다해도 신은 그의 편이라고 믿었다.”

청교도들에게 성공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엇다. 청교도들에게 성공은 신앙에서의 성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성공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18세기 미국 문화에서 세속화되었다. 현실에서의 개인적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실현할 장소는 자신이 사는 속세였다.”

그리고 저자는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한단계 더 세속화되어 이제 신에 대한 믿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청교도 윤리는 점점 더 세속화되면서 “20세기에 들어서자 성공 이데올로기와 청교도적 정신문화 유산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이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관건이었다. 자신의 정신력만이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 성공의 조선을 자신의 심리적 기반 위에서 찾아야 했다.” 저자는 50년대 이후 소위 성공학 레토릭의 뿌리를 청교도 신학에서 신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대치한 것으로 설명한다.

“성공하려면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원해야만 한다. 미래를 어둡게 보는 사람은 곧 천둥 번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를 초래한다. 인기 있는 심리학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정신적 전능함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저자는 청교도 신학이 세속화된 결과 미국식 성공 이데올로기가 만들었져고 성공은 강박증이 되었으며 실패에 대한 공포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매스미디어의 메시지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이 세상은 너에게 열려 있어’라는 말들은 무자비하게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돈키호테처럼 소설과 현실의 간극을 판타지로 쉽게 묶어버린다. 2등은 만족스럽지 않다는 문화, 야심과 경쟁을 높은 덕목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자랐고 삶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최고를 선택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실패하면 어쩌지?’에서 맴돌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평점 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