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향연 - 최후의 금기어를 논하다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지음, 오승우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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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언제나 끔찍한 경험이다.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야 한다. 명백한 목표나 계획이 없어도 뭔가 하긴 해야 한다. 월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것이 실패의 구조이다.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 미래는 소멸한다. 자신의 현재와 과거가 한꺼번에 흔들리는 탓에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계획과 비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로 끔찍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실패를 한계의 경험이라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게 된 것은 모더니티의 현상이라 말하며 실패는 모더니티의 산물이라 말한다. 물론 실패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실패는 영웅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전통에 매인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정해진 밭일을 하고 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그는 마을 농부의 딸과 결혼할 것이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농부가 될 테고 여자아이라면 다른 농부와 결혼할 것이다. 그의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의 삶에는 오직 풍작과 흉작의 구분만 있다. 그가 나는 것은 자연의 영원한 순환뿐이다. 그는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밭을 가는 자로 신이 정해준 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겐 실패란 말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다시 말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를 오만한 자라 말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오만한 자,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몰락을 말해왔다. 오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은 설명할 수 없는 지혜로 사물과 인간에게 각자의 자리를 정해주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지적인 수준을 쌓아서도 이 세계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도 안되었다. 갈릴레이의 행동이 이단이엇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가 아니므로 남자처럼 행동해서는 안되었다.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이유이다.”

불가해한 신의 계획에 따라 살았던 중세사람들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그들도 재산을 잃고 흉작을 경험하며 사업이 망하고 가족을 잃을 수 잇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신이 원한 것이며 벌이었다. “그들은 신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언제나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대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오셀로, 맥베드 역시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신이든 운명이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에 휘둘리는 존재들이며 고대와 중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리어왕은 허영, 맥베스는 야심, 오셀로는 질투에 의해 파멸한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운명이 있다. 이야기는 자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기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오만불손했던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가 도덕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관객들은 비로소 균형과 질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효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피와 살로 빚어지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화려하고 저작적이며 인위적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개념처럼 여겨진다. 그들의 대사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과 너무나 거리가 멀고 관념적이어서 대화가 아니라 시적인 웅변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연설과 웅변의 시대는 흘러갔고 완전한 영웅이나 완전한 악인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안정효)

운명의 꼭두각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햄릿은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존재’가 아닌 “현대성을 지닌 존재로 넘어간 인물’이라 말한다. “그의 실패는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흠(아마도 겁쟁이 같은)에 기인하지 않는다. 햄릿이 실패하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관점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고 해결이 불가능하다.”

저자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았던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근대의 시작을 읽는다. “고대 비극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운명이 작용했다. 얼었던 시냇물이 봄에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듯 정의와 복수가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이런 고대의 비극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

햄릿이 자기 실패에 책임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또 극장 관객의 머릿속에 제기되지도 않았을것이다. 햄릿의 상황은 고대 비극에 등장하는 문제거리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햄릿의 실패는 복합성으로 나타난다. 즉 많은 요소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그는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혼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는 자아실현, 전통(피의 복수), 그리고 신의 심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저자는 햄릿을 현대로 넘어가는 인물로 본다.

그러면 근대(modern)는 어떤 시대인가? “지난 수세기동안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계는 고정되어 있었고 넘을 수 없은 선이엇다ㅓ. 그러나 근대가 동트면서 한계는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근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행복은 유럽의 새로운 사상’이라고 자코뱅당의 생 쥐스트가 말했듯이 행복은 모더니티의 언어가 되었다. 행복할 권리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프랑스혁명 인권선언문에 들어간다. 누구에게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실패의 권리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계는 고무줄과 같다. 뛰어넘을 수 있고 뛰어넘어도 되고 뛰어넘어야만 한다. 한계는 가상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공중분해되지 않는다. 이런 세계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편에서는 점점 더 높은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이런 세계에서 비롯된다. 이 세계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세계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성공하고 누구나 실패한다.”

타고난 대로 살던 농부의 세계는 사라졌고 세계를 떠받치던 신의 질서는 증발해버렸다. 그러나 신의 축복를 재해석한 청교도들은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세계로 재창조한다.

“청교도들이 해석한 예정설은 구교와 신교의 분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예정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유래한다.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 신이 모든 이간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미리 예정해둔다는 내용이다. 죽어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잇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세의 교리는 인간의 노력을 애초부터 차단했다.” 그리고 그 교리는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이 교리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받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증거를 스스로 만들었다. 일종의 트릭이었다. 일상의 규칙을 정하고 규칙을 잘 지키면 신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규칙을 실천하는 것 자체를 선택의 증거로 보았다. 그들은 노동을 중시했고 노동이 그들의 예배였고 로사리오 묵주였다. 그들은 쉼 없는 노동으로 신에게 헌신했다.

금전적 성공을 거둔 기업가는 그 성공을 신이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내린 상이라고 이해했다. 성공은 신의 선택이었고 실패는 신의 심판이엇다. 성공은 도덕적 헌신의 결과였고 실패는 개인의 죄였다.”

록펠러는 청교도들의 성공관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저자는 말한다. 록펠러만큼 기이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무자비한 사업가이면서 관대한 자선가였던 록펠러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신과 비밀 거래를 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부가 신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록펠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간단했다. 그로 하여금 재능을 선보이고 사업을 하게 한 신은 자신을 실패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가차없이 권모술수를 부린 것이든 합법이든 불법이든 전혀 상관 없었더ㅏ. 설사 그가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파멸시킨다해도 신은 그의 편이라고 믿었다.”

청교도들에게 성공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엇다. 청교도들에게 성공은 신앙에서의 성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성공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18세기 미국 문화에서 세속화되었다. 현실에서의 개인적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실현할 장소는 자신이 사는 속세였다.”

그리고 저자는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한단계 더 세속화되어 이제 신에 대한 믿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청교도 윤리는 점점 더 세속화되면서 “20세기에 들어서자 성공 이데올로기와 청교도적 정신문화 유산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이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관건이었다. 자신의 정신력만이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 성공의 조선을 자신의 심리적 기반 위에서 찾아야 했다.” 저자는 50년대 이후 소위 성공학 레토릭의 뿌리를 청교도 신학에서 신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대치한 것으로 설명한다.

“성공하려면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원해야만 한다. 미래를 어둡게 보는 사람은 곧 천둥 번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를 초래한다. 인기 있는 심리학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정신적 전능함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저자는 청교도 신학이 세속화된 결과 미국식 성공 이데올로기가 만들었져고 성공은 강박증이 되었으며 실패에 대한 공포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매스미디어의 메시지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이 세상은 너에게 열려 있어’라는 말들은 무자비하게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돈키호테처럼 소설과 현실의 간극을 판타지로 쉽게 묶어버린다. 2등은 만족스럽지 않다는 문화, 야심과 경쟁을 높은 덕목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자랐고 삶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최고를 선택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실패하면 어쩌지?’에서 맴돌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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