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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10년 만에 읽었다. 페이퍼백으로 나왔을 때부터 갖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책장에 모셔두기만 했었는데 번역본이 나오고도 1년이 더 지나 읽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뭐 그런 책이 이책만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전후일본사에선 워낙 유명한 학자라 대학원에서도 저자의 책을 두 권 읽었었다. 이 책 자체도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유명세를 탔었는데 아마존에 주문할 필요없이 일찌감치 국내서점에서도 페이퍼백으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번역본이 나온 것은 2009년이니 원서가 1999년에 나오고도 강산이 변했으니 책의 유명세나 가치에 비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아마 일본을 주제로 했기 때문이지 않나 짐작해보지만 아마 미군정기간을 다룬다는 마이너스 주제가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전후사의 흐름은 미군정기에 결정되었다. 오늘의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군정기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80년대 사회과학 논쟁은 해방전후사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전후사 역시 미군정기에 기본방향이 결정되었다. 오늘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전후사의 원형이 결정된 미군정기를 알아야 한다.
흔히 전후일본의 특징을 developmental state라 요약한다. 개발국가 또는 발전국가라 번역하기도 하는 이 용어 이외에도 학파에 따라 여러가지로 전후일본의 특징을 설명하지만 developmental state가 쇼와 시기 일본의 정치경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개념틀인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전후일본은 전전일본을 어머니로 하고 미국을 아버지로 태어났다고 보며 7년 8개월의 미군정기에 잉태되었다고 본다.
“21세기 초기 시점에서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변함없이 연속적으로 갖고 잇는 측면을 찾기 보다는 192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89년에 실질적으로 끝난 하나의 큰 순환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수십년에 이른 그 세월은 짧은 것이었고 폭력과 변화가 난무하는 시기엿지만, 정밀히 관찰해보면 전후 ‘일본 모델’을 특징짓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교배형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 모델은 전쟁 중에 그 원형이 만들어졌고 패전과 점령에 의해 강화되어 그 후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 이 기간의 특징은 일본이 허약하다는 끊임없는 공포감이며, 최대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가 최상층에 의한 계획과 보호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고가 일반적으로 ㅕ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관료제적 자본주의는 승자와 패자가 어떻게 일본의 패전을 감싸 안았는가를 바로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패전 직후에 유포된 장난기 어린 신조어를 사용해서 말하면 이른바, ‘일본 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스캐파니즈 모델(a SCAPanese model, 미군정 총사령부와 일본인의 합작에 의한 모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미군정의 처음 목표는 일본이 다시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평화(또는 비군국화)와 민주주의’로 요약되었다. 군정 초기 맥아더는 물론 미군정사령부(GHQ)의 분위기는 이상주의적이었다.
“한 사람의 개성이 역사에 흔적을 남긴 독특한 사례였다. 맥아더와 그 휘하의 열성적인 개혁가들은 메시아적 열정을 드러내 보였다.”
초기 GHQ의 이상주의와 사명감은 맥아더가 ‘점령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 불렀던 일본 헌법,당시 세계에서 (그리고 지금도)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만든 것에서 잘 나타난다.
GHQ의 ‘제헌의회’를 구성한 젊은 군인들은 헌법을 만들면서 “일본인들을 가르친다든가 하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오로지, 일본인들이 자기 자신의 지도자에게서는 얻을 수 없었던 덜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고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이상을 간직한 총명한 (그리고 대부분 쩖은)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가슴뛰는 임무는 상상하기 힘들다. 비록 천황가의 국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뭐든지 새로이 그려낼 수 있는 백지였다.”
GHQ 장교들이 “만들어낸 일본은 미국의 축소판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상적인 입헌 군주제 중에서도 가장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체제를 지향”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열거한 장은 인권과 관련해서 세계 역사상 가장 자유주의적인 법 조항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양성의 본질적 평등’이라는 미국 헌법에서조차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내용까지도 들어갔다.”
당시 아사히 신문은 ‘어딘지 모르게 맞지 않는 빌려입은 양복’이라고 적었지만 “헌법안은 전쟁에 지고 산산이 조각난 땅 위에 희망과 이상을 비추는 등대로서 주목을 끌었다. 20세기 중엽의 가장 선진적이고 개명된 ‘절충적’ 사고방식을 체현한 헌법의 채택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일본인들의 귀에 들어갔다. 주권행위로서의 전쟁을 방기함은 이 민족이 스스로 세0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끔 ㅎ랬다. 4류 국가로 하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온 이 자부심 강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놓칠 수 없는, 마음을 달래주는 새로운 내셔널리즘이었다.”
그러나 그 헌법은 “상자 속에 봉해진 자유였다.” 주권이 천황에서 국민에게 넘어간 헌법은 기술적인 이유로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선물”이 되어야 했다. ‘평화와 민주주의’가 점령군이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었듯이 말이다.
이것은 ‘점령기 내내 계속된 모순’이었다고 저자는 평한다. 새 헌법이 보장한 자유는 ‘배급된 자유’였고 헌법의 민주주의는 ‘주어진 혁명’이며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모든 것이 (일본인의 노력 없이) 그저 주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폭탄과 소이탄이 갑자기 그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그 하늘에서 평화의 선물이 쏟아졌다.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 무혈 혁명!” 당시 만화의 해설이다.
“민주주의 개혁자들은 동시에 식민지 총독이었고 다른 상황에 놓인 다른 미국인들처럼 그들 역시 감상적 제국주의자였다. 승전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행정관들은 갤브레이스가 ‘고상한 목적에서 비론된 오만한 확신’이라 부른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미국의 개혁가들이 위로부터 민주 혁명을 추진하면서 느낀 육욕만큼 강력한 감정은 동방의 적대자를 개조해 서구 기준으로 최소한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드는데서 오는 것이엇다. 일본에서 점령 초기의 ‘군국주의 일소와 밎주화’ 정책을 지배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상주의, 오만 그리고 원망, 즉 ‘전쟁을 벌이려는 의지’를 영원토록 없애 버릴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려는 소명 의식이엇다.”
강렬한 ‘십자군식 사명의식’은 일본을 전례없는 실험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으로 전철될 수 밖에 없는 시도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혁명이 지속되려면 밑으로부터 행해져야 한다. 군부 독재하에서 제대로 된 민주 혁명이 자리 잡지 못했던 일본인 만큼 따지고 보면 맥아더 한 사람의 지령이나 마찬가지엿던 신식민주의 군부 독재 하에서는 할 할 것도 없었다.”
물론 맥아더의 혁명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혁명은 희망의 불을 밝히고 상상력의 섬광을 빚어냈다. 미국의 지배는 낡은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에 균열을 초래했고 이는 전례 없는 개인의 자유와 아울러 미처 예기치 못했던 여러 형태의 민중 표현의 만개로 이어졋다.”
GHQ의 헌법안은 1주일만에 작성되었다. 이후 수십년간 이어진 헌법이란 거창한 문서가 1주일만에 나올 수 잇었던 것은 GHQ의 젊은 군인들이 일본인들이 정부안에 반대해 풀뿌리로 만든 헌법초안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헌법으로 “천황의 신민들은 시민이 되엇다.” 그러나 그 시민들은 ‘집단적 피로감’에 지친 사람들이엇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제2차 세계대전은 1941년 12월에 시작되어 3년 8개월 뒤에 끝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1931년 만주 정복에서 시작하여 자그마치 15년간이나 전쟁상태에 있엇다.”
전쟁의 결과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서 최소 27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1941년 일본 인구 7400만명의 3-4%에 필적하는 수치였다.” GHQ의 추산에 따르면 “1946년 현재 일본은 전체 국부의 약 33%, 전체 잠재 소득의 약 33-50%를 잃은 것으로 보았다. 농촌 지역의 삶의질은 전전에 비해 65% 수준으로 비농촌지역에서는 거의 35%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파악되엇다.”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은 900만명이 넘었다. “요코하마에 상륙해 도쿄까지 진격한 부대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에 할말을 잃거나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일본인들에게 종전 자체가 ‘해방’이었다. 그 해방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이었다.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삶을 되찾았다.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멍한 충격 속을 헤매다가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내 안도감은 사라지고 피로와 절망이 사람들을 덮쳣다. 광범위하게 퍼진 심각한 심리적 붕괴 상태는 그전까지는 단순한 일반 명사에 지나지 않았던 ‘교다쓰(허탈)’이라는 말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무력화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도 무력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날 그날 먹을 것을 확보하는 데 급급해야 햇다. 밥상 위에 먹을 것을 올려놓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된 시절이엇고 굶주림과 물자 부족으로 점철된 나날이엇다. 단 하루라도 식량 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영양실조야 말로 그 시절을 대변하는 말이엇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지치고 물질적으로 고통받는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평한다.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었을 때 한 여학생이 떠올린 생각은 이제는 눈에 불을 켜고 개구리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식용으로 쓸 개구리를 잡는 것은 아이들에게 할당된 일이었다.) 물론 얼마 안가 그녀의 안도감은 시기상조였단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게 15년동안 나라를 망친 엘리트들은 새 나라가 되어서도 “엘리트들은 정부나 민간 모두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존재들이엇다 전후에 일본의 엘리트들이 보인 혼란과 부패상, 그리고 부조리에 의해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엇다. 경제혼란은 무모한 전쟁 수행과 패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지만 전후의 경제 위기가 태평양 전쟁보다 더 오래 지속된 데에는 미국과 일본의 정책적 결함과 각종 부정부패가 한몫했다.” “그저 하루 하루 먹고사는 생활이 다시 찾아오게 된 것은 1949년이 지나서부터였다.”
패전 직후 “경찰 보고서는 대중의 혐오감이 극에 달해 ‘군부 및 민간 지도자에 대한 심각한 불신, 불만, 반감’으로 번져 가고 나아가 ‘군부 자체에 대한 증오감’으로 번져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했다.”
“패전은 특권층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자아냈고 빈곤은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패전으로 권위의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면서 “사회 안에 갑자기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 것 같았다.”
“전전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가 뿌리째 무너지고 잇었다. 농지 개혁에 의해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으로 구성되는 입법부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또 헌법 개정에 의해 주권재민의 원칙이 처음으로 확립되어 미국 헌법보다도 더 광범위한 인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의 중심에는 군국주의를 부정하는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인정되지 않았던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가 인정되고 교육 개력에 의해 학교 교육 과정을 자유화하고 남녀 공학이라는 평등주의를 추진했으며 대학 진학이라는 엘리트 육성의 길을 확대했다. 민법을 개혁한 결과,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지탱해 온 법적 근거가 무너지고 이혼이나 상속 등에서 여성의 입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고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그러나 그 공간을 메운 것은 다시 전전의 질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의 민주주의 혁명은 취약하고 뿌리 없는 것이었다.” 잠시 좌파가 득세해 회당이 집권하기도 했지만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좌파는 대안세력이 되기에는 부족했고 신뢰를 얻지 못했다.
물론 “일본에는 ‘변화’라는 전통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현질서를 보존하도록 교육받지 않았으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0년대 이해 끊임없이 변화의 격랑을 헤쳐 온 사람들이었다. 전쟁은 이런 전통에 가속도를 더했다. 위기감이 강회되었으며 현질서에 대한 불만도 깊어만 갔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그들은 ‘새로운’ 일본을 구축해 나아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맥아더의 혁명에 대해 일본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위로부터의 혁명’은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권위주의적으로 위로부터의 강력한 지도에 의해 현실을 180도 바꾸어 버리는 방식은 일본에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엇었고 미국 개혁자들이 일본 점령정책에서 성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던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 정치극의 감초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군주, 벽안의 쇼군, 가부장적인 군사 독재자, 허풍기 있고 솔직한 가부키 주인공이었다. 맥아더는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위광에서는 천황과 같은 존재엿지만 천황보다 친근하며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민주주의를 약속한 권위주의가 지닌 역설과 도전이 여기에 표현되었다. 최고 사령관은 위대하며 그러니까 민주주의도 위대하다는 것이 대다수 일본인의 반응이었다.”
새 헌법에 따라 천황의 신민은 시민이 되엇지만 실제로 그들은 점령군의 신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새 군주는 군국주의자들이 그랫듯이 언론을 검열하며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져다준 유산 중 하나는 곧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사회화하는 것이었다. 정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집단적 체념과 대중은 실제로 사태의 진전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관념에 대한 집단적 체념의 강화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정복자들은 합의된 의견을 조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다양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 그들은 침묵과 순응이 더 훌륭한 정치적 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정복자들이 이런 의식을 강화하는 데 얼마나 크게 성공했던지 그들이 일본을 떠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미국인을 포함해서 비일본인 다수가 그와 같은 태도를 일본의 특성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승자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상명하달에 기대어 통치했고 평등사상을 옹호하면서도 스스로는 불가침의 특권계급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명령을 실행하는 일본인 관료들은 “전쟁을 위한 국가 총동원이 절정에 달했던 때보다도 훨씬 더 큰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상징햇던 맥아더라는 한 개인이 연기한 제왕의 역할은 억압과 전쟁, 잔학의 시대를 통해 통치권을 행사해 온 천황을 떠올리게 햇다. 그리고 ‘수퍼 행정부’로서의 GHQ의 행동양식이 점령이 끝난 뒤에도 유지되어 일본 땅의 관료들에게 계승되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미국은 이 신흥 중상주의 국가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 되었다. 그것은 초기 개혁 정책이나 ‘역코스’의 공헌이라기보다는 점령군이 임무 수행을 위해 선택한 방법 그 자체에 의한 공헌이었다./ 점령군은 정책 모표만 보면 개혁에서 재건으로 크게 방향을 전환했지만 경제 전체에 대해서는 상부로부터 엄격히 통제하는 방법으로 일관했다.
점령군은 민주주의를 진작시키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왔지만 ‘실제로는 부분적으로 관료주의를 진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 관료주의적 유산이 주로 경제에’ 남게 되었다. 점령 시절의 고나료 조직은 항복 전에 일본이 이미 공고하게 쌓아 올린 전시 관료제 위에 날림으로 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새로운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1952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착실히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