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
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 중국에서 인(人)이란 글자는 원래 천자를 말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인(人)이란 말은 제후들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의 업적은 인(人)을 사(士)계급까지 넓힌 것이다. 인(人)이란 말의 역사는 중국에서 정치적 권리가 어떻게 확산되었는가의 역사이다.
인(人) 즉 사람이란 말은 오직 정치적 권리를 가졌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사람은 인이 아닌 민(民)이라 불렸다. 민(民)의 자형은 꼬챙이로 눈을 찌르는 모양이다. 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무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평등하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남보다 더 평등한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누가 온전하게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랐다. 왕과 제후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던 고대중국에서 德이라 불리었던 그 기준이 실제론 혈통이었다면 공자 이후로는 능력이었다. 그에 비해 고대 로마에선 재산이 기준이었다.
“Only money made a high political career possible. Patrician blood had long become a liability. Money. It ruled the world. Without it, a man was nothing. Money. How to get it? How to get enough of it to enter the Senate? Dreams, Lucius Cornelius Sulla! Dreams!
Money again. Money, money, money. Though power entered into it too. One should never forget or underestimate power. Which drove which? Which was the means, which the end?” (Colleen Mccullough, ‘First Man In Rome’)
로마 이후에도 유럽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산이 기준인 것은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았던 근대영국과 식민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개인의 부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휘그당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또 유권자로서든 아니면 공무원으로서든 그 자격의 기준은 똑같이 부였다. 투표권에 관한 영국인의 사고에서는 오직 소득을 낳을 토지를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립적인 사람들만이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판단을 건전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산이 없거나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여성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예, 소작인, 하인, 장인, 도제들은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걸린 문제에서 특히 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면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이란 개념은 최근의 발명이다. 인간이 있어온 시간의 대부분 동안 인권이란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역사적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평균을 벗어난 비정상이라 할만한 시대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의 시대는 비정상이 되었는가? 이책이 묻는 질문이다. 저자는 그 답을 한 가지 개념의 역사에서 찾는다.
‘영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화는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신화다. 이는 이미 17세기부터 주창되었지만 19세기에 수차례의 정치개혁을 거치면서 비로소 확신되기에 이르렀다. 전제정 밑에서 신음하는 우상 숭배적인 대륙사람들과 달리 자유를 만끽하는 독특한 ‘섬나라 인종’이라는 이미지는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로 선회한 튜더 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명예혁명(1688)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이 차지하는 위상에 맞먹는 영국의 명예혁명은 의회와 왕정 같은 영국의 오랜 제도에 대한 보편적 믿음을 가져왔다.” (박지향)
그러나 그 믿음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1700년경 런던은 적대심으로 상처 입은 도시였다. 한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과 정치혁명은 불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사법적 또는 신학적 전문성을 자랑하던 유서 깊은 중심지들에 대한 불신과 진리 탐구와 의사결정의 낡은 방법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힘들었다.”
길고 긴 내전을 낳았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사상적 차이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용인하는 관용을 낳았다. “대화는 관용과 질문하고 토론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은 “서로 옳다는 주장들 사이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적어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영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관용을 배운 것은 “어렵게 얻은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가 영국의 기본적인 요소로 정착”되었다.
문제는 불신과 자유 덕분에 태어난 “산만한 도시 세계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다양성” 위에서 어떻게 질서를 세울 것인가였다. “영국의 상류층과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 후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극단적 다원론을 누그러뜨릴 초법적 방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해와 오해를 구분하고 기본적인 사상들에 대한 의견일치를 어느 정도 촉진하되 그 모든 것들을 종교적 관용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력한 해법으로 ‘상식’이 제시된다. 공동체의 누구나 공유하는 상식은 “공통의 정체성이 세워질 최소한의 권위가 되어줄 것으로 보였다. 그럴 경우 폭넓게 받아들여진 핵심적인 가정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과도한 개인주의와 정치적 증오, 당파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정치역역에서 상식의 적이 ‘당파성’과 ‘이해관계’라면 종교에서 경멸해 마땅한 상식의 적은 ‘광신’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을 그 모든 적들에 맞설 성채로, 또 불필요하게 학식을 자랑하거나 사변적이거나 난해하거나 광적인 것에 맞설 성채로 높이 평가했다.” 극단주의자들에게 한 세기를 끌려다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식은 “토론의 한계를 그어” 의견충돌이 낳을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여겨졌다.”
상식이 한계를 긋는 구체적인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극단으로 흐르는 이상주의자들과 달리 보통사람들은 “현실의 상식적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우수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상식의 옹호자들은 세상 실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정확히 말하는 본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보통사람들을 옹호”하면서 ‘상식의 적’들을 공격했다. “과연, 상식의 가치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18세기 첫 몇 십 년동안 휘그당의 과두체제와엘리트 사회의 결속에 필요한 토대가 되었다.”
더 이상 정부나 교회가 검열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식이 검열관의 자리를 차지한다. “상식의 옛날 개념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심판관과 검열관’이었다면 이제 그 개념은 문화적 규제의 수단으로 일반화되고 집단화된다. 상식은 표현에 대한 형식적 규제를 철폐했다고 자랑하는 모든 사회들의 특징이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구조적 검열이 되었다.”
문제는 그 상식의 누구의 것이냐, 이다. 물론 상식은 인민(people)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상식을 배울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고 여겨졌고 가난한 자들도 상식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초에는 상식도 심미안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키울 수 있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미덕으로 불린 상식의 소유자는 “합리적이고 착실하고 멋을 알고 덕을 갖춘 중류층과 상류층 사람들로 이뤄진 예의 바른 대중”과 같은 뜻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의 적(실제로는 그들의 정적)을 상식의 소유자인 인민의 편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인민은 상상의 산물일뿐 시골과 도시의 골목에서 만나는 현실의 인민이 아니었다. 상식의 이런 비현실성 때문에 결국 상식의 주창자들의 의도와 달리 상식은 상식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의 중심이 되었고 조화를 위해 고안된 개념이 정쟁의 무기가 되었다.
이런 추상성 때문에 상식(common sense)은 프랑스어권에서 양식(bon sens)로 변형된다. 사전적으로 영어의 상식과 불어의 양식은 거의 호환가능하다. “양식은 기본적인 추리능력과 일상적인 식별능력으로 정의되었으며 몽테스키외가 표현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질 기본적인 진리들을 얻게하는 ‘사물들을 서로 정확히 비교할 줄 아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양식을 가진 사람, 교양인(homme de bon sens)이 누구인가가 문제이다. 교양인은 “사물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의상 (상식의 소유자인) 영어의 people과 다를 이유는 없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상식이 검열법이라는 정교한 도구가 없는 가운데 공동체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단속의 기능을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과 비슷한 양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된 상식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맥락에서 보면 상식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의 프랑스어 상대인 양식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외양 밑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뒤엎기 위한 노력으로 넌센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잠재력을 의미했다.”
영국의 상식과 대륙의 양식이 달라진 이유는 정치적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서를 세우려던 영국과 달리 구체제의 “프랑스는 여전히 관습이 보통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사는 준칙의 원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다. 암묵적 일치에 의존했던 ‘만민일치’는 근대초기 유럽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성불가침한 규칙의 원천이었다.관습은 임금과 고용조건에서부터 부채의 엋산까지 근대초기 경제적 삶의 중요한 측면을 모두 결정했다. 또한 계급구조를 떠받쳤다. 당연히 종교적 관행도 지배했다.” 그런 맥락에서 건전한 상식 즉 양식은 관습의 넌센스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무기로 쓰인다.
“오늘날 우리가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선동적 정치 스타일은 그 시대의 정치이론은 (상식과 양식이 대표하는) 계몽운동 문화의 다양한 갈래들이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폭발력이 처음으로 증명된 것은 미국혁명에서 였다.
페인이 ‘상식’이란 책자로 주장했듯이 미국혁명의 이념은 상식과 양식이 결합이었다. 페인은 미국인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양식) 국가 정체성에 변화를 줘야할 뿐 아니라 집단 상식이 자신들을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으로(상식)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과 양식의 결합은 “인민주권이란 공화주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실험하도록 햇다.” 저자는 이 “예상치 못한 결혼”이 “민주주의 상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페인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상식의 이중성’ 덕분에 “1776년이 다 가기 전에 이미 상식은 새로운 형태의 인민통치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형태의 통치에는 인민들이 각자 타고난 실용적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통해 주권자가 되지만 그들의 판단력은 상식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영국의 상식도 프랑스의 양식도 그랬듯이 “상식을 대효한다고 지나치게 주장하고 나서는 곳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상식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거나 상식에 호소한다는 주장은 초기에 ‘양식’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잘 알았듯이 바탕에 기만을 깔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서 진정으로 대중적인 것은 거의 없다. 어느 것이든 절대로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폭넓게 교감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상식도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것들만큼이나 추상적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사회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의 희생을 바탕으로 득을 본다. 무엇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부른다. 그것은 곧 상식이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칸트가 말하듯이 “상식은 진리의 법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상식은 지식주장에 요구되는 비판적 조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수사적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 대중의 판단도 협잡꾼들만 영광을 누리게 만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은 정치질서에 대한 비전을 낳은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란) 정치 스타일을 낳았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포퓰리즘의 인식적 토대이며 또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영원한 위협의 하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