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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시장 - 부자나라들과 투자집단의 은밀한 세계 장악을 폭로한 충격 보고서
에릭 J. 와이너 지음, 김정수 옮김, 곽수종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이책의 주제는 뻔하다면 뻔하다. 세계의 권력이 서에서 동으로 옮겨간다는, 한 세대 전부터 떠돈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단지 특이하다면 이책은 그 뻔한 이야기를 이번 금융위기라는 사건에 초점을 맞춰 되풀이하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왜 힘이 옮겨가는가? 그 이유는 물론 돈이다. 미국의 경제력이 무너지면서 미국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힘도 없다. 이책의 저자는 돈이 미국의 힘을 어떻게 제한하는가를 그림자 시장이란 용어로 설명한다.
그림자 시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림자시장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본부도 없고 거래소나 공식적인 리더십도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금융시장이라 정의하는 단일한 교환지대도 아니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그림자 시장은 애매하다. 이미 정립된 개념을 가져와 쓰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만든 개념이고 그 개념도 어떤 명확한 실체가 현상을 부르기 위해 만든 작업용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림자 시장에 가장 닮은 개념은 금융 암시장이다. 이번 금융위기로 이전처럼 규제없는 금융시장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규제가 있으면 언제나 회피할 수단도 있게 마련이며 규제가 없거나 미미한 조세회피지역이나 작은 국가로 자금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자금의 이동과 함께 “작은 금융의 중심지들은 거대한 금융시장을 대신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규모 금융 중심지들은 인터넷ㅇ를 통해 대부분의 거래를 할 수 있는 ‘금융 암시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대니얼 앨트먼)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그림자시장은 암시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와 지정학적 권력이 융합한 글로벌 결합체, 눈에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림자시장은 서로 아무 연관도 없는 최고 부자 나라들과 주식, 채권, 부동산, 통화 등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이루어진 막대한 보유자산을 통해 국제경제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투자자들의 집합체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림자시장은 그런 자본의 우연한 결합체를 말하며 일종의 현상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현상은 막강한 위력을 낳기 때문에 단순한 현상은 아니며 그 자본의 출처 때문에 아무 의도가 없는 결과 이상이다. 그림자 시장의 투자자들은 “거대한 국가 소유 지주회사는 물론 헤지펀드와 비공개 투자펀드 그리고 정부가 운영하는 국부펀드처럼 대체로 규제받지 않는 투자수단을 통해 금융상품을 보유한다.”
물론 모든 투자자가 그렇듯 이들이 신경쓰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며 이들간에 어떤 동맹도 협력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이 모여 집단적으로 결과를 낳을 때 그것은 패권의 이동으로 나타난다고 저자는 본다. 그리고 힘의 이동은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그림자시장이란 존재 자체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중국이 온갖 방법으로 미국을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막대한 외환보유고와 미국의 엄청난 채무때문입니다. 미국을 가장 괴롭힌 것은 중국이 미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손 하나 까딱할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단순히 게임이론의 기본을 활용할 수도 잇습니다. 이를테면 그냥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위협만으로도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잇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점은 그 위협을 뒷받침할만한 뭔가를 갖고 있느냐는 겁니다. 중국은 그런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본과 미국의 채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마약중독자와 마약상의 관계와 비슷하다. 미국은 냉정한 현금에 중독되어 있다. 이런 상황 덕분에 중국은 마침내 양국 관계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한 자본 공급을 줄이고 달러화 중심의 보유자산을 매각할 수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미국은 견딜수 없기 때문이다.”
마약중독자가 제대로된 인격으로 대접받지는 못한다. 이전까지 중국에 대해 미국은 거만했다. 중국은 미국을 대국으로 대접하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도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인권을 들먹이며 사사건건 내정간섭에 가까운 훈수를 두엇고 뭔가 모자라는 학생을 가르치듯 선생으로서 우월감을 드러냇다. 미국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이건 중국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중국은 그런 관계를 참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중국 관리들은 미국 관리들에게 중국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고 거림낌 없이 촉구해왔다. 중국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논의하고 싶지 않은 주제는 ‘콧등으로 날려 보냈다.’ 중국은 갈수록 양국 간 대화의 조건을 정할 수 잇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2009년 11월에 이루어진 오바마 대통령의 중국방문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 방문은 대통령이 실제로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았거나 말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더 주목할 만했다. 오바마의 일차적 사명은 환경과 세계경제를 비롯해 국제적 쟁점을 놓고 세계 강대국들간에 까다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국간의 가장 곤란한 경제문제에 대해 오바마 정부는 입을 다물었다. 중국관리들에게 인민폐의 가치를 조작하는 일을 중단하고 중국상품의 원가를 높이라고 요구하지 못했다.”
이전까지 꿈도 꿀 수 없었던 운의 역전(reversal of fortune)이다. 이런 역전은 돈의 힘에서 나온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는 엄청난 국채 규모 그리고 그 부채를 대부분 전 세계의 여러 적대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잠재적인 지정학적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뜻이다. 미국에 투자한 나라들이 실제로 미국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상 미국주식회사의 주주다.” 예를 들어 “오늘날 중국관리들은 미국의 건강보험 프로그램 계획이 예산 적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싶어한다. 이러한 지적은 중국이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은행으로서 그 계획에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이 발행한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그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영향력은 어떤 음모의 결과가 아니다. 단지 중국이 벌어들인 돈을 투자한 결과 갖게 된 영향력일 뿐이다. 그런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중국만이 아니다. 오일달러를 투자하면서 중동국가들도 얻게 된 힘이다. 이책이 말하는 그림자시장은 그런 투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구체적인 과정이며 그 투자로 얻게 되는 영향력의 메커니즘이다. 사실 이책의 주제는 단순하다. 그리고 그 단순함 이상 이책이 어떤 논리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단지 기자답게 저자는 그 디테일을 풍부하게 재미있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디테일이 이책의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