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 - 인간다운 행복을 외면하는 경제적 사고에 제동을 건다
요하네스 발라허 지음, 박정미 옮김, 홍성헌 감수 / 대림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이 하는 일에는 목적이 있다. 시장에서 사람이 하는 일 역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시장이 어떤 목적이 있는가는 말하기 힘들다. 시장 역시 사람이 만든 제도인 한 정부나 학교, 기업처럼 존재이유 즉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시장이 있는 이유는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그 거래의 이유이다. 거래 자체로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거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평균을 내 대표값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 흔히 말한다. 시장의 거래 역시 그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보기에 행복은 순수하게 경험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 나름의 행복관이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어떤 윤리적인 법칙의 확실한 기반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거래를 통해 사람들이 얻으려는 “행복과 이익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류경제학에선 시장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학의 대상은 분명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거래의 목적이 무의미하다면 거래 자체 즉 거래를 통해 얻는 이익을 대상해야 한다고 경제학자들은 말해왔다.

거래의 이면에 있는 목적 즉 “행복은 이로써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 행복의 개념을 이익의 개념과 맞바꾼 경제학은 이익에 대해 형식적인 말만 늘어놓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이 돈이 나중에 어떻게 쓰여야 할까 하는 문제나 일반적으로 경제의 의미를 묻는 문제는 공적인 논의에서 제외되는 ‘약한’ 주제에 속할 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이 나름대로 평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얻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의 두드러진 특징은 목적이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거래를 위해 거래를 한다. 그 거래를 왜 하는지 목적이 없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은 어떤 행위의 동인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못한다. 이익 개념을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만 파악하므로 모든 것을 사적인 이익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 외에도 동기나 의도, 감정 또는 경험에 대한 주관적 판단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은 그런 것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못한다.”

고전적인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두가지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소득은 5만 달러인 반면, 사회 전체의 연평균소득은 2만5천 달러에 불과하다.

두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소득은 10만 달러인 반면, 사회전체의 연평균소득은 20만 달러에 이른다.

하버드 의대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 절반 이상이 첫번째 세계를 선택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대로라면 이익이 극대화되어야 하니 당연히 사람들은 두번째를 골라야 한다. 그러나 반 이상의 첫번째를 골랐다. 사람은 단순히 더 많은 소득과 더 높은 소비를 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득이 만 달러 이상이 되면 소득은 생존과는 상관이 없다. 그 이상의 소득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익이 무슨 의미인가를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은 설명할 수 없다.

이익이 무슨 의미인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신의 행동에 관한 한 전적으로 예측가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버드 의대의 실험에서 드러나듯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예측 역시 할 수 없다.

저자는 다시 의미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는 만족, 더 넓게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행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정의는 칸트가 말했듯이 불가능하다. 저자는 행복의 의미를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번째 가능한 형식적 정의는 욕구의 만족으로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다. “신공리주의는 행복, 더 엄밀히 말해 ‘이익’이란 소망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객이 구매행위에서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이미 말했듯이 행복을 만족으로 정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선 “선택이 반드시 바람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바라던 바가 실현되는 것은 정말 믿을만한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어떤 결정이나 행위, 경험 또는 상황이나 나중에 가서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것에서 굳이 행복을 찾으려 애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소망은 비합리적이거나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운동에 재능이 없으면서 익스트림 등반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건드리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이더스 왕처럼 행복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소망실현이란 개념 자체의 불안정성만이 아니다. 소망 자체 역시 행복을 정의하기에는 불안정하다. “로또에 응모한 사람은 최대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하고 바라던 대로 당첨이 되면 곧 욕구는 더 높아진다. 그러나 당첨이 되어도 대부분 제한적으로 일시적으로만 행복해질 뿐이다.”

저자는 그러한 행복을 덧없는 것, 에피소드적 행복이라 말한다. 저자는 “에피소드적 행복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아마르티아 센이 제시한 대로 저자는 그 기준으로 “소망실현과 쾌락증대라는 공리주의적 기준보다 삶의 기회라는 평가기준을 우위에 둔다.” 아마르티아 센”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이나 자원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사람의 기회가 바로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열쇠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신의 목표와 소질, 능력에 부합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행복이 곧 성공적인 삶의 다양한 모델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옵션 내지 선택가능성이라고 이해하는 셈이다.”

행복을 성공적인 삶으로 정의한다면 경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저자는 본다. “시장과 경쟁은 경제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임이 입증되었으나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그저 모든 사람의 삶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경제적 존재 그 이상임에도 대다수 사회에서 자기 생애의 많은 부분을 경제활동에 할애한다. 그래서 대부분 경제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돈을 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소질이나 능력을 펼치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이점에서 경제활동 자체가 성공적인 삶에서 중대한 고유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경제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저자가 인간다운 경제라 부르는 것은 두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의 삶이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물질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경제활동은 그 자체가 성공적인 삶에 유익한지 아닌지를 보고 평가를 받기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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