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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로 ㅣ 필립 K. 딕 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지금까지 수없이 종사했던 별 볼 일 없는 직업들 중 즐거웠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일을 곰곰이 반추해보곤 한다. 2105년, 데네브 항성계로 향하는 거대한 식민 우주선에서 배경음악 시스템을 맡아 운영했을 때의 일이다. 벤은 테이프 창고를 뒤지다가 <카르멘>의 현악 중주나 들리브의 가극 사이에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가장 좋아하는 5번 교향곡을 골라 우주선의 작업 칸막이나 작업 구획 곳곳에 숨겨져 있는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수없이 반복해서 흘려보냈다. 묘하게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 틀었다. 7번에 마음을 내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여정의 마지막 몇 달에 이르러서야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 충성의 대상을 9번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꿋꿋이 지조를 지켰다.
아마 내게 정말로 필요한 건 잠일지도 모르겠군. 벤은 중얼거렸다. 일종의 황혼 같은 삶에 침잠하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베토벤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아냐.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어! 행동에 나서서, 뭔가를 달성하고 싶어. 그런 욕구는 매년 더 절실해졌다. 그리고 매년 희망은 점점 멀어져가기만 했다.
[...]
신이시여. 벤은 생각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우주적인 견지에서 본다면야 좋은 일이겠지만,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그 부분은 이해해주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필립 K. 딕, <죽음의 미로>, 18-19.
소설 속의 벤처럼 나도 5번 교향곡으로 베토벤을 듣기 시작했다. 시작은 같지만 그 이후 순서는 좀 차이가 있다. 5번에서 3번으로, 그리고 6번으로 갔다가 9번으로 옮겨 갔다(간간이 7번과 4번을 들으면서. 1번과 2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적이 없다). 9번을 들을 때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졌던 건 비슷하다. 내 경우, 이 흥분 상태는 꽤 오랫동안(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그 후로는 (영화 <마지막 4중주>의 영향으로) 현악 4중주 14번을 듣다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듣고 있다.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누구의 무슨 음악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듣는다는 걸, 음악에 집중하지 않고 (당연히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하지도 않고) 단지 bgm으로 듣는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 베토벤 교향곡에는 이러한 감상 태도가 통하지 않는다. 베토벤은 아주 단호하게 청자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 착안한다면, <죽음의 미로>의 인물 벤이 베토벤 교향곡을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작업 공간 곳곳에 흘려보냈는데 "묘하게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서술은, 그 '묘한 불평 없음'은 소설의 전체 구성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