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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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벌레이야기는 한마디로 니체의 책 제목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연상케 하는 소설이다. 절대자의 구원도 한 인간의 구체적인 아픔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고 마는.
이창동감독의 "밀양"을 먼저 보고 원작을 읽었다. 밀양. 잠시 secret sunshine 이란 제목안에 영화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편을 잃고 찾아온 남편의 고향. 그리고 아이의 실종. 슬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용서. 그리고...
원작에서 알암이 어머니와 영화속 신애는 많은 면에서 닮았지만 또 많은 면에서 다르다. 알암이 어머니는 소설 내내 "알암이 어머니"로서 불리고, 알암이 어머니로서 정체성을 갖는다. 알암이의 실종은 그에게 삶의 끝이었고, 교회에 가서 소위 "구원"받은것도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알암이를 위함이었다. 살인자를 용서하고자 한것도 "알암이 어머니"로서..그러나 자신보다 더 평온한 얼굴로 오히려 자신을 축복하는 살인자 앞에 알암이 어머니는 다시 삶의 이유를, 아니 구원받음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사형집행의 순간까지 자신을 축복하는 살인자 앞에서 죽은 아이의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이를 따라 가는수밖에
영화 속 신애를 부르는 호칭은 크게 세가지이다. 준피아노, 원장님, 신애씨. 용서하러 갔다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말에 절망하는 건 원작 소설과 같지만 신애는 시름시름 앓는 대신 용서의 권리를 앗아간 존재 - 하느님일수도 있고, 자신을 끌어들인 교인들일수도 있고, 혹은 자신처럼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수많은 교인들에게 - 에게 "복수"할만큼 강하다. 아니, 살고자 하는 의지로 볼때 더 인간적이다. 과일먹는 일상 중에 시도한 그녀의 칼부림은 삶에의 포기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복수였으니까. 그녀를 아이의 엄마로 규정짓지 않고 늘 "신애씨"라 부르며 옆에서 지켜봐주는 종찬은 말 그대로 속물이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필요할 때 있어주는 "버팀목"이다.
원작은 여주인공의 자살로 끝나고 영화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결말 - 영화는 쨍한 해가 비치는 하늘로 시작해서 햇살이 비치는 수채구멍을 비추다 끝난다 - 을 볼때, 이청준씨와 이창동씨가 말하고자 했던 요지는 약간 다르겠지만 - 내 생각으론 이창동 감독은 비현실적 절대자보다 속물이 낫다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의도 같다 - 두 작품 모두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를테고, 또 아이의 죽음같은 극단적 슬픔은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말하지 못할 어려운 문제다. 글쎄, 김집사의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여기 비치는 햇빛 한조각에도 다 주님의 뜻이 담겨있어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도 다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그 큰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받아들여야지요"
햇빛 한 조각에 담긴게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자기 생명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 매 순간순간에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자신에게 충실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용서란 것도 결국 더 온전히 살기위한 행동 - 자신의 마음이 그곳에 고착되어 있길 거부한다는 면에서 - 이라면. "인간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만 고통받는다"라는 말은, 사실은 생명이 가지는 삶의 의지를 달리 표현한것이라면.
문득 영화를 보고 난 후 혹은 원작 소설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