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냥 멍하니 터덜터덜 걷고 싶을 때. 간단한 행낭을 꾸려 홀린듯 전남에 왔다. 딱히 일정도 없이. 가방엔 옷 몇벌과 이 책.

최근 알랭 드 보통의 글에 푹 빠져서 그의 책과 여행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책을 들고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두가지. 하나는 얇고 가벼운 외형. 두번째는 한권으로도 그의 저작 여러권을 상기시켜주는 효과

이 책은  그의 여러 저술중에서 가장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산문들을 모아 재편집한 것이다. 그의 글은 대부분 사소한 일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 낸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간에. 일관된 주제 아래 쓰여진 그의 글을 똑 떼내어진 채로 독립적으로 만나는게 신선하다. 분명 읽었던 구문인데 마치 처음보는 글처럼 다시 마음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그 단락의 앞뒤에 있던 가슴에 남는 구절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마치 우연히 마주친 추억의 장소나 사물이 예전 기억을 불러일으키듯. 짧은 글임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말들과 그게 겹쳐지는 내 생각들을 하나씩 곱씹자면 아주 천천히 읽게 되는 글들이다. 시를 음미하듯이.

알랭 드 보통을 접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서 그의 글들이 가진 다양한 매력을 한번에 맛볼 수 있겠지만 가능하면 다른 글들을 읽어 본 후에 접하길 권한다. 똑같은 텍스트라도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테니까. 짧은 글들이다 보니 어떤 주제에 대한 드 보통 생각을 집약해 놓은듯한 구절들이 많아 아홉 개 글이 자칫 산만하게 다가올 수도 있으므로. 물론 그 짧은 글이 원래 어떤 맥락속에서 쓰였는지 한권의 책으로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첫 산문인 "슬픔이 주는 기쁨"은 본래 "여행의 기술"에 있던 글인데 그림 이야기가 많다. 여행의 기술은 그 그림이 책에 실려있어 글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그림을 보며 깊이 생각할 수 있는데 그림이 없이 그림에 대한 설명과 느낌만 실려있으니 텍스트 만으로는 전해지는 울림이 부족한 듯 하다.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들 "외로움"에 대한 언어적 설명만으로는 실제 그림이 풍기는 분위기를 절대 재현할 수 없으므로.

멍청하게 걷다가 잠시 쉬고 싶을 때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두번 세번 만나도 늘 새로운 친구같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