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표지의 아기모형물의 표정이 강렬하다. 천진한 듯 하면서 사악해보이는 표정. 누구라도 꾀어낼 수 있다는 듯한 오만한 포즈. 이 아기 루시퍼는 각 장 사이사이에서 튀어나와 "너라고 안그럴 것 같아?"라며 독자를 비웃는다. 앞머리에 수록된 천사와 악마가 맞물린 에셔의 그림은 선과 악을 개인의 기질적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는 책의 요지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유태인 수용소의 그 '극악무도한' 독일인들이, 사실은 너무도 평범하고 때로는 '좋은'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익숙하다. 쁘리모 레비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찾지 못해 결국 자살로 마감하고ㅡ 인간이 원래 악한존재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매일 끔찍한 사건/사고들이 터진다. 이 책 1장에서 예로 든 르완다 내전이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잔인한 사진들을 보며 "어떻게 인간이..."라는 탄식이 나오지만 오히려 더 무서운 건 "너도 이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의 주제다.

'시스템'이 인간을 악하게 만든다지만 그 '시스템'을 고안해내는것 역시 인간이다. 저자는 나쁜 시스템을 고안해 낸 사람들과, 시스템이 악하다는 걸 알면서도 방관한 주변인들의 "행동하지 않는 악"에 대해 책임을 묻는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사건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당국에서는 문제가 된 '불량'군인 몇명을 처벌하는것으로 대처했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 몇명의 군인보다 더 엄하게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을은 시스템을 고안해 낸 - 국방부 장관, 부통령, 대통령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 고위직들이다. 하지만 사회가 늘 그렇듯 응징받는건 제일 아래의 '소모품'들일 뿐.

'행동하지 않는 악'의 여운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단순한 무관심에서 부터 나와 '상관없는'일에 공연히 잘못걸려들고 싶지 않은 개인주의, 혹은 내집단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두려움, 혹은 별로 달라질것이 없을것이라는 무기력함이 오늘도 우리를 주변의 사건들에서 떼어놓는다. 김상봉 교수의 어법을 빌리면 '홀로주체성'의 환상에 빠져 스스로 웅크리고 있는 것. 타인에 대한 신뢰/연대가 전제한다면, '서로주체성'이 내면화 되어 있다면 그럴 수 있을까? 88만원 세대는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기진맥진해서 다른사람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회가 88만원세대에게 부과한 부당한 대우 -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을 빼앗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세울 수 없도록 만드는 - 에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박하고 순진한 내 가슴은 당장은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무언가 하기위해 노력하는것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 믿고싶다.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선해질 수 있다'는 말의 반증이기도 하다. 책 말미엔 평범한 사람들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악한 시스템에 걸려들지 않도록 늘 '깨어있을'것을 주문한다. (친절하게도 '악한상황에 맞서는 10단계 프로그램'까지 제시하면서!)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지고 집단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부당한 권위에는 반항하라는 등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 들이지만 앞서 살펴본 '책임없음'이 초래한 참혹함 때문에 조금 더 가슴에 와닿는다. '평범한 영웅'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조금 더 바뀌는 것이겠지. 

    **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과 비싼 책값은 독자를 주눅들게 한다. 보고서처럼 자세한 설명때문에 지루해지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기 위한 부연설명들이 너무 많다. 요즘 책들은 100페이지면 할 말을 200,300페이지로 불려놓는데 용한 재주가 있다. 결론은 별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만남'. '만나다'라는 지극히 익숙한 동사의 명사형. 우리는 매일 수많은 누군가를 '만나고' 또 '누구 만난다'는 말을 스스럼 없이 내뱉는다. 하지만 '만나는 행위'에도 '급'이라는게 있어 어떤 역사적 순간을 가리키기도 하고, 별 감흥없는 일상의 순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책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만남'이라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라 한다. '타인과의 만남'속에서 서로주체성이 발현된다 말하는 김상봉 교수에게 중요하지 않은 만남이 있으랴 싶지만 서경식과의 만남은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나 보다.

김상봉 교수의 책은 몇 권 접해봐서 대략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짐작했었지만 서경식 교수의 책은 한권도 읽지 않았었다. '디아스포라의 눈'이란 칼럼을 몇 번 보긴 했어도 '재일조선인'이라는 타이틀때문에 그가 말하는 '고통'들에 대해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던 건 사실이다. 박노자의 글(한국에 대한)에서 느껴지는 급진성과는 조금 다른, 내면에 감추어진 - 별로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 흉한 모습을 보는 불편함이랄까. 이 책에도 거론되듯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본 적 없는 주체와 끊임없는 자아 상실속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했던 주체 사이의 차이리라. 박노자씨에게 한국이 '춘향뎐'을 통한 막연한 동경으로 다가왔다면 서경식씨에겐 '재일조선인'이라는 딱지와 두 형을 가둔, 차라리 부정하고 싶은 '타자'였을테니.

45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에 걸맞게 다양한 주제들이 튀어나오지만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만남' 특히 '고통받는 타인과의 만남'이다. 첫 대담은 광주에서 518을 화두로 씨알(민중)에 대해 말한다. 김상봉 교수에게 씨알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서 형성되는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이자 자기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억압을 뚫고 분출하는 저항의 에너지,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자 연대. 2부는 역사 - 특히 프리모 레비를 필두로 한 '증언의 역사'가 이어진다. 3부는 '타자의 고통과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교육, 교양, 예술을 되짚어본다. 직접적인 화두가 무엇이든 책 어느곳을 펴나 '고통'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적어도 이 책에서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보고 껴안고 가야하는 '동반자' 혹은 '스승'이다. 어떤 위선이나 가식 없이 '인간은 어쩔수 없이 고통을 통해 더 많이 깨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서경식 교수의 '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은, 한국어로 진행되는 대담에서 미묘한 의사전달을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상적으로 지나갔을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예로 프롤로그에서 '뜻'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느라 네 페이지 가량을 쓰는데 이런 '제동장치'는 나같이 둔감한 독자에게 단어의 숨은 의미에 대해 곱씹을 기회를 준다. 초반에 서경식 교수는'외부'와 '내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대담이 진행되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차츰 모호해져 절대적 '내부'의 이미지는 허구라는 데 까지 이른다. 대담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신뢰 - 어떤 주제든지 주의깊게 듣고 성의있게 답하는 -는 더욱 깊이있고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것이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않을까.

물론 이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깜냥이 안되서 도무지 소화하지 못하는 내용도 있고,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아쉬운 것은 '대담'이 가질 수 있는 '치열한 공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곳곳에 상대 의견에 대해 다른 견해를 펼치는 부분은 많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책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김상봉씨에겐 '서승,서준식'이란 이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대의 상흔이자 어떤 고통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성의 숭고함'의 상징이었기에,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쓰는 서경식씨가 '걸어다니는 철학적 철학적 문제'일만큼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나같이, 서경식씨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그런 존경심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한가지. 함석헌 선생의 글이 많이 인용되고, 또 일종의 근거로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마찬가지로 함석헌선생의 책 한권 읽어보지 않은 나에겐 극단적으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같은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뭐 이건 내 개인적 소양부족의 문제겠지만. 

대담집이지만 대화의 수준과 깊이에서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정성이 느껴지는 책이다.

* 덧붙이는말로 곳곳에 수록된 사진과 파란색 컨셉이 맘에 든다. 소장하고 있는 돌배게 책 중에 - 그래봤자 몇 권 되지도 않지만 - 가장 컨텐츠와 부합하는 디자인이지 않나 싶다.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는듯한 장면을 담은 사진들은 '시대적 만남'이라는 대담의 컨셉을 부각시킨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의 장면들처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b 2008-02-2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메일링리스트를 받았는데, 독자추천에 제이드 님 후기가 있길래.. ^^; 축하드립니다~

Jade 2008-02-22 00:27   좋아요 0 | URL
어머 정말 제 글이 있었네요 ㅎㅎ 축하는요 무슨 ^^;;
 
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이런 소리를 들은적이 있다. "가운입고 일하는 사람 - 의사, 성직자, 법관 - 은 자신의 인격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땐 끊임없이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선비'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인격을 파는(sell)" 이미지가 떠오른다. 요즘은 어릴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신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훈계를 들으니, 스스로를 '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여기는 것이 딱히 이상할 일도 없겠다. 하긴 150여년전에 쓰인 공산당 선언에서도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경외의 직업 -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 들조차 부르주아지의 유급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김앤장은 하나의 권력 ㅡ 저자들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나처럼 시사에 무지한 사람은 그 이름조차 생소한. 다행히 최근 국세청에서 김앤장 조사한다고 신문에 오르내리니 그 신성한 이름이 조금 세속화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국세청 출신 유명 인사들이 김앤장에 몸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신성함'이 얼마나 타락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조금 엇나간 말이지만 흔히 하는 말중에 "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다"라는 말을 들을때마다 쓴웃음이 나온다. 여태까지 역사에서 '지식'이 중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차라리 '지식상품기반사회'라고 하는것이 더 솔직하겠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김앤장 사람들은 참 자신의 상품가치를 잘도 높이는, 전형적인 부르주아구나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난해한 법조문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고 심지어 친절하게 법률 작성 및 개정에 자문도 해주시고. 몇년 혹은 몇십년 동안을 법과 씨름해온 수재분들이니 오죽하시겠나. 적당한 시기에 세금내서 받은 표창 덕분에 세금문제를 피해가는 '수준'은 일도 아니겠지. (이번 국세청 조사와 삼성특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설마'가 '역시'가 될지, 혹은 그 반대일지)

이 책은 그리 얇지도 않은데(약 270페이지) 왠만한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무언가 '특별한 재미'를 원한다면 한번 읽어보시라. 김앤장 대표이사 김영무 변호사는 운현궁 영로당을 사적으로 소유한 비범한 인물이다. 김앤장은 스스로를 '반드시 이겨야 하는 소송에 처한 고객이 제일 먼저 선택하려고 하는 법률사무소'라 칭한다. 그런 자신감의 출처가 무엇인고 하니 내로라 하는 전직 고위직 관료들이 자문위원에 포진해 있다. 아예 김앤장과 정부부처직을 번갈아 하는 사람도 있고. 이거 원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 더 황당한 건 공정위에 있으면서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과징금을 부과한 한 의원이 몇달 후 MS대리인인 김앤장에 입사. 필요하면 쌍방대리도 문제없음. 불법이라고 문제되면? 문제제기가 처벌로 이어지진 않는데 무슨 상관. 변호사윤리규정쯤은 무시해주는 센스. 이정도면 만능 해결사 '제이슨 본'보다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물론 그건 허구고 이건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 현실이란게 다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럼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이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은 다 양심이라곤 조금만큼도 없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다"는, 속된 말로 "김앤장 죽이기"인가? 김앤장의 화려한 전적을 살펴볼수록 이건 특정 집단/특정 개인의 양심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 책을 읽고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이, 만일 자기 친인척이 김앤장 소속이어도 그렇게 분노할까? 혹은 자기에게 이런 기회가 온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부할 것인가? 김앤장은 철처히 고객의 이익 - 그리고 이어지는 고액의 수임료에 충실한 집단이다. 똑똑한 머리를 이용해서 놓치기 쉬운 법률의 구멍을 쏙쏙 잘 찾아내는 것일 뿐. 김앤장이라는 특정 실체에 분노하기 전에, 모든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현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돈 많고 똑똑한, 혹은 출신성분이 좋은 1%를 위해 돌아가는 현 상황에 대해. 그 1%에 들어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나머지 99%에 대해 고민해야하지 않나. 소버린에 400% 수익률을 보조해 준 김앤장을 욕하기 전에, 한때 높은 수익률로 열풍을 일으켰던 주식/펀드 수익의 원천이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물론, 김앤장은 단순한 '변호사 집단'을 넘어 이미 하나의 거대한 권력체이기에 김앤장에 맞선다는 건 충분히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책 마지막에도 나오듯 김앤장은 우리사회 모두의 문제다.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대해 맞서는 것,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저항하는것은 인간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워낙 사는게 힘들다보니 당장 내 일이 아닌것에 대해 둔감해지는건 어쩔수 없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과 체념이야 말로 저들이 가장 좋아하는것이 아니던가. 너무도 쉽게 '주체적'이란말을 남발하지만 스스로 주체가 된다는 건 한편으론 끊임없이 싸운다는 의미다.

 덧붙이자면 이 책의 내용은 KBS<시사기획 쌈>에 방영되었던 내용과 크게 차이가 없다. 1년정도의 차이가 있어 추가된 내용도 있지만 김앤장의 중요한 업적(!)은 대동소이다. TV에도 방영되었는데 1년동안이나 김앤장 이름도 모르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아직 김앤장이 생소하신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이나  TV방영분에 30분만 투자하시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마니타스 2008-03-11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법률사무소 김앤장』 저자 간담회가 3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서교동에서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블로그에 들려서 신청해주세요. 광고성 댓글을 남겨서 죄송합니다.

http://blog.naver.com/humanitas1/30028666122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부터 내게 '박노자'라는 이름은 이미 일종의 키워드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맞다. 단, 그 급진성과 개방성 때문에 한참 어지러울수도 있지만. 2002년 월드컵때 거리에서 환호하던 사람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놀라 얼결에 대열에 참가해 새벽 세시,네시까지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란의 밤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몇 년 뒤 그 뜨거웠던 열기속에서 유사 파시즘적 요소를 캐치해 냈던 - 그래서 감정섞인 비판도 많이 받았던 - 그의 글을 읽으며 아무생각없이 받아들여왔던 일상의 '폭력'들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나면서부터 '대한민국 국민'으로 채색된 우리에겐 일상화된것이, 나중에 합류한 그의 눈엔 이상하게 보이는것이 많았다는건, 여태까지 출판된 그의 '공적문서'들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어떤 기준에선 '폭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관점에 따른 충격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건 쉽지 않고 때론 현기증까지 난다. '일기'라는 형식으로 묶인 이번책은 그 수위가 한층 높다. '시퍼런 날이 섰다'라고 해야하나. 서문에도 밝혔듯이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이기에 내부 검열기준이 대폭 낮아져 민감한 주제들과 날카로운 비판이 툭툭 튀어나온다. 보진 않았지만 비판적인 댓글도 많이 달렸을 듯 싶다. 진지하고 날카로운 댓글들을 같이 수록했으면 재밌었겠다.

'일기'라는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모든 대화는 자기 성찰과 치유의 시작이다. 뭉뚱그려진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생각 정리가 되기도 하고, 가려져 있던 상흔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블로그라는게 자기 자신이 최초의 독자이긴 하지만 타인에게도 개방된 공간이기에 '나'를 넘어 상호 '소통'이 가능한 게 큰 장점이다. 물론 상대방과 나 자신이 모두 의견교류에 있어 진지하게 응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지만. 처음엔 박노자의 신간이 일종의 '일기'라는데 내심 놀랐다. (한창 자본주의, 좁게는 신자유주의의 병폐에 관한 책을 보고 있던 터라) 이젠 지식인의 '일기'까지 일종의 상품이 되어버렸구나 하는 마음에. 하긴 '튀는' 생각들을 마음껏 드러내놓고 토론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책은 자꾸 출판되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류의 자극은 좀 정기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다보면, 사소한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박노자는 사소한 일상에서 '사회적 의미'를 잘 끄집어낸다. 일기의 상당수가 학회/여행 등으로 잠깐 외국에 나갔을때의 경험들이다. 일본 여행도중 겪은 에피소드에서 성해방을 논하고(p.67), '국제 고려학회'에서의 이루어진 북한학자들의 만남에서, 철저히 내면화 된 국가이데올로기에 좌절한다든지(p.193) 등등.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도 빠지지 않는데 휴대폰 개통 즉시 "상담직원의 친절도를 평가해달라"는 문자에 '친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에 한탄하는 것이나,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오슬로대학 교수들의 총장비판(p.148) 등 수없이 좌절하고 한탄하면서도 부조리/부정의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거두지 않고 줄기차게 비판하는것을 보면 천성적으로 반골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일수록 읽는 사람에겐 흥미롭다. 책 곳곳에서 NL에 대한 직접적/간접적 비판이 나오는데 그 중 재미있는 글 하나.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p.158)"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내용인즉 "국보법으로 먹고사는 기관의 끄나풀들과 일부 극렬 '주체사상' 광신도들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밥그릇을 챙겨주는 셈"이란다. 80년대 태생인 나로서는 NL이나 PD는 구체적인건 알 리가 없고, 민노당이 '일심회' 문제로 분당태세라길래 대체 NL이 뭔지 궁금해서 선배한테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젤 나쁜게 부르주아고, 그 다음 나쁜게 NL이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판들. -_-;;    

가장 마음에 남는 글. "보수가 표를 얻는 비결?(p.136)" 한 인간의 '앎'은 '체험'과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경험에 의한 체득은, 당사자에겐 진실하고 압도적인 '진실'일 테지만 분명 일방적인 측면이 있고 그건 어쩔수 없는 측면이 있다. 베트남 참전으로 장애인이 된 상이군인에겐, "미안해요 베트남"을 외치는 시민단체들이 '때려죽일 놈'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건, 경험하지 않은 사람으로선 어찌하기 힘든 문제다. 문제는 '학습'에 의한 효과. '새마을 운동'을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최선으로여기는 교과서로 학습해 온 사람들에게, 조중동이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이데올로기적 '학습'에다가,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속에서 '돈버는게 제일이다'는 가치를 스스로 체득(!)하는 게 덧붙여지면 정말 할말없다. 소위 SKY에 다니는, 제도권 교육체계하에서 '상위권'이 '입증'된 내 친구들조차 '경제성장을 위해선 도덕성쯤은 없어도 된다'는 논리로 2번을 찍었다는데ㅡ (내가 뭐라고 하든 본인들은 2번 당선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더랬다. -_-;;) 요즘 교육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데 목표가 있나보다. 영어 몰입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하면 영어실력이 늘 것이라고 믿는건지, 혹은 국민들이 영어를 잘하면 잘사는 나라로 진입할거라 믿는건지, 아님 학생들을 점점 더 제도에 순응시키려는 음모인지 대체 알수가 없다.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면서 하고있는걸까. 

 각각의 글은 서너페이지로 짧아서 금방 읽히지만 글 하나하나에 담긴 박노자의 고민들은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붙잡는다. 일전에 인터뷰에에서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것이 글의 사명'이라고 했던 그의 철학이 고스란이 담긴 책이다. 그가 던지는 화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조금씩 진보적으로 변하는 것이겠지. 정말 그렇게 믿고싶다.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렌초의시종 2008-02-0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류의 자극은 좀 정기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오직 부담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박노자의 글을 멀리해왔는데, 요즘에 이르러서는 이 암담한 현실의 원인이 저같은 소심함에도 적지 않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시 한번 박노자와의 재회를 준비해야겠습니다.

Jade 2008-02-05 00:5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 불편함 때문에 박노자가 좋아요

멜기세덱 2008-02-1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카추카, 마이 제이드냥.....ㅋㅋㅋ
한 턱 쏴~~~~~~~ㅎㅎ

Jade 2008-02-16 00:30   좋아요 0 | URL
어머 멜기님 ㅎㅎ 'your jade'양이 멜기님께만 한턱 쏠게요 ㅋㅋㅋ

푸하 2008-02-16 00:35   좋아요 0 | URL
허걱 제이드양 분열중?^^

Jade 2008-02-16 02:24   좋아요 0 | URL
분열이라...하긴 낮과 밤의 제 모습이 좀 다르긴 해요 ㅋㅋ

프레이야 2008-02-1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축하해요~~ 책도 담아갑니다^^

Jade 2008-02-16 12:00   좋아요 0 | URL
어머 혜경님 오랜만이예요 ^^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8-02-1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머지 당선된건가? ^^ 나두 축하.

Jade 2008-02-17 11:49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

순오기 2008-02-18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소개로 책을 사놓고 여기저기 들춰보며 딸이랑 토론하고 있어요.
리뷰는 꼼꼼하게 다 읽어야 올릴 수 있으니... ㅠㅠ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Jade 2008-02-18 15:07   좋아요 0 | URL
따님과 토론하신다니, 왠지 책에서만 보던 바람직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ㅎㅎ 부모이신 알라디너 분들을 뵐때마다, 저도 나중에 저런 부모가 되어야지 하곤 하는데..ㅎㅎ 아무튼 감사합니다 ^^

turk182s 2008-02-2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선배라는분의 말이확께네요,,브루조아담에 나쁜게 NL 이라.사실 브루조아도 나쁘지않아요,,만나보면 좋아요,,ㅋ 교양머리도있고 ,--노자샘이 최근들어 점점 좌익틱하게 변하고 있죠,,첨등장할때는 거의 반유교주의자 비슷했는데 갈수록 반자본주의적 글발을 날리고 있다라는..나랑 나잇살 거의 비슷한데 나보다 더 우리나라를 잘봐요,

Jade 2008-02-24 20:17   좋아요 0 | URL
음...여기서 '나쁘다'라고 말하는게 개인의 인격을 두고 하는말은 아니겠죠
^^ 아님 개인적인 생각 차이일수도 있구요

leeza 2008-02-2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쓰는 일에 신중해지는 요즘인데, 님의 댓글을 보니 왠지 가벼우면서도 경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맘에 쏙 들어요. 박노자 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왠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빠른 시일내에 꼭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서평 감사 감사~

Jade 2008-02-27 22:26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 박노자씨 글 안읽어보셨으면 약간 껄끄러울수도 있겠어요~ 이책은 더욱 날이 서있는 책이라...^^ 전 요즘 일부러라도 글 쓰면서 제 생각을 표현해보려고 애쓰고 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감일기에는 한국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겨냥한 글이 좋더라구요.그 중에서도 종군위안부 문제를 보는 우리 시각에도 칼날을 들이댄 내용- 국민기금을 받은 여성(저는 굳이 할머니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들을 비난하는 정대협 관계자들에게 문제를제기하는 대목-에서 음..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오더라구요.그 내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Jade 2009-02-16 13:00   좋아요 0 | URL
허걱 노이에님이다~ >.<

책을 읽은지 오래되서 말씀하신 부분이 어떤맥락인지 기억이 잘.....;;; 찾아보고 고민해볼게요 ^^;; 질문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31   좋아요 0 | URL
기다리겠습니다.헤헤헤...

Jade 2009-02-17 01:46   좋아요 0 | URL
^^;;;;; 노이에님의 질문에 답하려니, 떨리는데요 ㅋㅋ

박노자는 "'민족'이라는 이름의 도덕적 린치"라고 표현했었군요. 사실 이 책을 읽을 때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많이 혼란스러워 할 무렵이었어요. 아직까지 저 스스로에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고. 리뷰에 등장한 'NL'하면 거품무는 선배와 대화하며 무의식중에 형성되었는지, 어느순간부터 '민족'운운하는 내용만 보면 저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곤 했거든요. 남의 말을 듣고 흉내내는것은 공허한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걸 느끼면서부터 스스로 생각해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

정대협 관계자들의 논리가 무엇이었든간에 위안부를 비난한것은, 상처의 의미를 모르는ㅡ 상처받은적 없는 강자의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물쩡 넘어가고싶은 의도를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같이 싸우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지 피해 당사자에게 그 의무까지 강요하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이 겪은 고통의 의미와, 그 행위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참 그럴듯해 보이지만 평범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특히 위안부 문제처럼 삶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경우에는 말입니다. 게다가 다른 성폭력 피해여성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위안부만큼은 민족문제로 보고 싶어하는 시각은,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도구'로 활용하는듯한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너무 비약인가요? ^^;)

사실 저는 그 다음 부분때문에 더 흔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 위안부 관련 문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은 늘 "그들은 성매매 여성이 아니었다, 강제로 끌려갔을 뿐이다"라는 부분을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성매매 여성'을 지금까지도 얼마나 멸시하고 차별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위안부들이 '정당한 피해자'가 되자면 '몸을 파는 여자'와의 차이가 거듭 확인돼야 한다 << '환향녀'에서 '환향년'이 되었던 종군 위안부, 혹은 미군부대 주위의 '양공주'들에게 자발적 수치심을 강요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그들을 '우리의 순결한 언니/누나'로 승격시키는 이상한 사회라니요. 아무 의심없이 '순결한 우리 누이를 앗아간 일본'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 막상 포르노나 매춘은 일종의 '권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두려워졌었지요.

가부장제 사회는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문제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즉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 ㅡ '사유재산권' 침해 ㅡ 로 규정한다는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우리민족은 '남성'의 민족이고 '위안부'는 '성'이라는 사회적 자원/소유물을 빼앗긴 데서 오는 울분이라고 표현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좀 민감합니다...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고...어쨌든 다듬어지지 않아서 제가 써놓고도 횡설수설 같네요^^;;)

얼마전 파란여우님 리뷰 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노이에님덕에 다시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2009-02-15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군 위안부 문제는 90년 이후에야 공론화되었지요.그전에는 더럽혀진 여인들이라고 해서 감히 나서지조차 못했으니까요.하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에서 그들을 보는 눈은 가부장적 민족주의에 갇혀 있으니 바로 jade님이 지적하신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전통이니 민족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 속에 숨은 성차별적 요소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아직은 약하다고 봐야죠.
국민기금 돈을 절대 받으면 안된다는 기류와 함께 정신대 여성들끼리도 분열되어 버렸습니다.이걸 잘 추스려야 하는데...받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해버리고 정대협 역시 그런 식으로 나가니까,참...국민기금 측에선 일본의 혁신계 지식인들도 상당히 참여했기 때문에 일본우익의 책동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없고 당시 참 어지러웠지요.
병자호란이 끝나고 일명 환향녀들의 처리를 놓고 더러운 년이라면서 집안에서 안 받아들이려는 일이 많이 생겨 인조가 직접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답니다.
정신대 여성들의 회고를 받아 적은 책을 보면 기막힌 사연이 많죠.읽다 보면 겁나게 불편해집니다.

2009-02-17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9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제목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가 떠올랐다. 자신이 추구하던 것엔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을 쏟아부으며 奇人의 면모를 과시하던, 허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들. 무언가 큰 일을 해내려면 그들같은 '狂'이 필요하다 부추기는 책이었다. 허나 이 책은 시대를 잘못 탄 불운한 천재라기보단 시대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천재에 가깝다. 첫장부터 히틀러나 푸셰같은 '악당'들이 등장하는게 심상치 않다. 적어도 이 책의 주인공들은 똑똑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해 뭇 사람들을 주눅들게하는 '교과서적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신의 광기에 몸을 불살라 시대를 휘저은 '반동가'들이다.

정치, 문학, 철학을 가로지르는 총 아홉 '광인'이 등장한다. 아돌프 히틀러, 세르게이 네차예프, 조제프 푸셰(정치), 장-자크 루소, 나쓰메 소세키, 프란츠 카프카(문학),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철학). 솔직히 네차예프나 푸셰, 소세키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낯선사람(?)들이고 다른 이들조차도 교과서 혹은 다른 책들에서 간간히 인용되는 것만 보아왔을 뿐 생존 당시의 상황이나 그들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는 아는바가 없었다. 이 책은 여느 평전처럼 당시 정치적/사회적 상황속에서 주인공들의 대외활동/업적에 대해 일대기 식으로 서술하지만 인물의 행적에 대해 차가운 비판도 서슴치 않는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중요한 관계를 맺었던 타인의 사진까지 배치해 놓은것도 재미있다.

이 책의 성격은 딱, 대중적이다. 문학적 필체로 한 인물이 풍기는 이미지에 대한 묘사 및 비유로 시작해서 크고작은 사건들을 나열하며 딱딱하지 않게 풀어나가기에 쉽게쉽게 읽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처음 책을 집었을 땐 두툼한 두께(대략 손가락 한마디 정도?)에 하드커버까지 합세해 퍽 부담스러웠지만 정작 쪽수는 400페이지 정도.(개인적으로 갱지 느낌이 나는 거친 종이를 별로 안좋아한다. 들고다니긴 가볍지만 괜히 부피만 커져 '뻥튀기'의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 사족을 붙이면 빨리 읽히는 책은 읽을땐 좋지만(이번달 읽은 도서 목록에 한권 추가했다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유로) 막상 읽고나면 무언가 허전한 느낌. 머리를 끙끙 앓으며 힘들게 읽어나간책은 (가끔은 졸리기도 하고 물론 그러다 한계를 느껴 반쯤 읽고 다시 덮어두기도 하지만) 뿌듯하고 없던 애착까지 생겨 괜히 참고목록의 책들을 찾아 보관함에 추가하는 요란을 떨기도 한다.

평범한 둔재들의, 때로는 당대의 석학들에게까지 끊임없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스스로는 불행했다는 '흔한'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최고에 자리에 오르는 '자수성가'신화는 종종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높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의 내면에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곤 한다. 모두들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일정정도 이뤄냈지만 정작 삶을 온전하게 살아냈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말년의 푸코를 제외한다면 - 죽기 직전 푸코는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 진정한 주체라고 주장했다. 에이즈로 죽어가면서도 자기 삶을 돌보는, 즉 인생 전체를 예술품으로 만드는 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내면에 극단의 공포와 파괴의지로 가득했던 히틀러나 실제 삶에선 미숙한 어린아이 같았던 루소, 자기혐오에 같혔던 소세키, 죽음이 일종의 탈출구였던 카프카 등등...생애 초기부터 붕괴된 자기 이미지로 인해 표출된 극단의 광기로 인류사에 한 획을 그었을진 몰라도 인격의 통합성 측면에선 영 꽝이다. 이런면에서 본다면 천재들을 만드는 건 지능의 과잉이 아니라 무언가의 '결핍'이다.

"...이 책의 주제는 '천재'나 '광기'와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한계상황에서 자신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려 햇던 사람들, 불행한 의식을 견딜 수 없어 끝 모를 위험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속성이 광기이고 천재였을 뿐이다. 여기서 천재는 광기 안에서 솟아오르며, 광기는 천재의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광기가 없었더라면 천재성도 없었을 것이며, 천재가 아니었다면 광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광기는 한계체험까지 자신을 몰아갔던 내적인 충동의 다른 말이다.." (p.13~14)

천재들의 비상한 열정에 자극받고자 열었던 책인데 도리어 음산하고 핏물이 밴 듯한 인간의 '광기'만 잔뜩 떠안고 나온 기분이다. 대중들은 천재의 화려한 카리스마에 열광하지만 그들 역시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광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얼마나 자신의 삶 속에 통합시키느냐는 개개인의 문제고, 또 사회에 따라 표출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한국인이 지은 책이지만 정작 한국인 주인공은 없다. 그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인지 혹은 마음껏 광기를 표출하기엔 사회자체의 광기가 너무 짙었던건지. 어쩌면 여기 주인공들의 광기는 현재 지구 곳곳에서 집단으로 표출되는 광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이 망상에 시달리면 광인이라 부르고 집단이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부른다'는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11-0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나 이거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갠적으로 고명섭을 좋아해서.

Jade 2007-11-09 01:20   좋아요 0 | URL
아 네..ㅎㅎ 그냥 지하철 오가며 읽기 좋은 책 같아요 흥미있고 ㅎㅎ

2007-11-09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9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9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0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6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6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6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카추카^^;;

Jade 2007-12-16 20:18   좋아요 0 | URL
어머나, 감사해요 멜기세덱님 ㅎㅎ 저도 멜기님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