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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평점 :
언젠가부터 내게 '박노자'라는 이름은 이미 일종의 키워드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맞다. 단, 그 급진성과 개방성 때문에 한참 어지러울수도 있지만. 2002년 월드컵때 거리에서 환호하던 사람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놀라 얼결에 대열에 참가해 새벽 세시,네시까지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란의 밤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몇 년 뒤 그 뜨거웠던 열기속에서 유사 파시즘적 요소를 캐치해 냈던 - 그래서 감정섞인 비판도 많이 받았던 - 그의 글을 읽으며 아무생각없이 받아들여왔던 일상의 '폭력'들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나면서부터 '대한민국 국민'으로 채색된 우리에겐 일상화된것이, 나중에 합류한 그의 눈엔 이상하게 보이는것이 많았다는건, 여태까지 출판된 그의 '공적문서'들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어떤 기준에선 '폭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관점에 따른 충격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건 쉽지 않고 때론 현기증까지 난다. '일기'라는 형식으로 묶인 이번책은 그 수위가 한층 높다. '시퍼런 날이 섰다'라고 해야하나. 서문에도 밝혔듯이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이기에 내부 검열기준이 대폭 낮아져 민감한 주제들과 날카로운 비판이 툭툭 튀어나온다. 보진 않았지만 비판적인 댓글도 많이 달렸을 듯 싶다. 진지하고 날카로운 댓글들을 같이 수록했으면 재밌었겠다.
'일기'라는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모든 대화는 자기 성찰과 치유의 시작이다. 뭉뚱그려진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생각 정리가 되기도 하고, 가려져 있던 상흔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블로그라는게 자기 자신이 최초의 독자이긴 하지만 타인에게도 개방된 공간이기에 '나'를 넘어 상호 '소통'이 가능한 게 큰 장점이다. 물론 상대방과 나 자신이 모두 의견교류에 있어 진지하게 응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지만. 처음엔 박노자의 신간이 일종의 '일기'라는데 내심 놀랐다. (한창 자본주의, 좁게는 신자유주의의 병폐에 관한 책을 보고 있던 터라) 이젠 지식인의 '일기'까지 일종의 상품이 되어버렸구나 하는 마음에. 하긴 '튀는' 생각들을 마음껏 드러내놓고 토론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책은 자꾸 출판되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류의 자극은 좀 정기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다보면, 사소한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박노자는 사소한 일상에서 '사회적 의미'를 잘 끄집어낸다. 일기의 상당수가 학회/여행 등으로 잠깐 외국에 나갔을때의 경험들이다. 일본 여행도중 겪은 에피소드에서 성해방을 논하고(p.67), '국제 고려학회'에서의 이루어진 북한학자들의 만남에서, 철저히 내면화 된 국가이데올로기에 좌절한다든지(p.193) 등등.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도 빠지지 않는데 휴대폰 개통 즉시 "상담직원의 친절도를 평가해달라"는 문자에 '친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에 한탄하는 것이나,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오슬로대학 교수들의 총장비판(p.148) 등 수없이 좌절하고 한탄하면서도 부조리/부정의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거두지 않고 줄기차게 비판하는것을 보면 천성적으로 반골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일수록 읽는 사람에겐 흥미롭다. 책 곳곳에서 NL에 대한 직접적/간접적 비판이 나오는데 그 중 재미있는 글 하나.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p.158)"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내용인즉 "국보법으로 먹고사는 기관의 끄나풀들과 일부 극렬 '주체사상' 광신도들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밥그릇을 챙겨주는 셈"이란다. 80년대 태생인 나로서는 NL이나 PD는 구체적인건 알 리가 없고, 민노당이 '일심회' 문제로 분당태세라길래 대체 NL이 뭔지 궁금해서 선배한테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젤 나쁜게 부르주아고, 그 다음 나쁜게 NL이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판들. -_-;;
가장 마음에 남는 글. "보수가 표를 얻는 비결?(p.136)" 한 인간의 '앎'은 '체험'과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경험에 의한 체득은, 당사자에겐 진실하고 압도적인 '진실'일 테지만 분명 일방적인 측면이 있고 그건 어쩔수 없는 측면이 있다. 베트남 참전으로 장애인이 된 상이군인에겐, "미안해요 베트남"을 외치는 시민단체들이 '때려죽일 놈'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건, 경험하지 않은 사람으로선 어찌하기 힘든 문제다. 문제는 '학습'에 의한 효과. '새마을 운동'을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최선으로여기는 교과서로 학습해 온 사람들에게, 조중동이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이데올로기적 '학습'에다가,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속에서 '돈버는게 제일이다'는 가치를 스스로 체득(!)하는 게 덧붙여지면 정말 할말없다. 소위 SKY에 다니는, 제도권 교육체계하에서 '상위권'이 '입증'된 내 친구들조차 '경제성장을 위해선 도덕성쯤은 없어도 된다'는 논리로 2번을 찍었다는데ㅡ (내가 뭐라고 하든 본인들은 2번 당선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더랬다. -_-;;) 요즘 교육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데 목표가 있나보다. 영어 몰입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하면 영어실력이 늘 것이라고 믿는건지, 혹은 국민들이 영어를 잘하면 잘사는 나라로 진입할거라 믿는건지, 아님 학생들을 점점 더 제도에 순응시키려는 음모인지 대체 알수가 없다.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면서 하고있는걸까.
각각의 글은 서너페이지로 짧아서 금방 읽히지만 글 하나하나에 담긴 박노자의 고민들은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붙잡는다. 일전에 인터뷰에에서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것이 글의 사명'이라고 했던 그의 철학이 고스란이 담긴 책이다. 그가 던지는 화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조금씩 진보적으로 변하는 것이겠지. 정말 그렇게 믿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