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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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이름을 알게된 건 순전히 노벨문학상 덕분이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노벨문학상에 그리 관심이 많았던건지, 단지 불황 탓인지 인터넷 쇼핑몰마다 르 클레지오 타령이라 얼결에 몇 권 사 들였다. 구간인 책들은 거의 반값에 팔기도 하더만 이 책은 절판되고 새로 출간된 '신간'인 탓에 몇달간 침만 바르고 있었더랬다. 신간 소설을 사기엔 뭔가 아까웠던 탓에. 이럴땐 가끔씩 술 마시고 질러주는게 필요하다. ^^ 덕분에 보관함에 갇혀있던 신간들이 뭉텅이로 탈출 성공.

'황금물고기'나 '우연'의 주인공처럼 이 책의 주인공도 어딘가 신비한 소녀다. 자연 - 다른 생명과 교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결코 기죽지 않는 당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리고 뼛속까지 자유로운 소녀. 그들에게 도시/도시사람들은 생명력을 잃은 무미건조함, 숨막힐듯한 답답한 감옥들이다. 그들은 언제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고, 그렇기에 더욱 다가오는 순간들에 몰입할 수 있다. 과거/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는 자유로움.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생명력.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들처럼 나도 자질구레한 일상의 고민따윈 잊어버리고 무언가게 홀릴 수 있을까? 몇시간이고 웅크리고 앉아서 바람의 노랫소리, 파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

르 클레지오의 문체는 '펜카메라'라는 평을 듣는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은 듯 객관적인 서술로서 묘사하지만 일상의 눈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그려낸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확실히 그의 문장은 짧고 건조하다. 물이 뚝뚝 듣는듯한 직접적인 감정표현은 거의 없고 대부분 감정을 '묘사'해낸다. 마치 막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현재시제는 '묘사'의 느낌을 더욱 살려준다. (이 책은 주인공 '랄라'의 현재 이야기와, 수십년 전 '문명인'들에게 말살당한 그녀 부족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랄라 이야기는 전부 현재시제고, 그녀 조상 이야기는 일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과거시제다.) 무심한듯한, 하지만 세세한 묘사를 더듬다 보면 어느새 장면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몽환적인 분위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들어도 좋을듯한.

랄라의 조상은 청색 인간. 몇 달 동안을 사막에서 지내도 배고프거나 목마른 표정이 없는, 사막의 태양에 화상을 입지도 않는 투사들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약속한 땅을 향해 시작도 끝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하나 둘 씩 스러져가는 부족들. 꿈속에서처럼 나타나고, 꿈속에서처럼 사라진 그들. 사막에서 태어난 랄라는 사막 한가운데서 거센 모래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문명인들은 사막의 유목민을 내쫓고 사막을 정복하지만 도시 속 문명인들은 더이상 생명력이 없다. 쫓기듯 도시로 흘러든 랄라는 습관처럼 그들의 생활에 적응하지만 이내 미련없이 사막으로 떠난다. 그녀 눈에 비친 도시인들은 삶을 잃은 노예들일 뿐이다. 랄라가 내뿜는 충만한 생명력에 홀리듯 빠져드는 사람들.

타고난 유목민 하르타니 역시 멋진 캐릭터다. 인간의 말을 모르지만 사막의 생명들과 소통할 수 있는 목동. 그와 랄라는 눈빛으로 소통하고 침묵으로 충만해진다. 랄라와 하르타니의 사랑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다.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 없이도 충분히 그 떨림이 전해져 마음한쪽이 설레고 따뜻해진다. 르 클레지오 소설(황금물고기, 우연)에서 묘사되는 사랑-섹스 장면은 늘 조금은 신비스럽고 몽환적이다. 끈적이는 단어 하나 없이. 귀에 감겨드는 달콤한 음악처럼. 사막 한가운데 나란히 누워, 쏟아지는 별빛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소년과 소녀. 말하지 않아도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감정들.

광활한 자연속에 내던져진 사람들. 정복하려고 하지도 않고, 정복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순응하며 오히려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도시속 현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소통 방식들. 이런 류의 글을 읽을때마다 현대인들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생각한다. 죄인의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는. 판타지 같은 몽환적 분위기에 빠져드는 건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어떤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충만한 삶에 대한 그리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찾지 못할 삶에 대한. 언제든지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엔 너무나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한 탓에 오늘도 우리는 꿈을 꿀 뿐이다.

우리에게 '사막'이란 단어가 '모든것이 메말라 버린 불모의 땅'인 까닭은, '문명인'들이 정복하지 못한, 결코 정복되지 않을 자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막이 잉태한 생명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충만한 힘의 원천이다. 랄라에게 사막이 그러하듯이...오늘도 우리는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죽이며 살아가게 될까? 

 

사족 : 처음 받아들땐 별로 못느꼈는데. 다 읽고 덮을땐 유난히 표지가 거슬린다. 어딘가 "뽀뽀뽀"스러운 분위기랄까. 이 책에서 그려지는 사막과 소녀, 그리고 태양 혹은 달-빛은 무언가 신비하고 경건한 '생명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표지는 너무 발랄하잖아. 이건 사막이 아니라 무슨 '세트장'에 큰 백열전구를 설치해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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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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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은게 언제였더라...아마 대학 1학년이었을 거다. 소위 "대학생 권장도서 100선"류에 드는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던 그때..^^ 그때 '읽어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집어든 책들은 지금은 내용조차 가물가물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읽었던건지...'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던것 같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글쎄...그다지 강렬했던것 같지 않다. 솔직히 그땐 유난히 긴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별로 비슷하지 않은 애칭들을 매치시키기도 힘들었다. 감정이입이 전혀 안되었으니까...소설을 읽으면서 인생의 여러 면들을 간접체험한다고들 하지만 그 반대 역시 성립하는것 같다. 적당한 경험들이 있어야 온전히 글에 몰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착한 인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그때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뭔가 우울하고 기분나쁜, '부적격자'들을 엿보는 것 정도였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그래, 나중에 이런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줘야지!"라고 철없는 다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Notes from underground"라니! 번역본 제목도 "지하생활자의 수기/지하로부터의 수기" 두가지다. underground라는 단어가 가슴속에 콕 박힌다. 나는 밝은 사람이 좋다. 하지만 어딘가 어두운 사람은 더좋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 하지만 어딘가 꼬인 사람이 더욱 매력적이다. 그건 내가 어딘가 어둡고, 어딘가 꼬여있기 때문이다. ^^ 이런 류의 타입은 자주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알고보면 스스로를 더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더더욱 꼬여버린다. 완전한 폐쇄형 플러스 피드백 순환계다.

누구나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광기와 자기부정은 그런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 인간에 대해 착한것만, 이쁜것만 보고싶은 소박한 희망사항을 철저히 짓밟는 듯한 우울한 캐릭터지만, 그래서 거부감과 함께 책을 든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얼래? 어쩐지 입술 사이로 묘한 미소가 지어지는 거다. 뭐야, 나 어느새 감정이입 된거야? 자기모멸감의 연쇄고리에 빠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의 물고 물리는 생각의 흐름이 낯설지 않다. 아, 그래 그기분 뭔지 알겠어. 근데 아저씨. 당신 너무 심한거 아냐? 이렇게 위로라도 할라치면 오히려 그 손에 침이라도 뱉어버릴 태세다. ^^ 철저히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겨우겨우 연명해가는 궁색의 극치지만 더러운 성질은 필수다.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근데 묘하게 끌린단 말야. 따듯하게 감싸주거나 위로해주고 싶은게 아니라. "그래,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살아. 비웃음 잃지 말라구!" 말 한마디 툭 던져보고 싶은.

갑자기 '미쓰 홍당무'의 대사가 떠오른다. "너 착하게 살지마. 열심히 살지도 말고. 그럼 사람들이 너 무시해." 그리고..."세상이 공평하다는 환상을 버려. 우리같은 사람은 더 열심히 살아야 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말할때, 늘 판에 짠 듯 긍정적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인간의 모습은 분명 감동적이다. 하지만 누구나 희망을 찾을 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래야 할 '의무'도 없고...'악당' 혹은 '악'에 묘한 매력을 느끼는 건 누구나 가슴에 조금씩은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대사 한마디.

"나는 확신한다ㅡ 인간은 진짜 고통을, 다시 말해서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고. 고통 ㅡ 이것이야말로 자의식의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나는 이 수기의 첫머리에서 자의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그 불행을 사랑하여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있다."

어디로은 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 일체의 계획을 몽땅 어그러뜨릴 수 있는 잘난 자의식 덕분에 '행복의 가능성'만큼이나 '고통의 가능성'도 늘 열려있다. 인간이 매력적인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페이지를 펴도 음습하고 뒤틀린 주인공의 성격이 배어내오지만 이게 또 매력인지라 쭉쭉 읽어내렸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음습한 취향이었지?  두어시간을 주인공의 너절한 자기비난과 조소, 악담, 악의에 찬 주절거림에 푹 빠져있었지만 전혀 기분나쁘지 않은걸. 아마 자기 자신을 물어뜯는것에서 그쳤기 때문이겠지....주인공이 뭔가 잘난 사람이어서 주위의 약자들을 파멸시키고도 히죽거리는 그런류의 인간이었다면 책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약자'에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통받는 쪽에 감정이입 되었을 테니까...다행스럽게(?) 이 주인공은 "남을 모욕할 계획을 짜다 어느순간부터는 실컷 자기를 조롱하고, 복수를 시도하더라도 상대방보다는 자기 쪽이 1백배나 고민할 것이며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있는"인간이다. 공격대상의 최우선에 자기가 있는, 약해빠진, 못난 사람. 못나고 못나서 끊임없이 추락하는, 그러면서도 성깔만은 죽이지 않는.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옮긴이 후기에 보면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는 평이 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극단의 고난을 다 겪어낸 개인적 경험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음습한 캐릭터들의 밑바탕이 되었겠지. 다른 글들이 보여주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제불능 성격파탄자다. 같이 산 여자들이 불쌍하지만....그래도 그가 전혀 밉지는 않은거다. 물론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루도 못견디고 도망갔겠지만 ^^  어쨌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풍겨나온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한아름이건만, 다른 소설들이 궁금해 냉큼 질렀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다시 읽으면 이번엔 '전율'을 느낄 수 있을까? ^^ 이번엔 왠지 감정이입이 잘 될것 같단 말이야...풋

책도 인연이다. 준비없이 덜컥 가을을 보내나 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더욱 음습한(?) 겨울을 맞이해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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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2-02 0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유난히 임팩트가 강했던 작품이에요. 짧아서 더욱..
특히 왼쪽 귀 오른쪽 귀와 맨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귀 언저리가 울리네~
드디어 도선생의 세계로 들어오셨구료~~

나는 죄와벌이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보다 <악령>을 더 권합니다. 앞의 두 소설이 패키지 여행상품이라면 <악령>은 제주 올레라고나 할까. 인간적 감화는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악의 심연이나 어두운 구석, 선을 가장한 악의 원형다운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고 도 선생의 포인트가 아닐까 하네요. 더군다나 더 매력적인 것은 <악령>이 미완성 작품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실제로 작품 계보상에는 <악령>-<까라마조프>, <지하생활자>-<죄와벌> 요렇게 연결된다지요 ㅋㅋ 독서목록표 정리 해줬당 ㅋㅋ

Jade 2008-12-02 11:57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백치 읽고 악령 읽다가 시험보느라 잠시 보류중...ㅎㅎ
 
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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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제국'이라는 이름은 미국이든 일본이든 남의 이름일 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되었던 식민지로서의 기억 또는 현재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에 대한 반감 ㅡ 혹은 동경. 20대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표를 붙여주었던 우석훈 박사가 이번엔 약소국 대한민국에게도 '제국'이라는 찬란한 이름을 수여하시니, 이름하여 '촌스러운 제국'이다.   

이 책은 '한국경제 대안시리즈'인데 갑자기 왜 제국타령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이란 단어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압제자를 떠올리겠지만 사실 '제국'은 자국의 경제적 풍요를 위한 지극히 '합리적인'선택의 결과물이다.  해외시장진출 - 세계속의 한국 운운하는 것들이 사실은 타국을 이용해 자국의 부를 늘리겠다는 지극히 '제국적' 발상이라는 것. 하지만 장밋빛 미래에 대한 꿈만큼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뭔가 해보려고는 하지만 뱁새가 황새따라가는 꼴이다. 한미FTA에 대한 순진한 꿈도 그렇고. 어쨌든 이 책이 경고하는 건 그런 어설픈 제국주의 자체가 아니라 현 상황이 지속되었을 시 필연적이라 예상되는 한중일의 충돌이다. 독자를 현 10대 혹은 20대 초반으로 설정한 것도 향후 전쟁-평화는 그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나.

일반 대중을 타겟으로 한 우석훈 박사의 글은 언제나 명랑하다.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라 그런지 엄숙한 도덕주의나 권위로 포장하지도 않고, 전문 용어들로 주눅들게 하지도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로 상황을 설명해낸다. 하지만 뻔한 얘기는 절대 아니고 88만원 세대도 그렇고 이 책 역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기 싫었던 부분들을 콕콕 집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나의 불행이 끝나면 더 큰 불행이 찾아온다" 는 불행시리즈를 모티브로 기획했다는 이 시리즈엔 '호러 경제학'이란 별칭도 붙었다나.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 불행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냥 덮어두거나 외면하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 불행을 상기시키며 변화를 속삭인다. 지난번엔 20대, 지금은 10대에게.

저자가 "자본주의는 식민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출위주의 기형적 구조로 시작한 한국경제는 '내부'만으로 유지될 수 없기에 새로운 '경제영토'개척을 이미 시작했다는 것에서 책은 시작한다. 그러나 한창 세계를 주름잡던 제국들의 능력은 없고 여태까지는 어찌어찌 수도권 중심의 '내부식민지'구조로 버텨왔으나 멀지 않은 미래에 가장 가까운 먹잇감인 북한을 제 2의 내부식민지로 삼아 북쪽으로 진출(?)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중국-일본과 부딪힐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19세기 제국주의의 후발주자인 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전쟁으로 많은것을 잃은 그네들이 여러 제도적 장치로 전쟁을 막고 있듯이 한중일도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한중일의 평화적 경제통합 및 그 시대의 주역이 될 10대들이 '평화'에 대한 파토스를 가질 수 있도록 학생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결론. '전쟁'이 강건너 불구경처럼 와닿지 않는 우리세대에게 이런 경고는 일중의 비유로 들리기 쉽지만 아프리카 석유를 둘러싼 물밑경쟁이나 좌/우를 막론하고 아직도 건실한(?) 민족주의, '수출'이란 이름 뒤에 감춰진 '패권 확보'장치 등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예사롭지 않다. 파병의 이유로 당당하게 '국익'운운하는 판이니, 지금의 불경기가 좀 더 길게 지속된다면ㅡ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해야한다'는 말이 아예 헛소리는 아닐듯 싶다.

이 책의 강점은 얇고-쉽고-재미있으면서 다양한 분야를 건드린다는 것. 사회/정치적 함의를 가진 용어들엔 밑줄을 그어 자세히 설명해 놓으면서도 복잡한 경제이론/상황들을 단순화해서 한줄로 정리하거나 게임에 빗대 깔끔하게 처리한다. 북한과의 경제통합에 있어 인권문제나 경제의 생태적 전환, '외국-특히 중국'과의 국경 방위비를 지적하는것도 좋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삼족오 직인'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이루어진 '제국주의 전환의 초석', 지난 대선후보들의 '제국주의적 공약' 등 무심히 넘겼던 시사적 사안들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를 덧붙여 논지를 이끌고 있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경제학자의 저서지만 대중의 입맛에 잘 맞는다고 해야할까.

이전 책들처럼 이번 책에서도 "계급적 접근"은 거의 없다. '제국주의 혹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국내의 계급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주장도 있기에 '국익'운운하는 부분에선 - 사실 '국익'이란 너무도 명확하게 '특정 계급의 이익'이지 않은가 - 계급적 관점이 나올만도 한데 제국 혹은 민족주의와 연결지으며 현재의 좌우를 비판하는 것에서 그친다.  이중국가로의 전환 - 양극화가 되다 못해 아예 단절된 8자형 경제구조. 저자는 이를 '양극화'가 아니라 '중남미화'라 부른다. - 도 사회 전체의 증오지수가 높아진다는 측면으로 접근한다. 여차여차해서 전쟁이 발발해도 이익보는 쪽은 있게 마련이고 - 결국 현재의 '계급'과 무관하지 않을텐데. 하긴 스스로가 5%가 될 수 있다고 믿는 95%의 88만원 세대에게는 이런 보편적 접근이 더 유효할지도 모르겠구나.

평화 인프라의 바람직한 예로 들고있는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 국가가 지원하는 일종의 교환학생 시스템'이나 1년에 50만원 남짓한 대학 등록금은 현재 한국 대학생들에게 그야말로 '백일몽'이다. "전교조에게 교육을 맡길수는 없습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구호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 선거 - 그리고 공정택 후보를 지지한다던 어느 서울대학생의 글 - 가 지금의 교육 현실인걸. 지금 우리에게 급한불은 '한중일의 증오gauge'가 아니라 당장 우리끼리의 박탈감과 증오가 아닐까 싶다. '88만원 세대'에서도 지적하지만 10대에게 평화의 씨앗을 심고 싶어도 현재의 교육과정으론 택도 없는 소리다. 하여 이번책에서도 '교육 파시즘'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만들어 낼 '총파업'이 등장한다. 언젠가 오프라인 강연회에서 고3들의 '수능총파업'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별로 실현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실현만 된다면 '100만 촛불'보다 백배쯤 더 짜릿한 경험이리라. 물론 아직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은 '파업'이란 단어에서도 빨간 냄새를 맡는다는게 문제겠지만. 

경제학자의 책에서까지 한국경제의 문제로 거론될만큼 대한민국 교육은 이미 '교육'영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부모들의 이기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극우파의 꿈이 결합되어 현재의 교육파시즘이 탄생되었고, 이것이 한국의 내부는 중남미형 경제구조로, 외형은 제국주의형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 지적한다. 원인은 부모세대들에 있는데 결과는 자식들이 뒤집어써야 한다니. (이렇게 말하면 천하의 불효자식이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현 10/20대가 '길러진대로' 순응한다면 똑같이 악질이다. '호러 경제학'이라는 별칭까지 들어가며 끊임없이 담론을 만들어내는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변할 수 있고 ㅡ 그렇다는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리라.

지칠줄 모르는 MB정부의 공권력남용으로 오늘도 젊은 세대들은 21세기에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가능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으니, 이것 역시 귀중한 경험이라 해야 할까? '촛불신화'의 주역인 10대-그리고 20대가, 정당하지 못한 폭력에 저항함과 동시에 잊혀진 사회적 약자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가슴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안의 제국주의-폭력'을 깨닫고 평화로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이 나쁘지많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낙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구나.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이 10년안에 격동의 시기(?)를 겪을거라 예상하는 사람도 있던데, 한중일 전쟁전에 내란(!)을 걱정해야 하는게 아닐지....아니지, 지금의 구조라면 오히려 허물어지고 새로 짜는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느 방향이든 10대와 20대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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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석훈, &lt;촌놈들의 제국주의&gt;, 2008
    from Fly, Hendrix, Fly 2008-09-09 15:42 
    촌놈들의 제국주의 - 우석훈 지음/개마고원 우석훈, 이 시대의 등대 우석훈의 를 시작으로 해서 그의 모든 저작을 읽어왔다. 만 사러가면 된다. 우석훈을 읽기전에 난 확실히 좌파는 맞았고 구좌파가 아닌 신좌파이긴 했지만, 어떤 생각들을 중심으로 내 생각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해야 할 지에 대해서 아무런 감을 잡고 있지 못했다.그러한 점에서 볼 때, 우석훈은 나에게 항상 '좌파가 꿈을 꾸었을 때 그것을 어..
 
 
순오기 2008-08-13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외엔 어려울 것 같아서 잘 접근하지 못하는데~ 그래도 알라딘 덕에 이런 리뷰라도 볼 수 있어 참 좋아요. 책은 못 읽어도 리뷰는 꼼꼼하게 읽고 배웁니다.^^

Jade 2008-08-13 15:12   좋아요 0 | URL
^^ 저도 가끔 알라디너분들 리뷰보면서 대리만족을 얻어요. 오랜만에 쓰는 리뷰라 길기만 하고 횡설수설인데 읽어주셔서 감사 ^^;

2008-08-18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8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바이 클래식 - 조우석의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 음악 이야기
조우석 지음 / 동아시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클래식은 물론이고 모든 음악장르에 문외한이다. 귀도 그리 섬세하지 못한지라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린다든지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껴본적은 커녕 마냥 무덤덤이다. 가끔 틀어놓는 CD들은 감정몰입을 위해서라기 보단 ㅡ 빈 시공간을 채우기 위한 배경음악이다. 하여 이 책에서 늘어놓는 수많은 '명곡'들은 태반이 들어본 적도 없고 - 혹은, 우연히 들었다해도 제목을 몰라 매치시킬 수 없으니 못들은것이나 다름없고 - 원체 음악에 대한 흥미가 없으니 작품에 대한 저자의 비판 - 일례로 슈베르트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클래식이 대책없는 감정과잉이라는 것 등 -에 공감하지는 못했다.  다만 사회적으로 형성된 통념을 깨는것이 재미있었을 뿐.

기존의 권위를 '까는'책들이 늘 그러하듯 이 책도 상당히 도발적이고 - 경쾌하다. 한 때 클래식에 빠졌던 독자에게는 더하겠지만 나같은 '주변인'에게도 '만들어진 권위'를 무너뜨리는 반란은 흥미롭다. 한때 탐닉했던 사람(즉,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신랄한 독설로 '클래식 우상화'에 감춰진 조잡함을 까발리고 그 권위에 기대 먹고사는 관련업종 종사자들을 마음껏 조롱한다. '악보의 재현' - 즉, 기계적 테크닉 - 만을 중시하는 연주풍토나, 듣는 사람을 수동적 구경꾼으로 밀어내는 감상풍토, 자본주의 옷을 입은 '천재마케팅' 에 대한 비판도 시원하다. 

** 생각해보면 기존의 권위를 먹고사는 사람들이 어디 클래식 뿐이겠는가. 과거의 권위에 기대기로는 종교나 한의학계를 따라올 분야가 없다. 심오한(듯한, 그러나 알고보면 의미없는 헛소리에 불과한)용어를 써가며 초보자를 주눅들게 하는 건 그것밖에는 내세울 게 없는 (정신이)빈곤한 자들의 허장성세다.

 하지만 '반란'이라 말하기에는 아직 겉멋이 덜 빠졌다. (MB시대의 물결을 타려는지) 안써도 될 영어형용사의 남발과 화려한 수사, 과장된 비난, 책 전체에서 풍기는 '은근한 교만함'은 딱 중앙일보 느낌이다. (저자가 중앙일보에서 일했고 현재도 그 산하 법인에 있는 것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겐 지극히 '부르주아'스러운 문체다) 일반인을 위한 책이기에 쉽게 쓴다고는 한 것 같지만 나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책을 가득 채운 '음악적 용어/표현'들이 부담(이라기 보단 짜증)스럽다. 실컷 클래식 욕을 하다가 '대안음악'파트로 넘어가서는 침튀기며 극찬을 퍼붓는 것도 황당하다. (서천에 꾸린 임동창의 음악캠프를 소개하는 부분과 임동창이란 개인에 대한 소개 부분은 심지어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풍긴다) 물론 여지껏 다른 음악들을 억눌러 온'클래식의 위세'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ㅡ 오랜 시간을 클래식의 바다에서 허우적댔던 것에 대한 분풀이처럼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 책이 비판하는 건 '클래식'이라는 좁은 분야가 아니라, 클래식이 표준음악이라는 (만들어진)통념의 근간인 '유럽 중심주의'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끊임없이 '타자'를 생산하고 배제시키며 자기정체성을 찾아온 유럽 이성 - 철학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 담겨있다. 아쉬운 것은 과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내는 후대인들의 '신성화 작업'에 대한 비판은 많으나 작품 자체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분석이 없다는 것이다. (17세기부터 모든 세대의 작곡가들은 음악적, 극적 영감을 찾아 동양을 탐구했고 음악적 효과나 오페라/발레의 줄거리, 노래의 가사/분위기 등에 동양적 요소 혹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인식틀이 깊숙이 개입되었다. p.115~124에서는 기독교-클래식-이성이라는 (클래식)트라이앵글 아래  몇몇 영화를 예로 들어 '이성중심주의가 불러온 광기와 폭력'을 이야기하는데 곧바로 철학적 문제제기로 빠져버린다. 이런 부분들에 '작품속의 오리엔탈리즘'이덧붙여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 음악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서인지 철학적 문제로 접근하기도 하고 야만 대 문명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문제의식도 있고 다방면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것저것 다 끌어 모아 '풍성하다'기 보다는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책 마지막에 불쑥 등장하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어쩐지 '삑사리'같다.) 작곡가들에 대한 에피소드나 개인적 경험이 많아 재미있게 읽히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 뒷표지에 적힌 추천서들 중에 '짜릿한 지적/정서적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말이 공허하다.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 나는 귀 뿐만 아니라 뇌도 무감각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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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18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수년간 중앙일보에서 조우석의 글을 읽은 저는 님의 리뷰를 보고 감이 잡힙니다만, 솔직한 님의 리뷰가 더 감동적이에요~~^^
나는 20대 초반 3년을 귀에 클래식을 달고 살았었죠. 그래서 대충 제목과 음악을 연결시킬 수는 있었죠~ 지금은 골든벨에 올라오는 문제는 알아듣는 정도지만.
참참~ 그날 한정식은 드신 거에요? 궁금했는데 이제야 물어봐요.ㅋㅋㅋ

Jade 2008-07-18 10:34   좋아요 0 | URL
^^;; 다행히 저만 느낀게 아니었군요 ㅋㅋ

그날 전통식당은 못가고 택시타고 기사아저씨한테 가까운 한정식 식당에 내려달라고 했어요 ㅋㅋ '가족회관'인가 근처에 내려주셔서 잘 먹었습니다 ㅎㅎ 광주간김에 죽녹원이랑 메타세콰이어길이랑 망월동 등등 갔는데 다니는 길 내내 '광주이벤트'갔었어야 했는데 하고 땅을 쳤다는 후문 ㅎㅎ

순오기 2008-07-20 03:51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그래도 사진으로 광주이벤트를 봐서 좀 도움되지 않았나요?ㅎㅎ
죽녹원, 메타거리, 망월동 갔으면 됐죠 뭐~~~ 다음엔 소쇄원과 식영정등 정자문화 탐방~~~ ^^

2008-07-18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8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7-1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jade님!

Jade 2008-07-18 10:46   좋아요 0 | URL
므흣 다락방님! ^^
 
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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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억압받는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자유를 마다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목숨바쳐 싸워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자유'는 우리가 지켜야 할 숭고한 그 무엇처럼 인식되지만 현대의 개인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자유'라는 말처럼 기득권층의 그럴듯한 논리로 악용되었던 단어가 있었나.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은ㅡ 스스로는 '보편적 자유'라 명명하지만 거의 언제나 선택받은 자들의 자유일 뿐이었다.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J.S.Mill의 '자유론'에도 '미개인'은 아직 자유를 누릴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편견이 스며있다.)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교육" ㅡ 이 책의 주제는 피억압자를 억압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교육이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육은 선생-제자의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 '소통과정'이며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다. 하여 교육자는 절대 '중립적'일수 없다. 현실을 고정불변한 것, 나와 상관없는 '객관적'인 것, 혹은 숙명으로서 바라보는것은 피억압자들을 체념하게 만드는 억압자들의 오래된 술수다. 이 책은 피억압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억압자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 장치에 대해 비판하며 혁명 과정에 억압이 끼어들 여지를 누차 경계한다.

** 주제와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억압자', '피억압자'라는 명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상황의 산물이기에 '억압 하는 자'와 '억압 받는 자'가 더 적절했을 듯 싶다. 미묘한 어감 차이지만 명사는 고착화된 느낌이 강하고 형용사/부사 - 동사의 순으로 변화에 열려있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은 '교육자'들을 위한 책이기에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요지는 민중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들지 말고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 민중을 '위한' 해방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쟁취하는 해방이어야 한다는 것 등.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 마오쩌둥 등 혁명가들의 연설을 인용하여 해방적 상황에서 경계해야 할 점들을 늘어놓는다. 피억압자에게 내면화 된 억압자적 본성을 경계하고 극복하기 위한 과정들이 눈에 띈다. 투쟁 초기에 피억압자들이 '아류 억압자'가 되기 위해 애쓰거나 기존의 억압자를 억압하려 하는 것은 (억압받아온 사람들의 사고로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억압자가 되는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코 해방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이 되기 위해 싸우는 피억압자의 투쟁이, 억압자에게는 억압의 과정에서 상실한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과정이어야 ㅡ '억압'관계를 멋어난 해방과정의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

"피억압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바꿔 말해 인간성을 창조하려는)과정에서 거꾸로 억압자를 억압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되며, 양측의 인간성을 모두 회복하려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억압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야 말로 피억압자의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p.55)

이 책이 쓰인 70년대 중남미는 오랜 군부독재하에서 억압자/피억압자의 구분이 뚜렷하고 대다수의 민중들이 실질적으로 '자유'를 거의 누려보지 못한 상황인지라 '혁명가'들의 역할을 논한 이같은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억압자가 혁명과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그들의 '책임'에 관한 부분은 빈약하다.) 물리적 억압이 상당부분 없어지고 형식적 자유나마 누리고 있는 지금은 억압자/피억압자의 구분이 모호하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억압'에 맞서야 한다. 소위 '자유'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어째서 '보이지 않는 억압'에 순종하는가? 냉정하게 말하면 '억압'은 억압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지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억압에 복종하는 것은 그만큼 교묘해진 기득권층의 술수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자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생동하는 삶이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과업이다.....한 마디로 우리는 인민대중들에게 사회적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돌린다. 우리는 그들이 책임지기를 요구하며, 그들의 무책임함에 맞서 싸운다."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p.316)"  

**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이 어쩔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ㅡ 스스로 복종을 선택한 것이라 말한다. 독일 국민들이 나치에게 속은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고 총통에게 속은 게 아니라 총통에게 복종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대체 왜? (모든 갈등의 뿌리를 性적 갈등으로 보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억압ㅡ 성을 아버지가 독점하는 가부장제 하에서의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 총통에 대한 선망과 복종으로 이어진다는 것.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로, 총통으로 대체하게 하는 이러한 억압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도록, 아버지나 총통, 국가로 떠넘기게 만든다.

7,80년대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독재에 항거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촛불을 들고 미국과 한국 수구세력의 정치경제적 억압에 맞서고 있다. 라이히 식의 표현에 따르면 MB식 리더십에 잠깐 '속아주려던'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속아넘어간 줄 알았던 국민들의 '반항'에 7,80년대를 상기시키는 말돌리기/폭력진압으로밖에 반응할 수 없는 그들 반응의 일관성이란. MB덕분인지 때문인지 정치경제적 탄압, 물리적 국가폭력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표출되는 분노가 단지 '광우병'으로 국한될지, 모든 부당한 억압/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질지의 문제는. 촛불투쟁를 만들어 낸 바로 우리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덧붙이자면, 책 전반에 걸쳐 '혁명적 상황'에서의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혁명'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이질감 때문인지 딱딱 와닿지는 않는다. 교사와 학생의 평등하고 주체적인 관계에 대해서라면 김상봉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사와 학생, 혹은 지도부와 민중의 관계는 김상봉의 '서로주체성'과도 잘 통한다. 덧붙여 김상봉의 책은 '분노해야 할 일 에 대해 분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도덕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김상봉 교수는 학자이면서 적지않은 사회적 활동을 하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많지 않은 지식인 중 한명이기에 프레이리가 말하는 '프락시스'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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