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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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지 한달 정도 지났지만, 그동안 '또 비슷한 얘기겠거니'하고 눈여겨 보지 않던 책이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책은ㅡ 읽는 중에도 소름끼치지만, 읽고난 후의 잔여감도 개운치 않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펼치는 것이 약간은 두려웠었다.   

내가 '삼성'이란 기업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ㅡ 일은 엄청 시키지만 대신 돈은 많이 벌 수 있다는, 세간에 흔한 통념 수준이었다. 애니콜 휴대폰, 삼성 노트북 등이 타 회사에 비해 품질이 좋다는 것. 간혹 외국 영화에 삼성 휴대폰이 나오면, 열광하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성 휴대폰 기술이 좋긴 좋은가 보네" 하며 내심 반가워하는 것 정도.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온갖 비리들이 알려졌을때에도 "한국 재벌들이 다 그렇지 뭐.." 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쉽게 바뀌겠어"하는 체념이 먼저 들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과 뒤이은 삼성 특검은, 그런 체념을 더욱 확신시켜 줄 뿐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비리와 비상식적인 내부사정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만드는 수법이나, 다방면의 고위 인사들을 관리하며ㅡ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삼성왕국'을 만들어 가는 과정들은, 나같은 일반인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머나먼 딴 세계의 이야기들이다. 이미 '상상력'의 수준마저 넘어서는 일들에 대해 더이상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5만명이 모인다는 종합운동장에 사람을 가득 모아놓고 1명당 1억원씩 나누어줘도 5조원인데. 김용철 변호사가 추정한 삼성 비자금의 규모는 10조원쯤 된댄다. 1억원이란 돈도 나에겐 현실적인 돈이 아니라 어떤 '이념적'인 금액에 가까운데, 그 금액의 10만배다. 머릿속에선 계산이 되지만 도무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액수다. 인맥 관리비로 몇천만원, 혹은 몇억원씩 쓰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데. 평범한 사람들에게 '억'단위는 집을 장만하거나 노후 자금을 설계할 때 등 긴 인생계획에서나 등장하는 용어다. 물론 사업하는 사람들에겐 억 단위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천문학적인 액수 자체가 아니라, 과연 무엇을 위해 그 돈들이 모이고, 무엇을 위해 사용되느냐다.

태어날때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자기 노력으로 많은 돈은 번 사람에게, 돈이 왜 그렇게 많냐, 혹은 왜 그렇게 펑펑 쓰냐고 딴지거는 것은ㅡ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로 통용될만한 어법은 아니다. 이건희 일가나 삼성 임직원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펑펑 쓰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푼돈에 벌벌떠는 '평민'들이 배아프고 부러울 순 있어도, 그건 어떤 '도의적인 차원'에서 '자제할 것'를 요청하거나, 돈의 '쓰임새'가 적정한 지 따질 수 있을 뿐이지 '돈 펑펑쓰는 죄'를 물을수는 없는 일이다. 단, 그 돈들이 진실로 자신들의 소유물이라는 증거가 있을 때 말이다. 그런데 그 돈들이 정상적으로 지급되었어야 할 돈을 빼돌려서 만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돈이라면? 그리고ㅡ그들이 만든, 그 소수를 위한 시나리오에 의해 수천만명의 삶의 터전이 좌지우지 된다면?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살린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도 망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한민국'은ㅡ 삼성에게 뇌물 받고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거나 비리를 눈감아주는 일부 집단들을 일컫는 말이었나 보다. 삼성이 대한민국 경제에 어느정도 기여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삼성계열사에 고용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런 절묘한 논리가 나올만도 하다. 그렇다면 삼성이 저지른 수많은 비리와 비자금 조성이 그 수많은 '삼성인'들을 더 잘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다방면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공통된 논리는 "삼성은 이건희 일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 자꾸 불법/탈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삼성의 내부모습은 마치 '이건희 일가'라는 왕족을 지키기 위한 궁정 호위대들의 화려한 무용담 같다. 한번씩 사건이 터질때마다 수뇌부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꿎은 계열사 사장을 구속시키고, 나중에 좋은 자리와 연봉으로 보상해주는 과정들이 주먹세계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책을 읽으면서 엉뚱한 물음들이 자꾸 떠오른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이 책에서 보여주는 삼성 '핵심임원'들은 철저히 이건희일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왜 그들은 '자발적 복종'을 선택했을까? 보상으로 받는 천문학적인 돈 때문이라도 하기에도 왠지 석연치 않다. 아니할 말로 이미 벌만큼 벌었을만한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다른사람 뒤를 수습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걸까. 그저 그런 삶에 익숙해진 탓일까, 혹은ㅡ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어떤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ㅡ 그런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다면, 김용철 변호사를 그토록 괴롭게 만들고ㅡ 스스로 '양심고백'을 택하게 했던 것은, 인간의 무엇 이었을까?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은 '내부'의 일원이었지만 늘 겉돌았다고 했다. '내부'사람들에게 있어 '삼성(정확히는 회장님 일가)'이란 가치는ㅡ의심할수도 없고, 의심해서도 안되는 절대 진리였을까?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도 예전엔 그들의 일원이었고ㅡ 잘먹고 잘 살았으며, 자신은 전사도 무엇도 아닌 그저 '양심고백'을 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그를 정의의 수호자니 거대 재벌의 희생양이니 하며 포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용기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안타깝고, 생각할 수 있으나 생각하길 멈춰버린 사람은ㅡ 개인적으로는 더욱 안타깝고, 사회적으로는 뻔뻔하다. 김용철 변호사는 생각하길 멈추지 않았고ㅡ 그 대가로 실질적인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 사회 구성원들이 믿는 '정의'를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했던 집단의 치부를 고발했지만ㅡ 그 댓가는 혹독했다. 오십년의 인간관계가 무너졌고, '反삼성'이라는 연좌죄는 자식들의 앞날까지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진실한 벗을 얻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는 하지만ㅡ 한 개인을 매장해버리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삼성권력'의 무시무시함은 보는 이들을 소름돋게 한다. 출간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과, 출간 이후의 이런저런 우여곡절들. 책 출간후 '저자와의 만남'에서 김 변호사는 "30대 이하는 이 책을 안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실은 때로, 아니 너무도 자주. 인간이 믿고싶어하는 환상을 산산히 깨부순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진실을 아는것 조차 힘겨운 싸움이라는 것.

애초에 3만부 정도 팔릴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삼성권력의 나라에서 언론에는 노출되지 못했지만 출간 10일만에 3만부가 팔렸다. 좀더 희망을 키웠다. 이 책이 100만부쯤 팔린다면ㅡ 그땐 뭐가 바뀌어도 바뀔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ㅡ 주변사람들에게 이 책 만큼은 '사서'보라고 권하는 것 뿐이다. 책 출간을 둘러싼 우여곡절만 봐도 이런책은 사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이 책이 어떤 변화의 시발점이 될지, 그저 흘러간 야사의 한장면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어쨌든 상당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짐을 남길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ㅡ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면. 그런 불편함은 '의무이자 권리'라고 믿고싶다.

 

워낙 범인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쓴 책이다 보니 곳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은 '평민'과는 다른 특권층이라는 의식이 아주 강하고ㅡ 삼성 내부의 인식도 그렇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통념에 비춰봐도ㅡ 그런 재벌집에서 태어나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런 '특권의식'을 갖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환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가? 바로 천문학적인 돈이다. 그런데, 현 사회에선 자신의 권력이 '돈'에 기반한다는 사실이ㅡ 다시말해 '돈'이 권력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이 ㅡ 마치 절대 권력을 지닌 '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나보다. 곳곳에 등장하는 이건희 회장님의 다양한 사업시도(!)들은 철저한 시장실패에도 불구하고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일반인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홍라희 여사님의 안목은 애꿏은 사업부장에게 '시장실패'라는 멍에만 안겨주지만, 나름대로는 평민들에게 베푸는 '거장의 친절함'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의 출처가ㅡ 수많은 삼성 노동자들과, 더 넓게는 국민을 위해서 쓰여야 할 돈을 빼돌린 것이라는 사실은, '없는'사람들의 시기/질투거나 중상모략, 혹은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오만불손한' 망언이라고 여겨지는건지. "온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라는 훈계를 내려주시니. 거 참 그들 '특별한 존재'들의 세계에서는, 같은 단어도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건지도.   


명실상부한 후계자이자, 온갖 비리의 핵심에 자리한 이재용씨는 "비자금 다른데도 다 있는데 왜 유독 삼성만 갖고 난리냐"고 푸념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논리로 봐도 이 말에는ㅡ 삼성과 다른 기업을 동급으로 보는 치명적인 오류(!)가 담겨있지 않은가.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인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살린다'는 말을 그대로 적용시킨대도 이미 '삼성'이란 기업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다. 삼성의 온갖 비리들은 단지 '불법'이기 때문에 문제되는 차원을 떠나ㅡ 수만, 수십만의 생계를 책임진 거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ㅡ  권력만 알고 그에 걸맞는 책임과 품위를 모르는 천박한 기업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일까? 
 

김 변호사가 양심 고백을 준비하기 전, 사회 원로 한분은 "쓸쓸한 거리에서 황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말했다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은 댓가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린치'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지만, 책이 생각보다 많이 팔리자 그런 걱정은 접었다는, 농담같은 진담이 아무렇지 않게 말해지는 사회다. 양심 고백후 오히려 이건희 일가의 성벽을 더욱 튼튼히 쌓아준 2년이었지만, 좌절이야말로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다. 2년여간을 지는 싸움을 하고도 다시 이 책을 내어놓은 김 변호사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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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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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기적을 꿈꾸며 산다. 내일 아침 눈 뜨면 세상이 바뀌어 있는 기적,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던 그이가 맘 고쳐먹고 내게 '귀환'하는 기적, 우연히 산 로또가 대박나는 기적...기적의 사전적 정의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또는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기적'을 몰아내고 타자화한다. 내겐 닿을 수 없는 무엇. 남루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할 무엇. 

  얼마 전 출간된 로쟈님의 책에서, 타르코프스키 영화 <희생>에 대한 짤막한 리뷰 부분 - "기적 없는 기적" 이란 소제목의 글을 읽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신께 '기적'이 일어나길 빌고, 다음날 아침 기적에 대한 답례로 자신의 모든것을 바친다. 알렉산더가 확인한 기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기적'이었다. '(3차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지는 것이, 그가 모든것을 걸고 소망했던 '기적'이었던 것이다. 로쟈님은 덧붙인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故 장영희 선생님의 '기적'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선생님은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고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낸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해서 '살아온 날의 기적'이라 적었다. 곧바로 "다시 그런 기적같은 삶을 살기가 싫다. 기적이 아닌, 정말 눈곱만큼도 기적의 기미가 없는, 절대 기적일 수 없는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라고 너스레를 떠시지만 말이다. 선생님의 병이 감쪽같이 낫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마지막 하루하루 역시 기적이었을거라고 믿는다. 아직 완성형이 아니어서 장선생님을 기억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옮겨질 가능성이 충만한 기적. 

  우리는 늘 평범함/다수/주류를 근거로 끊임없이 타자화를 시도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작년 어느날 <내 생애 단한번>에서 처음 장선생님 글을 접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못쓰지만 여느 '멀쩡한'사람들보다 더 씩씩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에 "아 정말 대단하시구나.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사실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에 대한 끔찍한 타자화의 결과였다. 다리를 못쓰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어떻게 '보통'사람들보다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이런' 사람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데 멀쩡한 난 뭐야?! 

  다시 책장을 넘긴다. 이번엔 '대단하다'라는 느낌보다, 좁은 편견에 갇혀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선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건 '몸의 불편함'이 아니라 바로 나 같은 사람의 '타자화'였음을. 몇 개의 글을 제외하면 이 책에 '다리가 불편한 것'을 알려주는 '증표'는 없다. 오히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시련과 굴곡, 놓치기 쉬운 일상의 아름다움이 가득할뿐. 책에서 느껴지는 선생님은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의지의 한국인'보다는, 남들처럼 좌절도 하고 푸념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로도 받고 또 어찌어찌 살아갈 힘을 추스리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단지 조금 더 감사해 할 줄 아는. 

  한달에 한번. 샘터에 연재했던 글을 엮어놓은 책이다. 여러편의 글에서 선생님은 미리 써놓지 않고 닥쳐서야 쓰는, 그것도 소재를 찾지 못해 끙끙거리는, 별로 '멋지지 않은' 일상을 풀어놓는다. 대개 어찌어찌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이 소재가 되고, 그렇게 한편의 글이 써진다. 자신의 '예쁘지 않은 면'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솔직함이 여기 실린 글들의 매력이다. 한껏 짜증이 나서 동료 교수가 보내준 '좋은 말'들에 하나씩 토를 다는 모습, '젊음'앞에서 주눅들어 '레인보우 마끼'대신 나이든 사람들이 먹는다는 '프라이드 마끼'를 먹고 변명하듯 '나이 듦'에 대해 풀어놓는 모습, 자기는 단지 '의심하기 귀찮아서' 남을 잘 믿는데, 한번은 덜컥 중국한 '부세'를 '굴비'인줄 알고 바가지를 썼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사람좋고 넉넉한 중년 여인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누구나 저마다의 산을 오른다고 했던가. 장영희 선생님은 분명 많은 곡절을 겪었고,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선생님의 삶이 주는 감동은 "자, 잘 봤지? 너희들도 나처럼 역경을 잘 딛고 일어서라고!" 이런 영웅의 훈계가 아니다. 때론 비틀대고 때론 주저않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어찌어찌 견뎌가는거 아니겠냐고. 함께 가는 사람들과 때로는 슬픔, 때로는 기쁨을 나누며 그렇게 같이 견뎌보자는 토닥임이다.  당신이나 나나 때론 싸우고 화내기도 하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러면서 또 돕고 마음 나누며 사는 이 인생이 바로 기적 아니겠냐는. 

  한번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장영희 선생님이 당당할 수 있는것은 여러모로 지원해줄 수 있었던 가족들과 괜찮은 사회적 지위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스스로 결핍되었다느 느끼는 내게는, 타인의 어둠은 보이지 않고 밝은 빛만 보였던게다. 나는 이것이 없는데 저사람은 있네..그런식의 비교는 스스로를 '마음의 불구'로 만든다. 선생님을 당당하게 만든 것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스스로의 굳은 의지라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힘'이 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보살피는 행위이기도 한 것임을.   

  익숙한 이름에 유달리 故자가 많이 붙는 2009년이다. '삶'이 있으면'죽음'이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지만 구체적인 개인의 죽음은 늘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고인의 명복일 빈다, 라는 말은 얼마나 헛헛하고 쓸쓸한지. 죽음 앞에선 늘 말이 없어진다. 선생님의 희망, 선생님의 기적들은 이제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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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김선우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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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선우 시인이 좋다. 그 툭 터질것 같은, 달큰한 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은, 아픔마저도 황홀하게 느껴지는 시어들이 좋다. 내 둔한 몸감각으로는 그녀의 시적 감수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때가 태반이다만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생명에 대한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떤 주제의 글이라 하더라도.  

순전히, 김선우 시인의 해설 때문에 산 책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빛깔로 채색된 사랑의 기억이 있다. 다른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늘 자신만의 아련한 기억과 겹친다. 기억속에 묻힌 희미한 추억이 타인의 언어에 힘입어 다시 선명하게 채색되기도 하고, 뭉게졌던 윤곽선들이 새롭게 그어지기도 한다. 각각의 시를 빚어낸 것은 시인 자신이 겪은, 또는 시인 주변인들이 겪었던 개별화된 사건들이지만, 언어로 빚어진 순간 우리 모두의 경험과 살며시 포개진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보편적 사건들이, 저마다에게 각기 다른 파장을 빚어내고 색색의 의미로 각인된다. 그 울림속에서 또 하루를 견뎌갈 힘을 얻기도 하고, 죽은 줄 알았던 감정의 맥박이 고동치는 것에 새삼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시인이지만 저마다의 빛깔로 읽어내는 것은 개인이 그려온 삶의 궤적이다. 

흰 바탕에 검은 글자들만 덩그러니 놓인 평범한 시집들은 어쩐지 건조하다. 딱딱한 인쇄체 글자들로는 적절한 시어를 고르느라 몇날 몇일 고심했을 간절함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시를 엮은 시집답게 이 책엔 '시적 순간'을 그려낸 삽화들이 시의 여백을 채워준다. 각 시들 뒤에는 김선우, 장석남 시인의 "시보다 더 시같은 해설"이 이어진다. 시집 뒤에 나오는 '시보다 더 난해한'해설이 아니라, 시와 독자의 공간을 채워주는, 시의 외연을 넓혀주는 해설들이다. 간간히 시작 동기, 혹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기도 하고, 작가의 시적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시 구절이 동봉되어 있기도 하다.   

표지 뒤에 이런 설명이 덧붙여졌다. "장석남의 시에는 그리움이 있다...김선우의 시에는 달콤함과 아픔이 공존한다...클로이의 그림에는 찰나가 숨 쉰다...." 확실히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 더욱 여성적이다. 아픔마저 달콤하게 취하게 만드는. 문체에 대한 선호도야 개인의 입맛이다. 나는, 어딘가 '분석적'이고 '관찰자'적인 장석남 시인의 해설보다는, 어느순간 시에 풍덩 빠져 자연스레 감정이입으로 이끄는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 더욱 사랑스럽다.   

 

책 표지에는, 별로 어울릴것 같지 않은 문구가 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화제를 모은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긴긴 연애편지같은 사랑 노래를 한권의 책으로 만나다!"   

이런 아름다운 시들과 조선일보를 매치하는 것은 왠지 억울하다. 히틀러가 베토벤을 즐겨 들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것 처럼. 오늘 도착한 고 장영희선생님 영미시 책인 "축복" 표지 뒤에도 버젓이 쓰였다. "조선일보에 1년간 연재된 인기 칼럼 모음". 사설이나 정치/사회 면으로는 우리를 분노케 하기 충분한 조선일보지만, 문화컨텐츠 면에서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보일때가 있다. 책의 주제가 자신들의 입맛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 괜찮은 책 리뷰/소개도 곧잘 올라오곤 하니까.  

나는, 모든 시는,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 도발적 시선"이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좌파적이라고 (또는 그래야 한다고)생각한다. 시인의 언어는 게을러서는 안되고, 늘 변화를 쫒으면서도 삶에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깔고 있어야 한다. 물론 세상은 늘 모순인지라 그런 아름다운 시어들로 용비어천가를 빚어내기도 하고, '혁명적'인 언어로 '수구적'인 삶을 사는 시인도 있지만 말이다.  이런 '시'들과 조선일보를 매치시키는 것이 영 심술나고 맘에 안들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중요한 것은 시를 읽어내는 우리의 마음인것을. 매 순간 삶에 깨어있는 시인들처럼 우리 스스로가 쉽게 안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길 뿐. 

언제나, 행동보다 말이 쉬울 뿐이다. 시를 빚어낸 시인의 고통과, 시를 읽어내는 우리의 마음 사이의 불협화음처럼. 다행히 이 책엔 간간히 시인들의 에피소드가 실려 쉽게 지나치려는 내 발목을 붙잡곤 했다. 평범해 보이는 단어 속에 배인 슬픔들.  

사랑의 늪에 빠진 벗들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선물할 만한 좋은 책이 한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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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음 / 이레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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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 함민복 시인의 이름을 접한건 벌써 몇년전. 배우고 있는 선생님 한의원 탁자에 놓여진 시집이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 선생님이 입에 달고 다니시는 말 중 하나가 "경계에서 꽃이 핀다"였기에, 그 제목이 가진 카리스마에 끌려 들춰보았다. 허나 시라는 건 언제나 읽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있어야 마음속에 다가오는 법. 어리버리하면서 은근 까칠했던 내게는 시집의 내용이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밍숭밍숭해 보였다. 그리고 곧 잊혀졌다. 

 어느날, 어느 서재지기님이 시인의 시를 한편 올려놓으셨다. 어느님이 한편, 또 어느님이 한편. 내가 예전에 지나쳤던 그 시인이라는 걸 모르고 물끄러미 시를 읽어내렸다. 시인들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어느 에피소드도 이 시인 글이었구나. 그러다 덜컥. 작년 이맘때쯤이구나. 촛불집회에서 어느 시인이 크게 다쳤다는 글을 읽었고.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 시인이 그 시인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뒤늦게야 먹먹한 마음을 달랬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시인을 검색하고 책을 사들였다. 표지 뒤에는 강화도 뻘을 배경으로 한, 옆집 아저씨같은 푸근한 시인의 얼굴이 실려있었다.  

 나는 '몸쓰는 일'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다. 서울 출신이고, 겉보기에나 실제로나 비리비리하고, 생긴것 마냥 '일주변' 또는 '몸감각'도 영 아니다. 하여 '험한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왠지 나와는 딴세계 사람 같기도 하고, 그들의 고단한 삶이 일종의 낭만처럼 느껴질때도 있었다. 처음 시인의 시집에서 느꼈던 느낌은 거칠고 투박한 시에대한 일종의 거부감이었다. 예쁘고, 단아하고, 고상한 시들만 진짜 시인줄 알았으니까. 그때와 지금이 무엇이 달라졌을까? 거의 어민 후계자가 된 시인의 산문들이 낯선것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투박함이 정겹다. 숱한 고뇌에 치여왔음에도 아직 모질지 못한 순박함. 착해빠진 사람이 주는 넉넉함. 허세도 허식도 없는 간결함.

다른 사람의 짊어진 고통을 보며, 내 슬픔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을 느끼며 얻는 위안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간사한 것인지. 허나 그런 간사함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댔을 것인지. 삶이 '고통 콘테스트'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여태껏 걸어온 삶의 궤적 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내 슬픔에 겸허해지는 시간들.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했다" 무미건조한 두 문장 사이에는 시인이 넘어야했던 첩첩 바위산들이 쌓여있다. 시인의 인생에서 가난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어느 글들을 보나 그의 삶이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배어나온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넉넉하고 푸근하다. 시집 한권과 등가관계에 놓인 삼천원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국밥 한그릇과 등치가 된다. 남자 혼자 사는 자신의 집에는 제비도 염탐왔다 집 아니짓고 그냥 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제비야 네가 옳다" 웅얼거리는 시인이다.   

함민복 시인에게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1998년 무렵,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예술가상'이란 상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돈으로 상금이 500만원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방 구해드릴 200만원이, 태어나서 만져본 가장 큰 돈이었다는 시인인데, 내심 얼마나 들떴을까. 헌데 그놈의 IMF가 뭔지, 딱 그해에만 상금 없이 청동인지 돌인지 한없이 무겁기만 한 트로피를 주었댄다. 무거운 트로피를 들고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인은 내내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무거운 게 쌀 가마니였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던 시인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시 한편에 삼만원'을 쌀 두말과, 시집 한권팔아 받는 삼백원을 굵은 소금 한 됫박과 연결시키며 스스로 마음 다잡던 시인인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받든다는 이 나라의 대답은 여전히 폭력이었다. 이런 현실을 볼 때면 어릴때부터 들어왔던 "인과응보","고진감래"라는 말은,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국가적 최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해방이후 우리나라에서 "인과응보"가 제대로 이루어진적이 있었는지. 이럴때야말로 '내세'의 필요성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거기서도 이명박 장로님이 대통령이라면 연옥이나 지옥이 또다른 '내세'가 될런지도 모르겠다만.  

 함 시인의 초기 작품들에는 반생명, 비인간적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강화도에 자리잡고 살면서 부드럽고도 강한, "말랑말랑한 힘"을 가진 시들이 흘러 나왔다고. 산문집에는 강화도 어민들과 뻘을, 바다를 누리는 경험담이 많다. 아득히 멀고 또 가까운. 언제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거친 노동의 숨소리가 섞인, 유려하기보단 숭숭 썰어놓은듯한 글이지만 밑바탕은 '말랑말랑한' 어머니의 힘이다. 시인 주변의 못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의 에피소드엔 구구절절 사연이 가득하지만  춥고 궁핍한 가난보다는 다른이에게 손을 내미는 따스함이 먼저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거잖아"라며 넌지시 어깨 한번 쓰다듬어 주는. 등 한번 두드려주는 마음.  표지 뒤 둥글둥글하고 넉넉한 시인의 얼굴과 똑 닮은 손길. 

밤이다. 혼자사는 이에게는 더욱 더 농밀해지는 밤. 이시간에도 도로엔 차들이 지나간다. 차들이 내는 바람소리가 어쩐지 파도소리처럼도 들리는 밤이다. 혼자 먹는 밥상 앞에서 시인은 혼자 밥 드실 어머니를 떠올린다고 했다. 늦은 밤 간소한 술상 차려서 시인이 퍼주는 국밥 안주에 취해야 겠다. 당신이 퍼준 국밥들 만큼이나 넉넉하게 사랑하며 사셨으면. 당신의 마음에 시를 쓰는 바다를 뻘을 사람을 마음 가득 사랑하고 사셨으면. 머지않은 날 당신 집 처마밑에도 제비 한 쌍 둥지 틀고 한지붕아래 다른 생명과 오롯이 보듬고 사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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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7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철 옮김 / 범우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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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안나 카레니나, 를 다 읽었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좋게 말하면 말 그대로 '빨리' 읽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대충 읽는거다. 한줄 한줄을 음미하기 보다는 남은 페이지 헤아리며, 혹은 줄거리 파악에 급급해서 쓱쓱 넘길때도 많다. 그 속도라면 이런 책 두권 쯤 하루에도 다 읽어치웠겠지만, 요새는 기껏해야 지하철ㅡ 그리고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20~30분쯤 읽는게 전부였다. 하여 십수일이 걸쳐 진득이도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고 해서 꼭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틈틈히 1000페이지쯤 되는 작품을 읽어내니 뭔가 큰 일을 해치운 기분이다. 다른 책 같으면 읽다가 포기했을법도 한데, 이 책은 놓는게 아쉬울 정도였으니까. 다 읽어낸 지금은 스스로 뿌듯하다.

톨스토이는 단편 몇개밖에 안읽었었지만 어쨌든 이 책만큼은 마음에 쏙 든다. 한번에 20~30분밖에 못읽었다만 읽는 순간 만큼은 무섭게 빠져들어간다. 크고작은 여러 사건이 등장하지만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나같은 문학 얼치기한테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수정하고 다듬었는지가 절로 느껴진다. 소설보다 먼저 나오는 옮긴이 서문에서 안나-브론스키는 파국으로 치닫고, 레빈-키치의 사랑은 이상화 된다고 나와있어서ㅡ 읽기 전에는 금방 질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뻔한 얘기를 1000페이지 씩이나.....아! 그래도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아무리 뻔한 전개일지라도 사건과 심리를 펼쳐내는 방법에 따라 이렇게 독자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니. 긴 소설을 이렇게 질리지 않고 읽어본게 얼마만이던가. 

러시아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읽어본게 거의 전부라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된다. 석영중 교수 책에 "톨스토이 작품 등 다른 고전들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다이아몬드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이아몬드 광산과 같다"는 구절이 있다. 절묘한 비유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이 뭔가 정신없고 술술 써내려간 느낌이 든다면 이 작품은 수없이 깎고 다듬어낸 느낌이다. 둘 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장 사이에 광기가 번득이는 도 아저씨 글이 더 끌린다. 왠지 인간적이기 때문이랄까. 잘 다듬어진 글은 깔끔하지만 어딘가 '건조하다'. 톨스토이 책이 종교적 색채와 교훈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좋았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레빈과 키치의 '이니셜 사랑고백' 원문에는 분명 조금 다른 방식이었을 테고, 번역과정상 어쩔수 없이 다르게 표현되었겠지만. 아 그래도 내 꼭지를 돌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언, 당, 나, 그, 수, 없, 말, 그, 영, 그, 수, 없, 것, 아, 그, 그, 수, 없, 것?"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영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때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까?)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두 사람은 실로 수개월만에 만났고, 직전까지 서로에겐 건널수 없는 듯한마음의 벽이 놓여있었건만. 이런 아리송한 암호로도 서로의 마음을 교류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다른이들은 알 수 없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한 대화. 이 부분에서 어찌나 마음이 콩닥콩닥 뛰던지. 어찌나 마음이 설레던지.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차오르는 그 무언가에 휩싸여 한동안 헤~ 넋빼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해온다면, 겉으로는 도도하게 튕길망정 속으로는 홀딱 넘어가고 말거라고, 나홀로 므흣한 상상에 빠져서. 헤헤 

(이 구절 덕에 잊고 있었던 행복한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오년도 더 된 일이다. 나도 저 비슷한 이니셜 놀이를 하며 설레는 마음을 주체못하던 때가 있었지. "ㅂㄱㅅㅇ" "ㅅㄹㅎ" 이런 진부한 대화에서부터 'ㅇㅇㅂㄹㄱㄷㄷ?" 같은 일상의 대화까지 둘만 아는 암호(?)를 주고받던 기억.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ㅅㄹㅎ"라고 써주던 기억. 아....! 벌써 수년전 일이라니 아득하구나....쩝) 

각설하고, 두번째로 좋았던 것은 탁월한 심리묘사다. 특히 질투와 의심에 빠진 사람의 절박하고도 폐쇄적인 마음 흐름들. 불같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있는 사람들에겐,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 보다도 절망 혹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의 심리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소설 끝자락 부분ㅡ  점점 식어가는 브론스키의 애정을 애타게 바라지만, 그 강렬한 바람때문에 더욱 엇나가는 안나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상태로 지속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간절함. 그리고...그 희망이 툭 떨어졌을때의 절박함. 자신을 비롯한 모든것이 슬프게만 보이는 그 마음...행복해보이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더 나아가 가증스럽게만 보이는 가여운 사람. 그리고... 

아무튼. 왜 이책이 그렇게 자주 인용되는지 알 것 같다. 어느 부분을 읽어도 삶에 대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스며있는 작품이다. 사실 문학적 감수성은 그리 예민하지 않아 소설을 읽고 희열을 느낄때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런 순간들이 있다. 머릿속에 "아!"하며 한줄기 빛이 비치거나, 뭔가 한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 또는 나도 모르게 멍때리고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구절들. "인간은 왜 문학작품을 쓰고 읽는 것일까?"하는 짐짓 진지한 물음이 떠오르게 하는 순간들. 며칠 만 지나면 일상속에 파묻힐 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신비한(?) 마음을 선사하는. 일상의 마법.  

이 책을 읽을때면, 거의 마리아 칼라스를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칼라스, 하면 오나시스와의 열정적인 사랑이 떠오른다. 칼라스를 숨쉬게 했던 불같은 사랑과 열정의 원천. 결혼을 원했지만 재키 케네디와의 얽힘으로 잘 되지 않고. 끝내는 오나시스를 먼저 보내고 쓸쓸하게 죽어간 여인. 책에 묘사되는 안나는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기품과 누구든지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아름답고 멋진 여자다. 당당하고 우아한 안나의 이미지와 칼라스의 깊고 풍부한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중첩되며슬프고도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사랑을 위해 모든것을 바칠 수 있었고, 모든것을 버릴 수 있었던. 무서운 열정을 가진 여인들. 세간에서는 '타락하고 요망한 계집'으로 비난할 지언정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었던. 자신의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여인들. 그리고 쓸쓸한 죽음.   

사실 이 책은 안나가 유일한 주인공은 아니다. 안나 못지않게 레빈-키치의 사랑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안나-브론스키의 파국과 달리 레빈-키치는 바람직한 부부상으로 묘사될 뿐더러,  결말도 그럭저럭 해피엔딩이다. 오블론스키나 카레닌을 위시한 귀족/사교계의 묘사 또는 비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모든것을 고려해도 역시 제목은 '안나 카레니나'일 수 밖에 없다. 안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캐릭터는ㅡ 독자에게도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뿜어낸다.  

칼라스의 '노르마'가 더욱 절절히 와닿는 밤이다. 

Casta Diva,
Casta Diva che inargenti
순결한 여신이여,
당신은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queste sacre, queste sacre,
queste sacre antiche piante,
이 신성하고 아주 오래된 나무들을,
a noi volgi il bel sembiante,
a noi volgi, a noi volgi
aaah  aaah  aaah il bel sembiante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senza nube   e senza vel...
구름도 없고 베일도 쓰지않은...
Tempra, o Diva
진정시켜 주소서,
오 여신이여
tempra tu de’ cori ardenti
진정시켜 주소서
당신께서 타오르는 마음을
tempra ancora
tempra ancora
tempra ancora lo zelo audace,
진정시켜주소서 도전적인 열정을,
spargi in terra
spargi in terra
spargi in terra aaah  aaah  aaah
quella pace
뿌려주소서 땅위에 평화를
che regnar tu fai nel ciel...
당신께서 하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Fine al rito : e il aaah  aaah  aaah sacro bosco
의식은 끝났다: 그리고 신성한 숲에
Sia disgombro dai profani.
세속적인 사람들은 없다.
Quando il Nume irato e fosco,
분노하고 우울한 신이
Chiegga il sangue dei Romani,
요구한다면 로마인들의 피를
Dal Druidico delubro
드루이드 신전에서
La mia voce tuonera.
나의 목소리가 천둥치리라.
Cadra; punirlo io posso.
그가 타락한다면; 나는 그를 처벌할 수 있다.
Ma, punirlo, il cor non sa.
그러나, 그를 처벌할 수가 없구나 나의 마음은.
Ah! bello a me ritorna
아! 아름다운 사람아 내게 돌아오라
Del fido amor primiero;
처음의 충실한 사랑으로;
E contro il mondo intiero...
전세계와 대적하여
Difesa a te saro.
보호할 것이다 당신을
Ah! bello a me ritorna
아! 아름다운 사람아 내게 돌아오라
Del raggio tuo sereno;
당신의 평온한 빛과 함께;
E vita nel tuo seno,
살고싶어라 당신의 품안에서,
E patria e cielo avro.
조국이여 그리고 하늘이여.
Ah, riedi ancora qual eri allora,
아, 돌아오라 다시금 예전의 당신으로,
Quando il cor ti diedi allora,
그때에 나의 마음을 네게 주었었지
Ah, riedi a me.
아, 돌아오라 내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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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9-05-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러시아 문학은 기본이 1,000쪽이니 지금은 참 읽기 쉽지 않어요 ㅎㅎ

Jade 2009-05-16 19:44   좋아요 0 | URL
ㅎㅎ 길이도 길이지만 책이 두껍고 무거워서 들고다니느라 애먹었죠 뭐 ㅋㅋ
요즘은 책읽을 시간이 많지 않아 거의 소설류만 읽는것 같아요. 으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