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즈는 <화이트칼라>(1980, 돌베게)를 통해 현대(1950년대) 미국 사회를 종횡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소박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대로부터 20세기 화이트칼라가 대두하기까지의 상황을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구조적으로 설명한다.

 

 

한데, 밀즈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권력 구조 속에서의 화이트칼라가 속한 계층을 설정하고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철학적 관점(비어드-듀이-호룸즈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사조)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극복하는 가설 위에 자신의 ‘화이트칼라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절판된 책이기에, 간단한 소개를 위해 책을 펼쳤지만, 그냥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페이지마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신선한 분석과 치명적인 비판의식이 돋보였기 때문. 현재 나와 있는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이나 <파워 엘리트>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두 책을 모두 읽어 봤지만 이 책이 제일 재밌다.)

 

 

물론 현재 나와 있는 밀즈의 대표작 역시 일급 사회학 이론서치고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화이트칼라>는 앞의 두 책보다 훨씬 구체적이며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얘기라 집중이 배가 된다. 바로 현재 샐러리맨들 얘기이기 때문이기에.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최초로 대두하게 된 화이트칼라 계층이 바로 현재 샐러리맨들을 태동시킨 원조라서 그렇다. 약 60년 전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논의가 현재와 그리 다를 것이 없기에 그냥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밀즈가 그리는 바를 따라가 보면 내 말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다음 인용문은 현재 우리나라 노동 사회의 실정과 겹친다.

 

 

봉급생활자들은 단 하나 아무 것도 생산하는 게 없으며 단지 대단히 갖고 싶지만 소유할 수는 없는 많은 것들을 그저 관리할 뿐이다. 장인은 제품을 만드는 과정과 완성 후에 자신의 생산품을 보고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화이트칼라에게는 그러한 대상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해마다 똑같은 서류사무를 취급할 뿐이며, 대신 그에게 판매된 오락에 열광하며 여가를 보내지만 결국 정신적 긴장을 해소시켜주지 못하는 일시적인 흥분에만 정신을 쏟는다. 업무에 권태를 느끼고 오락에서도 진정한 휴식을 누리지 못하며, 이 무서운 악순환으로 인해 기력이 쇠진하고 만다. 일을 하면서 고객이나 상사와 충돌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양보해야만 한다. 카운터 뒤편에 서거나 사무실에서 기다리면서 항상 미소를 머금고 환한 낯빛을 하고 있어야 한다. 화이트칼라는 직장에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만 파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까지도 팔고 있다. 그들은 주급이나 월급을 받으며 자신의 미소와 친절한 몸짓을 판다. 그리고 화가 나더라도 재빨리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 왜하면 바로 그것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보다 효과적으로 판매하여 이익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조그만 자질이기 때문이다. p22

 

 

이 부분에서 현재 감정 노동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비애를 살짝 엿볼 수 있다. 밀즈는 책 후반부에서 이에 대해 다시 언급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이들을 ‘명랑한 로봇’이라 명명한다. (개인적으로는 유순한 노동자들보다 백화점 노동자의 행태가 ‘명랑한 로봇’에 훨씬 더 적절할 듯하다.)

 

유순한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자기가 왜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그다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은 적당히 관리하면 어디서 왜 일하고 있느냐고 질문받을 경우, “나는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여기가 좋다. 우리 사장은 정말 함께 일할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p217

 

 

한편 밀즈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미국 사회를 거시적 개념과 미시적 개념을 동원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계급, 생활 유형 그리고 권력이라는 거시적 개념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하지만 압권은 화이트칼라의 세계를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부분이다. 이 책의 2부와 3부에 해당하는데, 기업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규칙으로 표시된 개개인의 활동양식이 기업의 행동양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한은 그들 개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무실에 있으며 그들의 권한은 기업의 권한이다. 그들의 지위와 계급체계 전체에 대한 관계도 방문 앞의 명패에 달려 있다. 위로부터의 안전과 아래에 대한 권한은 규칙에서 나온다. 당연히 그가 누구며 무엇을 하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도 기업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들은 전체는 몰라도 약간의 기업비밀을 알며, 규칙과 등급에 따른 경로를 통해 진급된다. 이런 규칙들을 통해서만 그들은 남들과 비인격적으로 경쟁한다. (pp134-135)

 

 

이보다 더 샐러리맨들의 세계를 더 잘 요약할 수는 없을 듯하다. 자기계발서가 아닌 1급 사회학 이론서에서 이와 같은 글을 만날 기회는 매우 드물다. 이후에 진술되는 밀즈의 논거들은 실로 우아하다. 항상 역사적 맥락 속에서 통계 수치를 간과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석에 적절히 녹여내기 때문에.

 

 

이후에 철저히 논의되고 분석되는 관료제, 의학계, 변호사, 교수, 전문직업 그리고 백화점 등은 밀즈가 왜 미국 사회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탁월한 분석 속에 숨어 있는 신랄한 비판 의식은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더욱이 밀즈가 아무렇지도 않게 인용하는 부분들은 현재 한국적 상황과 너무도 유사하여 놀랍기만 하다.

 

학교 교사, 특히 초등하교와 중고등학교 교사는 전문직 종사자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볼 때는 프롤레타리아다. 이들의 수는 전문직업 중 가장 규모가 큰 직업집단을 이루고 있다. 즉 모든 전문직 종사자가 약 31%가 그런저런 학교 교사이다. p158

 

 

현재 우리나라 특정직 공무원(쉽게 말해서 전문직이라 불리는 공무원)의 절반은 학교 교사이며, 이들은 모두 전문직에 포함된다. 전문 직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종이 교사다. 50년대 미국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대학 교수를 분석한 부분을 보면 정말 기가 차다. 올해 나온 대학 비판서인 <흡혈귀가 지배하는 대학>의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다. 밀즈는 미국 대학 교수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지혜와 정열과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학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하버드 대학 총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문리과대학은 똑똑하고 건전하고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를 교수로 채용하지 않는다. (p159) ---- (중략)---- 학계의 일반적 위계서열은 거의 가르치지는 않고 조사 연구를 주로 하는 대학의 정교수로부터 죽도록 가르치기만 하고, 조사 연구는 거의 하지 않는 강사로 이어져 있다. (p161)

 

 

이 내용은 <흡혈귀가 지배하는 대학>(책미래, 2014)에서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양대 축이다. 밀즈는 정말 우리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

 

 

책의 3부인 ‘생활 유형’에서 노동과 봉급을 논한 부분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수입이 지위를 결정하고, 노동으로부터 파생된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한 이 지위에서 만족을 얻는다고 한다. 회사에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거만해지고 막말을 해 대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마도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개개의 직업이나 노동은 각각 다른 지위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은 그 노동의 장(場)과 사회전체 가운데에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노동의 한 의의가 되기도 한다. 또 노동에는 재료, 도구, 기계에 대한 지배권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들도 부수되어 있다. 한편 직업을 수입원으로 보는 노동관의 근저를 이루는 감정이나 공포 중에는 노동의 다른 동기와 만족의 근거가 내재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지위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중간 생략)

Ⅱ. 지위 : 수입과 수입의 보장은 여타의 것, 특히 지위를 가져오게 한다. 노동에 있어서 기술상의 만족이 사라짐에 따라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다른 형태의 만족을 얻고자 한다. 즉 노동으로부터는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지위에 따른 만족을 얻는다. 여러 가지 인간 관계를 가진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노동은 내부적으로는 직장의 동료, 상사, 부하 혹은 고객에 대해, 외부적으로는 친구, 가족, 혹은 사회 전체에 대해 노동자가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건거가 된다. (pp211-212)

 

 

마지막으로 밀즈가 왜 시대를 앞서간 천재 사회학자인지는 다음을 언급한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분배의 물리적 측면은 광범위하고 신속한 수송망을 포함한다. 시장 거래의 조정은 교통을 포함하며, 시장의 탐색과 상품의 판매는 일용품 금융업자 및 자본시장뿐만 아니라 도소매 판로 등의 매매업을 포함한다. (p95)

 

 

정말 놀랍다. 1951년에 밀즈는 시장 거래의 조정에서 교통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쿠팡의 성공 비결이 배송 정책에 있었다는 사실은 21세기에도 밀즈의 분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알려주는 지표가 아닐까.

 

 

결론적으로 <화이트 칼라>는 사회학의 고전이 된지 오래지만,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지극히 근본적인 부분을 드러내고 있기에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읽으면서 계속 2015년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베블런의 <한가한 무리들> 이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던 일급 사회학 고전이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덧]

라이트 밀즈의 저작들이 모두 번역되길 간절히 바란다. <화이트칼라>도 빠른 시일 내에 재간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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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23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워엘리트 걸작이죠. 땡잡으셨네요. 저도 화이트칼라 구하고 싶었는데... 아니 왜 이런 책을 절판으로 나두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이런 건 절판되지 않게 꾸준히 출간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yamoo 2015-12-27 18:53   좋아요 0 | URL
네, 이거 천원 주고 샀어요..ㅋㅋ 파워엘리트가 출간됐으니 조만간 <화이트칼라>도 출간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이전에 절판된 책들이 속속 재출간 되고 있으니 좀 기둘리면 나오겠지요^^ 전 <상상의 공동체>나 얼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ㅎ

cyrus 2015-12-2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물을 처음 봅니다. 요즘 돌베게 출판사의 행보를 보면 80년대에 나온 자사의 책들을 펴내기도 하던데 <화이트 칼라>도 재출간되었으면 좋겠어요.

yamoo 2015-12-27 18:5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저도 중고서점에서 실물을 본 건 첨이었습니다. 디자인이 정말 헬입니다. 오래되서 책도 누렇게 뜨고요..하지만 안의 내용은 정말 따끈합니다..ㅎ 저도 재출간됐으면 합니다. 가격은 한 3만원 쯤 하겠지요? 한길사에서 나오면 말입니다..ㅎ

전 천원주고 샀어요..ㅋㅋ

슈샨보이 2015-12-23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수업때 정말 자주 언급된 책.

yamoo 2015-12-27 18:55   좋아요 0 | URL
푸코리님 반갑습니다!

그렇지요, 사회학이나 사회과학 관련 수업을 들을 때 언제나 언급되던 전설적인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