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정책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있다. 주로 행정학과에서 다루는 행정학의 분과 학문쯤 된다. 아직 독립적인 학과로 발돋음 하지 못한 상태다. 행정학이 정치학에서 그 정체성을 주장하는 요체가 바로 이 정책학이라는 분과 학문적 특색 때문이다.


사실 행정학은 완전히 미국에서 그 원형이 갖추어진 학문으로, 정치학과 경영학 사이에서 그 위치를 잡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성립했다. 그래서 초기 행정학은 학부 개설 과목이 아니었다. 이 두 학문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과정이 행정학 발달사의 중요 이론을 차지하고 있는 정도다.


정치-행정 일원론이니, 공사 행정 일원론이니 하는 쓸데없는(것 같은) 논쟁은 바로 행정학의 학문적 성격이 명확히 확립되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그래서 행정학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는 듯) 지금까지 우리나라 행정학계 쪽에서 행정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을 명확히 구분지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추세는 국가학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분위기다. 말이 좋아서 국가학이지 이건 그냥 ‘잡학’이다.


그런데 일명 국가학, 그러니까 ‘거버넌스(Governance)’라고 불리우는 이런 연구 경향은 행정학이 정치학의 시녀라는 시대에서 견지해 온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다시 정치-행정 일원론의 시대가 된 듯하다. 여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책학이라는 분과다.


계속 정책학 얘기를 했는데, 이 학문을 결정적으로 태동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번에 소개할 해롤드 라스웰이기 때문. 이 사람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로 평가받는 학자다. 라스웰의 공적은 미국 정치학계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자 중 하나라는 점.


하지만 이 사람이 정치학보다는 정책학에서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하나의 소논문 때문이다. <Policy Orientation>이라는 짧은 논문하나로 그는 정책학을 태동시킨 최초의 학자로 자리매김한다.

 

한국의 모든 정책학 교과서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빠짐없이 나온다. 1장 1절에 해롤드 라스웰의 언급이 없는 정책학 교과서는 없다고 봐도 되겠다. 논리학 교과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차지하는 위상 쯤 되니...


원래 공공정책이 정부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라스웰이 아니었다. 정책이 갖는 경험적 성격에 최초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프래그머티즘의 완성자라고 알려진 존 듀이(J. Dewey)였다.


그 후 1950년대부터 해롤드 라스웰은 정책학을 다른 학문과 단절된 학문이 아니라 학제적 연구 분야라는 주장을 정치학계에서 제기했다. 당시 라스웰은 정치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비판하고 있었다. 정치학자들이 아무 목적 없이 연구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연구는 2차 대전 중 원자폭탄 발명으로 인한 무서운 결과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1960년대) 미국 학계는 논리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한 행태주의가 유행하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스웰의 비판은 정치학계에서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사회의 위기와 맞물려 정부의 정책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늘어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정책의 개발과 응용에 종사하는 각종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공공분야와 민간 분야 할 것 없이 활발했다. 지금도 유명한 랜드연구소는 이 붐을 타고 설립된 주요 연구소 중 하나다. 정책분석은 미국에서 각광받는 연구 분야가 된 것이다.


그리고 라스웰의 <Policy Orientation>은 이 분야의 철학적 기조를 대변하는 논문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학계가 아닌 정책학계의 시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정책학 문헌에서 라스웰은 빠짐없이 연구되는 가장 중요한 학자가 되었다. (미국 정치학자의 계보 속에서 로버트 달은 해롤드 라스웰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그런데 라스웰은 태생이 정치학자였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모두 정치학자로서 펴낸 중요 이론서들이다. 그의 저서 15권은 모두 정치학의 중요 문헌들로 등록돼 있다. 그 중에서도 정치학도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 <Psyshopathology and Politics>, <World politics and Personality Insecurity>, <Power and Personality>, <Politics: Who Gets What, When, How?> 등이다.


사실 라스웰의 저작들은 다른 정치학자들의 글과 달리 풍부한 비유와 인문학적 내용으로 인해 딱딱한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라스웰의 주저들이 번역되었다. (진가를 알았나 부다~ㅎ)


79년과 80년에 <Power and Personality>(1930)와 <Politics: Who Gets What, When, How?>(1936) 두 권이 전망사에서 <권력과 인간>(1981), <정치,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1979)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지금은 구할 수도, 구경할 수도 없다. (그래서 포스팅~^^)

 

 


 

 

 

 

 

 

 

 

 

 

 

특히 <Politics: Who Gets What, When, How?>(정치,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치학 이론서였다. 정치를 동태적 발전 과정에 따라 연구한 최초의 이론서 중 한 권이기 때문.


그에 따르면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느냐?”의 물음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을 규명하는 불변적인 테마라고 본다. 오늘날처럼 개인의 행동이나 의식이 여러 모로 정치적 세계에 반영되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표면에 나타나는 법적 제도나 조직만 연구한다는 것은 한계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그는 단정한다. 인간 심리의 내적 구조에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고서는 정치나 권력의 본질은 좀처럼 파악할 수 없다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대 정치학(시간이 꽤 흘렀지만)의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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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08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정학과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글입니다. 오랜만에 제 전공 때 배운 내용이 있는 글이라서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요. 제가 다니던 대학교 행정학과 3학년 전공과목 중에 ‘정책학’이 있었거든요. 행정학을 독립 학문으로 정립한 사람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었어요. C학점 받는 행정학과 학생도 ‘행정학의 시초=우드로 윌슨’만큼은 잘 잊지 않을 정도로 행정학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장면으로 언급 되요. ‘정책학’ 과목에서는 윌슨보다는 라스웰이 가장 많이 언급되고, 시험 문제로도 자주 나옵니다. ^^

yamoo 2015-09-11 15:0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행정학과 학생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니^^
시험문제도 당골..ㅋㅋ 동감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