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베르그손의 저작들을 다시 읽고 있다. 헌데 번역이 대체로 좋지 않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영어 원서를 구하러 대형 서점에 가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놀랍게도 교보, 영풍 전부 베르그손에 대한 저작들은 단 한권도 없었다. 그 많은 영어 원서 코너에 말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한 2주 걸리나 부다. 내가 읽다가 얼마나 열불 났으면 원서를 볼 생각을 했겠나. <시론> 2장과 3장 심각했고 황수영 씨가 번역한 <창조적 진화>는 정말 읽을 수 없는 수준이다. 아직 읽지 않은 많은 분들이 베르그손 전문가가 번역해서 믿음 때문에 아카넷 본을 구입하는 것 같은데, 읽어보면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번역이 형편없다.
<창조적 진화> 영어 번역본이 오면, 영어본은 아카넷 본 비문들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일일히 대조해 볼 작정이다. 황수영 씨가 쓴 <베르그손>과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을 믿고 그녀가 번역한 베르그손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를 읽는다면 낭패를 볼 것이다. 내가 지금 개고생을 하고 있다. --;;
이런 와중에 서재에서 화재의 글에 올라온 퀄리아 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숲노래 님과 무슨 논쟁이 있었나 보다. 요즘 숲노래 님은 알라딘 서재에서 이래저래 논쟁의 한 가운데 계시는 거 같다.
오래 전에 숲노래 님이 '함께살기'라는 닉을 쓸 때 언급한 글인 듯하다. 요즘 숲노래 님은 잘못 쓴 문장을 바로 잡거나 우리말 살려쓰기 페이퍼를 아주 열심히 올리고 계신다. 그냥 제목만 봐도 어떤 글인지 알 것 같다.
헌데 숲노래 님이 퀄리아 님에게 지적하시는 부분은 도가 넘은 거 같다. 퀄리아 님이 인용해 주신 지난 글을 들여다 보았다.
‘나귀님 번역비판글에 대한 아주 사소한’도 ‘비문’
숲노래 (이메일 보내기) l 2014-10-20 10:43
http://blog.aladin.co.kr/hbooks/7176740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제대로 익혀려고 애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사람이면서 영어나 다른 외국말을 익히려고 애쓰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한국말이 한국말답도록 가꾸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에 대(對)하다’는 한국 말투가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다. ‘사소(些少)하다’는 또 무엇인가? 이 낱말도 한국말이 아니다. 한국말은 ‘자잘하다’나 ‘보잘것없다’이다. ‘些少’는 한자말이다. 한자말은 한국말이 아니다. 그러니, “나귀님 번역비판글에 대한 아주 사소한” 같은 글월은 아주 잘못 쓴 글이다. 제대로 쓰자면,
ㄱ. 나귀님 번역비판글을 놓고 아주 자잘한
ㄴ. 나귀님 번역비판글을 보잘것없이 다시 비판
ㄷ. 나귀님 번역비판글 살짝 건드리기
ㄹ. 나귀님 번역비판글 살며시 비판하기
ㅁ. ……
이렇게 고쳐써야 올바르다. ㄱ, ㄴ, ㄷ, ㄹ 가운데 하나로 쓰거나, ㅁ처럼 새롭게 스스로 말결을 가다듬어서 써야겠지.
그나저나 ‘비문’이란 무엇인가? 빗돌에 적은 글인가? 빗자루가 있는 문인가? 숨긴 글인가? ‘非文’도 한국말이 아니다. 한국말은 ‘잘못 쓴 글’이다. 4347.10.20.달.ㅎㄲㅅㄱ
'사소하다'는 '사소'의 한자를 지적하고 '비문'을 쓰지 말자는 거다. 근데, 퀄러아 님이 변호하셨다시피 이런 비판은 침소봉대(퀄러아 님이 언급하신 표현)가 아닐까? '사소하다'는 단어는 우리말처럼 통용되는 한자어다. 그렇다면 '사고'와 '표현' 그리고 '김치'도 우리말을 발굴해서 써야 할 것이다. 물론 발굴하면 그에 대응하는 말이 있을 게다.
근데, 그런 단어를 쓰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숲노래 님 서재에 가서 글을 몇 꼭지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이 안 되어 반복해서 보아야 했다. 숲노래 님만이 발굴한 우리말을 아주 빈번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숲노래 님 서재 글을 몇 꼭지만 읽었지만, 숲노래 님은 자가당착에 빠지신 듯하다. 숲노래 님 역시 '단편소설', '한국'말, '번역 비판'글, '자전거' 등을 아무 꺼리낌 없이 쓰고 계신다. 전부 한자인데 말이다. 숲노래 님 말대로라면 전부 이에 대응하는 우리말을 찾아 써야 될 것이다. ('짧은소설', '우리말', '바꾸는 말 삿대질', '발로 밟아 움직이는 탈 것' 등으로 말이다. 어렵지 않다.) 제 얼굴에 침뱉기란 속담이 여기에 어울리지 않을까한다.
한데, 더욱 놀라웠던 건 숲노래 님이 쓰신 글에 비문(아!, 잘못 쓴 글인가..)이 꽤 많다는 점이다! 자, 여러분은 우리말을 살려쓰고, '잘못 쓴 글'을 지속적으로 발굴하여 바르게 고치시는 숲노래 님의 글을 보실 차례다.
숲노래 님의 지적 글을 종합해 보면, 자신은 올바른 문장을 쓰고 있어야 한다. 많은 글을 보면 좋겠지만 몇 문장만 검토해 보아도 어느 정도 윤곽은 나온다. 어떤 글을 쓰는지는..(이하는 비판적인 논조이기에 최대한 경어체를 쓰도록 하겠다.)
한 번 볼까요? 위 글과 그의 최근 글 하나를 보겠어요~.
우선 위 지적 페이퍼의 글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이면서 영어나 다른 외국말을 익히려고 애쓰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한국말이 한국말답도록 가꾸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여기서 '마음을 기울이다'는 일본식 표현입니다. 주의를 집중할 때 일본어에 '~을 기울이다'는 단어가 있는데, 이를 번역한 거에요. 유명한 애니 제목인 <귀를 기울이면>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다', '귀를 기울이다'는 모두 일본어식 표현으로 순화 대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숲노래 님은 한국 사람이 '한국말답도록 한국말을 가꾸자'고 해놓고 자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일본어식 표현을 쓰고 계신거!.
흠....정말 숲노래 님은 우리말 전문가인가인지 의심이 듭니다. 계속 보도록 하자구요.
국어교사는 단편소설 여덟 가지를 여고생하고 함께 읽습니다. 여고생은 저마다 단편소설을 읽은 뒤에 모둠을 꾸려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러고 나서 단편소설마다 글쓴이가 들려주려고 하는 생각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하고, 이 단편소설을 오늘 이곳에서 여고생으로서 읽는 아이들이 마음에 어떤 꿈을 품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먼저 '가지'를 봅니다. 사전에 보면 여기서의 '가지'의 품사는 의존명사로써 사물을 종류별로 구별하여 헤아리는 말입니다. '가지'보다는 '편'이 무난한 쓰임입니다. '단편 소설 여덟 가지'라는 표현은 ('여덟 편'보다)매우 어색하지 않을까요?
3번째 문장은 훨씬 심각합니다. 전단은 주어가 '글쓴이가 들려주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게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연결된 문장의 서술어인 '돌아봅니다'의 주어가 애매합니다. 주어가 '아이들'인지 '국어교사'인지 헷갈립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악을 썼구나 싶어서 어쩐지 혼자 외톨이가 된 듯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외톨이'라는 단어에 '혼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어의 중복으로 하나를 삭제해야 바른 문장이 됩니다. 이건 비문(아! 잘못 쓴 문장이구나..) 찾는 국어 시험 문제에 단골로 출제되는데 말이죠.
논리는 언급하지 말기로 해요. 숲노래 님은 논리를 무척 싫어하시는 듯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