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의 소설을 통해 다시 소설 읽기를 시작했다. 주로 세계문학 작품 위주로 골라 읽어왔다. 대부분 추천작 위주로 보는데, 이상하게도 읽지 못하는작품들이 있다. 자전적 소설이나 가족 서사 그리고 아르누보 계열 작품들은 좀처럼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읽다가 만다. 르클레지오나 오르한 파묵 작품들도 완독한 책이 한 권도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현재는 아직 시기 상조인듯하다. 발라드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다크 웨이브를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을까.

 

소설을 선택하는 데에도 분명히 취향이라는 게 작용하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읽었던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들 중에서 인상 깊은 구절들을 찾아봤다. 어떤 문장들이 나를 반하게 하여 줄을 치게 만들었는지 살펴보면 대충 나의 소설 취향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생각나는 것 위주로 꼽아 본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줄을 붙잡아 맬 뿐이지……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339)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2004)는 2008년에 만났다. 참 늦게 만난 편이데,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서재에 감상문도 남겼다. 자연과 함께 물아일체 되어 사는 조르바를 보며 자유로운 삶에 대해 심도깊게 생각해 봤다.

 여러 시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자유'밖에는 생각 나는 게 없었다. 그래서 보스에게 말하는 조르바의 위 말이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다니던 직장의 사표를 미련없이 던졌다. 조르바의 말이 결정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문학의 힘은 대단하다!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도망치는 도둑이 고귀한 보석을 삼켜서 숨기듯이, 내 육체의 속, 내 조직 속에 금각을 숨겨 갖고 도망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pp 50-51) 
내 관심은, 나에게 주어진 난문은 미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에게 작용하여 암흑의 사상을 품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p52)

 

 미(美)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하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 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었을까? 아니면 그 자체에 있었을까? (p153)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不壞)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pp204-205

 

<금각사>(웅진, 2002)는 한 지인 덕분에 만난 책이다. 한 매체의 대표였던 분과 사석에서 책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에 가장 감동깊게 읽은 소설이 겹쳤다.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작품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였다. 그러더니 나에게 <금각사>를 읽어봤냐고 물으셨다. 아직이라고 하니, 읽어보라고 강추해주셨다. 복거일의 작품과 더불어 자신에게 가장 감명을 준 작품이기에 나 역시 좋아할거라 확신한다면서. 난 자리에서 반드시 읽어 보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 보는 책이 따로 있었기에 계속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때 마다 그분은 문자로 읽었냐고 확인사살(?)까지 하는 통에 읽기 시작했다. 정말 단숨에 읽었고,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 재독 삼독까지 할 정도였다. 삼독을 마치고 명작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대표에게 메시지까지 보냈다.

 이 작품은 금각사라는 절의 구조와 인물의 구조가 완벽히 유비되면서 실로 우아한 하모니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 속에서 미의 이데아가 주인공에게 점점 멀어져 감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미시마의 성찰이 작품 도처에 깔려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탐미주의의 최고봉'이라는 찬사가 허언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나에게 다가온 위 인용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다.

 

 

 

가난  poverty  명
개혁을 주장하는 쥐들의 이빨을 갈기 위해 고안해 낸 줄칼. 가난을 없애겠다고 제안된 입안(立案)의 횟수는 가난에 고통 받는 개혁주의자들의 머릿수에다가 가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학자들의 머릿수를 보탠 것과 같다. 이 가난의 희생자들은 온갖 미덕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 번영의 땅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들을 그곳으로 데려다주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나이  age  명
자신이 시도하기 어려운 악덕을 매도함으로써, 자신이 여전히 즐기는 악행을 상쇄하는 인생의 기간.  


망각  忘却  oblivion
사악한 인간이 악행을 그치고, 마음이 따분한 자도 안식을 얻는 상태. 명성의 최종 도착지인 쓰레기장. 고매한 이상을 넣어두는 냉동고. 야심만만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것보다 뛰어난 작품에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 곳. 자명종 시계가 없는 기숙사.

 

무감동의  無感動  apathetic  형
결혼해서 6주일이 지난.  

 

뻔뻔스러움  impudence  명
대담과 야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수다  loquacity  명
상대방이 말하기를 원할 때, 자신의 혀를 제어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질환.

 

심통  心痛  distress  명
친구의 성공을 본 것이 원인이 되어 걸리는 질환

 

온정  溫情  cordiality  명
우쭐한 기분을 당장 누리고 싶은 자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간지러운 행동. 
 

지인  知人  acquaintance  명
돈을 빌릴 정도의 안면은 있어도 이쪽에서 꿔줄 정도는 아닌 사람. 상대방이 가난하고 하찮을 때는 고작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말하고, 돈푼이나 있고 유명할 때는 절친하다고 말하게 되는 우정의 정도

 

비어스의 유머와 신랄한 풍자도 나를 매료시켰다. <악마의 사전>(이른아침, 2008)에서 그가 풀어놓는 단어의 의미를 보고 있으면 유쾌하고 통쾌하기 이를데 없다. 풍자, 신랄, 유머라는 의미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딱이다. 영어 단어를 이런 식으로 외웠더라면 아마도 영어의 달인이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쓰치기도 했다. 의미가 정말 잊혀지지 않으니까. 무릎을 치고 뒤 늦게 따라오는 웃음은 더블 보너스!

참고로, 이 책을 너무도 재미있게 읽어서 비어스의  <악마의 위트사전>(함께, 2007)도 보았는데, <악마의 사전>보단 풍자와 유머의 강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좋게 완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전'이다.

 

 

 

다음 여덟 가지가 사랑의 증거이다; 심장, 말을 안 듣는 사지, 나른해진 몸뚱어리, 굳어진 혀, 수척한 모습, 눈물, 비밀, 홀로 타오르는 육체의 정염. 이러한 것들이 정열적인 사랑의 여덟 가지 증거이다.

 

다음 여덟 가지가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은 심장을 빨리 뛰게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는 관계들을 해체하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정열적인 사랑의 효과이다. (p201)

 

연극의 세 천재는? 이 물음에 2명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키냐르에 의해 한 명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쓴 이야기가 정말 아름답고도 경탄할만했다.  교토의 제아미가 일본 무로마치 시대 때 쓴 이야기라고. (아이스킬로스, 세익스피어, 제아미가 연극의 3대 천재로 꼽은 인물들이다.)

 

제아미 모토키요는 15세기 사랑에 적합한 악기를 고안해 냈다.  가죽이 아니라 비단으로 씌운 북이다. 그것은 침묵의 악기다. 그 북은 교토 황궁의 뜰에 있는 월계수 고목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 세월이 흘러 나무는 거대해 졌다. 월계수는 호숫가에 심어져 있었다. 공주가 단언하기를, 만일 누군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북을 살짝만 두드려도 천으로부터 소리가 생겨나, 퍼져서 규방에까지 크게 울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 공주는 침상을 떠날 것이다. 공주는 궁 밖으로 나갈 것이다. 공주는 사랑하는 님에게 몸을 맡기러 호숫가로 달려갈 것이다.

정원사가 손으로 천을 두드려보니 허사여서, 가장 깊은 침묵만을 끌어냈을 뿐이다. 그는 호수 표면에 비치는 북 그림자 속으로 서슴없이 몸을 던진다. 호수가 그를 삼킨다. 그 위로 침묵이 감돈다. 호수 표면이 마지막 잔물결까지도 지워버린다. 그러자 차츰차츰 북소리가 공간을 채운다.북소리가 공주의 귀에 닿자 그녀는 달려나가 자신의 옷을 찢고, 미친 듯이 익사자를 욕망하며, 이번에는 자신이 북을 울려 죽은 자를 불러내려 한다. (pp191-192)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문학과 지성사, 2009)은 정말 명문장의 보고이다. 너무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나의 주목을 끈 것은 위의 문장들이다. 키냐르는 이 책에서 전형적인 소설쓰기 형식을 탈피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이게 소설인지, 수필인지, 단막극인지, 에세이인지 전혀 구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행간을 채운 문장들은 모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활자로 굳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문장들에 경탄을 쏟아 놓게 된다.

 8가지 사랑의 증거와 결과가 위와 같이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특히나 키냐르가 소개해 주고 있는 제아미의 저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다. 누가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형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p 233)

 

어떤 사람들은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여, 우리는 개별자로서만 개개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타당한 주장을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며, 사랑에 대한 그 말이 증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덧붙이고 싶다.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번 증오해 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나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p 373)

 

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라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중략)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넥이 아닌 다른 제마넥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p 396)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399)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  이 소설의 주인공 루드빅은 이 짧은 농담으로인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삶의 추락은 갑작스럽게 당하는 사고와 같다. 삶의 사건들은 우연적이면서 부조리하다. 이 소설은 루드빅의 농담을 통해 이를 빼어나게 입증하고 있다.

 쿤데라는 이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 "복수, 망각,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역사와 인간의 관계, 본래 행위의 소외, 섹스와 사랑의 분열 등 실존의 주제를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새롭게 내리쬐고 있다."라고 했다. 작품을 읽어보면 쿤데라의 말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 인용은 그 중 일부일 뿐. '실존의 주제를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새롭게 내리쬐'서 그런지는 몰라도, 회독수를 늘릴 수록 <농담>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 "쿤데라의 소설들은 아편이다! 건조한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쿤데라 만쉐이~!"

 

 

 

 

순수한 도덕은 유일하고 보편적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무엇이 거기에 부가되지도 않는다. 순수한 도덕은 역사,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떠한 요인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순수한 도덕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며, 무엇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조건을 부여한다. 요컨대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도덕은 순수한 도덕의 요소들과 다른 요소들이 다양한 비율로 혼합된 것이다. 이 다른 요소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대개는 종교에서 온 것이다. 어떤 사회의 도덕에서 순수한 도덕의 요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면 클수록, 그 사회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회에 보편적인 도덕의 순수한 원리가 충분하다면, 그 사회는 세상이 다할 때까지 존속하게 될 것이다. (p40)

 

<소립자>(열린책들, 2006)를 보고 우엘벡의 소설들을 컬렉션했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순수문학에서 추구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것(예컨대 사랑)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거대 이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담아 낸다. 이 소설은 정밀한 플롯 구조를 갖는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 형식을 빌은 일종의 서구 성문화 비판서다. 사실 성은 매우 개인적인 영역인데, 우엘벡은 이를 사회 윤리와 연결시키는 시도를 한다. 엄청난 시도인데도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소설화시켰다. "다른 소설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은 거대한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는 줄리언 반스의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였을 거 같다. 위 인용은 그래서 꽤 인상깊게 내게 다가왔다.

 

헌데, 우엘벡의 주제의식은 그 전작인 데뷔작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일기형식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우엘벡의 주제의식이 집약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표출된 작품이라 아주 의미심장하게게 읽었다. 솔직히 문학적 기교는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의 냉소적 비판의식은 거칠지만 상당히 빛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목적을 위해서는, 말하자면 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잔가지를 과감히 쳐내야 한다. 단순화시켜야 한다. 세부 사항들을 하나씩 파괴시켜야 한다. 나는 단순한 역할을 통해서 역사적인 변화에 일조할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세상은 획일화 된다. 원거리 통신 수단은 점점 발달하고, 아파트 내부는 편리한 기구들로 나날이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줄어 간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21세기가 어떨지 뻔하다. (p21)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의 효과는 엄밀히 똑같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데 성공한다. 완전히 자유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실업과 가난 속에 허덕인다. 완전한 자유 섹스체계에서는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 행위와 외로움 속에서 늙어 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영역의 확장이다. (pp 118-119)

 

 <투쟁영역의 확장>(열린책들, 2003)은 <소립자>와 비교해서 봐 줄 수 없는 수준이다. 그냥 에세이 형식의 글을 소설형식에 담으려고 애쓴 습작 수준이다. 하지만 우엘벡의 이 데뷔작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가 출간 한 작품들 속에 한결같이 드러나 있는 주제의식의 맹아가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그가 작품 속에서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자본주의와 성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는 '투쟁영역의 확장'이다. 우엘벡 철학의 근간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겨있다. 위의 인용은 이 책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소립자>를 읽어 봐도 <어느 섬의 가능성>과 <지도와 영토>를 봐도 우엘벡은 결코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우엘벡 철학의 결정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우엘벡 소설에 꽂히게 된 이유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에 있다. 우엘벡은 <투쟁영역의 확장>에서 이를 직접 밝혔다.

 

나는 어떤 미묘한 심리 묘사로 당신을 매혹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나의 세심함과 유머 감각으로 당신에게 박수를 받아 보겠다는 욕심도 없다. 마음이나 외모나 성격 따위의 다양한 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구사하는 것은 작가들의 몫이다. 나는 그런 작가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런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해나가다 보면 다양한 인물을 자세히 그려 나갈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아주 시시한 일들이라고 변명한다. (중략) 목적을 위해서는, 말하자면 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작가지를과감히 쳐내야 한다. 단순화시켜야 한다. 세부 사항들을 하나씩 파괴시켜야 한다. (투쟁영역의 확장, p 20)

 

아마도 줄리언 반즈가 "다른 소설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은 거대한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는 평가는 이래서 나왔나 보다. 나는 이런 작가의 이런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신경숙과 공지영의 소설들을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순수문학 위주(인간의 감정을 아주 디테일하게 그리는 뭐 그런 계열)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엘벡 소설들을 싫어하는 것 같다. 주위에서 우엘벡 소설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들을 보니 이런 편견이 생긴 듯]

 

 

 

 

글을 쓴다는 것은 팽팽한 아름다움의 줄위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나아가는 일이야.한 편의 시, 하나의 작품, 비단 위에 쓰여진 한 이야기의 줄 위로 말이야. 글을 쓴다는 것은 책의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나아가는 일이야. 가장 어려운 것은 땅에서 몸을 띠워 언어의 줄위에 올라서는 것도  평행봉과도 같은 붓에 의지해서 균형을 잡는 것도 아니지. 때때로 쉼표의 낙하나 마침표의 장애물 같은 남모르는 현기증으로 끊어지곤 하는, 곧은 선을 따라 똑바로 나아가는 일도 아니지.  그래,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글이라는 팽팽한 줄 위에 한없이 머무르는 것, 꿈의 고도(高度)에서 삶의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단 한 순간이라도 상상의 줄에서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야. 참으로, 가장 어려운 일은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지. (pp98-99) 

 

사실, 막상스 페르민의 <눈>(현대문학북스, 2002)은 조경란 작가가 아니면 있는 조차 모르는 작품이었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얄팍하고 여백 많고. 더욱이 무명 작가이기에. 하지만 오래 전 조경란 작가의 추천으로 소설을 찾았더랬다. 2008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절판이었다. (알려지지 않고 유명한 작가가 아닌 책들은 소리소문 없이 절판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빌려가서 잃어버렸다나 뭐라나. 그러다가 2009년에 지인의 집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 읽은 기억이 있다. 읽으면서 하도 멋진 동화였기에 인상이 깊었고, 정말 뇌에 깊이 박힌 바로 저 문장으로 인해 이 책을 소장하려고 무진장 애써왔다. 헌데 뜻밖에도 알라딘 일산점에 책을 반품하러 갔다가 거기서 만난 것이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집에 오는 도중에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다시 읽으니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발견해서 감동이 2배였다. 그리고 바로 저 문장들. 플롯 구조 속에서 저 부분을 발견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전율이 일 정도였으니. 숱한 명작 소설의 명문장들을 봐 왔어도 이처럼 시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만난 경험은 정말 드물다. 특히 글을 잘 쓰고 싶은 이들에게는.

 

 

 

뭐, 이쯤에서 줄여야 겠다. 아직 언급하지 못한 작품이 부지기수다. 움베르코 에코의 <푸코의 진자>, 우나무노의 <안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줄리언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 등이 이 페이퍼를 쓰기 위해 꺼내 놓은 책들이다. 십여 권이 훌쩍 넘고, 분량상 더 쓰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어쨌든, 대충 인용된 부분들을 옮기다 보니, 나의 소설 취향이라는 것이, 잘 짜여지고, 심오하고 정교한 내용의 작품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 단언할 수 있는 건, 진부하고 평범한 주제에 대해 디테일하게 접근하는 작품들은 매우 싫어한다는 거. 하지만 의외로 극단적이거나 삐딱한 내용에 대해서는 관대한 듯하다.

 사실, 이 작업을 한 이유는 내가 아직 모르는 작품들을 찾아 읽기 위해서다. 잘 모르는 작가들을 찾아야 겠는데,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소설 취향을 알고 있어야 겠기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자평한다.

 

 

ps.

혹시, 이 페이퍼를 보신 분들 중에서 제 취향에 부합하는 소설을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추천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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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26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멕 메카시를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yamoo 2014-03-28 11:51   좋아요 1 | URL
오~ 메카시 소설이 좋다고 추천해 주는 지인이 있었는데...
흠...메카시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을 제일 먼저 봐야 하는 지 추천해 주세요. 그것부터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곰발님~^^

lmicah 2014-07-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제가 닿을 수 없는 문학의 깊이와 포스팅의 깊이네요. 알라딘에는 정말 고수분들이 많으세요^^ 제가 읽어 본 책은 <인간실격>이 다네요.ㅎ

yamoo 2014-07-24 19:21   좋아요 1 | URL
헐~ 그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을...제 포스팅을 보시면 알겠지만 수준이 매우 얕습니다. 왜냐면 제 모토가 얕지만 넓게 알자거든요~^^;;

아마도 관심사가 다르셔서 그럴듯합니다. 저는 lmicah님이 읽으신 책 중에서 겹치는 책이 별로 없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