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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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래 전에 읽었다.(오래 전이라도 불과 3년 전이다.) 여러 단상들을 적어 놓았던 기억이 있다. 며칠 전 이 단상들을 마구 적어 놓은 노트를 발견했다. 주로 물음으로만 점철된 감상이었는데, 지금 보니 꽤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갖고 텍스트를 읽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영미 문학에서 샐린저의 이 작품만큼 많이 읽혀지고 수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은 작품은 별로 없다고 한다. 당대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읽혀져 왔고, 매우 철저하게 논의되어 왔단다. 청소년, 교수, 그리고 전문적인 비평가 모두 이 작품에 찬사(또는 혹평)를 보내고 있다.


여기 알라딘 리뷰만 봐도 정말 많은데 대부분 찬사 일색이다. 명사 추천 리뷰도 어찌 그리 많은지. 피츠제럴드 하면 <위대한 개츠비>이듯이(그래도 피츠레절드의 여타 작품은 꽤 된다.) 샐린저 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샐린저는 이 책으로 명성을 얻은 이후 다른 어떤 작품도 쓰지 않은 듯하다. 작품 하나로 이렇게나 유명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어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 한 권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리도 많이 읽고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지. 그 실체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듯하다.


도대체 샐린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영미권에서 그렇게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호밀밭의 파수꾼>에 집약되어 제시되고 있다고 하는 그 문제의식이 뭘까? 샐린저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이따위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을 읽어 나갔다. 답은 얻지 못하고 아래와 같은 나만의 질문들만 쏟아낼 뿐이었다.


<1>

이 작품은 주인공 홀든 스코필드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기 전 몇 주의 자신의 행적을 회상해 보는 형식으로 돼 있다. 홀든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정신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관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질문을 해대고, 세상을 좋은 놈과 나쁜 놈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정신도 꽤 불안하다. 그래서 후반부에 보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홀든은 정신병원에 입원할 만큼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일까? 병든 사회가 건전하고 순수한 개인을 이상자로 몰아간 건 아니고?


 

<2>

이 작품에서 홀든 코울필드는 자주 뜬금없이 뉴욕 남부 센트럴파크에 있는 오리 얘기를 하곤한다. 선생님에게 혼나거나 훈계를 듣는 와중에도 역시 오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홀든이 택시를 탔을 때 그는 운전사에게 오리에 대해 묻는다. 첫 번째 택시 운전사는 무시했고, 두 번째 택시 운전사 호르비츠는 오리의 향방에 대해서 답해준다. 코울필드는 묻는다. “뉴욕 남부 센트럴파크 연못 위에 있는 오리들은 겨울이 되면 어디로 갑니까?” 이에 택시 운전사 호르비츠는 물고기로 화제를 바꾼다. 그러나 홀든은 물고기와 오리는 다르고, 설령 물고기라고 한들 그들은 얼음으로 덮인 연못에서 뭘 하느냐고 또 묻자 호르비츠는 홀든과 물고기 사이를 분명히 관계시켜 준다.

 이렇게 홀든의 입을 통해 센트럴파크 공원 연못의 오리가 자주 언급되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 같다. (근데, 명확히 뭔지 모르겠다.) 이 뜬금없는 오리 얘기는 홀든 자신의 상황이 오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상기하려는 메타포 같은 것이 아닐까?


<3>

이 책의 제목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읽는 내내 책 제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책 중간에 책의 타이틀과 연관된 내용이 나오기는 한다. 홀든의 동생 피비가 “오빠는 도대체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홀든 코울필드는 낭떠러지 바로 옆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어린아이들을 잡아주는 캐쳐가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뉴욕에서 산 기다란 챙이 달린 사냥모를 항상 거꾸로 쓰고 있다. 야구에서 캐쳐가 모자를 거꾸로 쓰는 것처럼 그는 모자를 쓰는 것에서 캐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책 전체를 봐도 그는 캐처로서의 삶을 전혀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끝에 가서는 캐처로서의 삶을 그만두는 것으로 그려진다(통나무집을 짓고 혼자 살겠다는 결심을 접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책 중간에 어떤 초등학생이 흥얼거리는 로버트 번즈의 시로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핵심어구는 잠깐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샐린저는 왜 이 책의 타이틀을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명명했을까? 호밀밭은 낭떨어지도 아닌데..


<4>

홀든 코울필드의 감수성과 직관력은 어른들의 교훈적인 태도 속에서 오히려 ‘가짜’를 발견해 낸다. (실로 대단한 통찰력이다.) 이 책에서 가짜에 대한 반응은 어떤 이론에 기반한 비판이 아니라 거의 직관에 가까운 지각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코울필드는 이 가짜라는 말을 절제되지 않은 자기중심주의와 뒤따르는 이중적인 가치 기준, 다시 말해서 허세, 폭력 등으로 대변되는 ‘물질주의적 가치’를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그의 옛 스승인 안톨리니 선생이  뉴욕에서 방황하는 둘째 날 저녁에 그에게 들려주는 말은 애써 가짜가 아니라고 부인하려 한다. 선생님들의 훈계는 홀든의 생각대로라면 가짜인데 말이다. 어떤 말인지 안톨리니 선생이 16세 먹은 소년의 목적없는 방황과 가짜에 의한 정신의 시달리는 홀든에 대한 충고를 거들떠 보자.


“무엇보다도 너는 네가 최초로 인간행동에 의해 당황하고 상처받고 병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런 문제로 괴로워한다는 점에서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지금 네가 그런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아 오고 있어.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 받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는데, 너는 네가 원한다면 그런 기록으로부터 배울 수가 있을 거야······ 그건 참으로 서로 주고받는다는 아름다운 과정 일 테지. 그리고 그건 교육이기도 해. 그건 역사이고 시(poet)지.”


과연 이와 같은 일반화된 교훈적 말은 진실인가? 아니면 (홀든의 생각처럼) 가짜이고 위선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훈육?


<5>

이 작품의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다. 양면성을 가진 이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키(key)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 코울필드는 이른바 엉터리들, 위선자들, 속물들, 지저분한 인간들로 가득 찬 학교를 그만둔다. (와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순수한 홀든 코울필드는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 한다. 홀든은 소통할 수 없는 그들로부터 고립된다. 그럼으로써 소외감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을 어쭙잖은 우월감으로 해소하려 한다. 오로지 소통 가능한 이는 그의 여동생 피비뿐이다. 그런데 문제를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사실은 홀든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이해를 갈구하면서도, 그의 갈망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너무도 소극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며, 그들과 교제를 맺는 일에 매우 수동적이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섬세하다고 할까. 하지만 그의 그런 면이 문학적인 글쓰기로 연결되어 독창적인 면을 보인다.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하지만 작문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인물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거 같다. 소위 말하는 청소년의 성장 소설로 가볍게 분류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오히려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관한 소설이 아닐지? (개인의 삶과 사회의 갈등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부조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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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10-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호밀밭의 파수꾼, 을 정말 좋아했었기에.. 그나마 조금 생각한 부분을 적어보자면, 1번의 경우 yamoo님이 생각하신 것이 맞는 듯 합니다. 그러나 홀든 본인이 정말 건전하고 순수한 인물인지는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반항하는 인물의 재사회화, 정도의 강압적인 의미로 정신병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3번의 경우 catcher를 홀든 콜필드가 잡는 사람, 으로 여겼기 때문에 저런 비유가 나온 것으로 압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을 호밀밭의 잡는 사람, 으로 여겼던 콜필드는 잡는 사람, 이 아니라 파수꾼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잡는 사람, 이라는 뜻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이 잡는 사람, 이라는 의미에서 홀든의 꿈이 확장됩니다. 어떤 위험지대에서 서서 순수함을 잡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건 마지막의 피비, 에 의해서 구현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5번의 경우.. 이건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청소년때의 제가 저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을때는 홀든 콜필드가 스스로와 정말 비슷해보였습니다. 청소년들은 거의 대부분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가지던 것 같으니.. 청소년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하다못해서 소설의 진의와는 멀어질지라도 어른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문장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한 청소년 소설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합니다.

사실 저도 그다지 많이 아는 편이 아니라.. 그러나 특히 3번의 경우는 저도 한 번쯤 생각해본 부분이라서 이렇게 몇 마디 끄적여보았습니다. 홀든에 공감을 하느냐, 공감을 하지 못하느냐, 가 이 소설의 평에 영향을 줄 듯 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처음 읽었을때는 홀든에 너무 깊이 공감을 했고.. 두번째 읽을때에는 피비가 너무 좋았습니다. 세 번째 읽었을때는 옛날에 읽었던 그런 느낌이 제대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홀든에 공감하기에는 너무 커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떤 틀을 떠올리지 않기가 힘이 드는 나이가 되버린 것 같기도 하고

yamoo 2013-10-18 17:07   좋아요 0 | URL
저의 문제의식에 이렇게 답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연님!
무려 3번을 읽으셨군요~ 우와~!
전 이거 작가가 뭘 전하려는 건지, 또 저 제목 때문에 답답해서 연속으로 2번 읽었습니다. 근데,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저런 물음만 가득히~~ㅜㅜ
가연님의 답변 때문에 1번과 3번을 잘 정리했습니다.
정성된 고견 정말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3-10-1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유명한 작품을 아직 읽어 보지 못했어요. 읽어야 할 책으로 찜해 놓기는 했는데...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인물이 또 있으니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이죠.
저는 이 작품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한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사회(학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죠. 아무도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읽으면서) 주인공 한스에 대해 연민과 애정을 가졌어요. 고독해 보여서 친구가 되어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님의 글을 읽으니 그 작품이 생각났다는...
꼭 <호밀밭의 파수꾼>도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

yamoo 2013-10-18 17:12   좋아요 0 | URL
아, 페크님은 아직 못 접해 보셨군요!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홀든과는 많이 달라보여요. 이거 읽으시면 같으면서도 다른 두 인물을 비교해 보실 수 있는 기회를 얻으시겠어요~^^

저도 이게 하두 유명세를 탄 작품이라 읽어 봤는데,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보다 더 좋은 작품들도 많은데....어쨌건 페크님이 이 소설을 읽으신다면 어떤 느낌이실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읽으신다면... 한스와 홀든의 비교 리뷰가 가능하실 거 같습니당~ 여튼 어여 읽어보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