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의 밤 - Night on the Galactic Railroa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겐지의 봄- 미야자와 겐지 탄생100주년 기념 작품> 
         감독: 가와모리 쇼지

1.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99년 9월. 학교에서 있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영화축제 에서였다. 한 시간 미만의 짧은 어둠속에서, 난 그때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시적인 대화와 몽환적인 영상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가! 그 속에서 던져지는 수많은 은유와 보편적 메시지들을 접하면서 영상언어라는 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때 나를 압도했던 영상의 잔해들이 너무도 강력히 각인되어 있어서 인지, 나는 어제 한 번 더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다시 보았지만 역시 명작은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전에 흘려보냈던 겐지의 말들을 음미하면서 보니 더욱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미야자와 겐지 탄생 100주년 기념 작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솔직히 이전에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이름만 알았지, 그가 어떤 작품을 썼는지 조차 몰랐다. 아직도 겐지의 작품을 접하진 못했다. 하지만 미야자와 겐지가 일본 문학에서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겐지의 작품들이 속속 번역 소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전혀 몰랐던 사람을 이 작품을 보고 최소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고양이 겐지를 통해 미야자와 겐지가 평생 무엇을 추구 했는지, 그리고 그의 이상과 현실사이의 고뇌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 한 작가의 전기를 이렇게 에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빼어나게 담아 전달할 수 있는 가와모리 쇼지 감독의 역량이 돋보였다. 

 현란한 영상과 아름다운 시적 언어의 유희를 한껏 즐길 수 있는 이 작품을 좀 더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의도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고양이로 대체되어 있다.)

2.

 겐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그는 독특한 스타일로 아이들을 가르쳐 아이들 사이에서 이상한 선생님으로 간주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겐지가 가르치는 내용들은 생생한 생명을 전달하는 삶의 지식이다. 인간이(고양이지만)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되어야 한다는 물아일체의 정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작은 것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이 세상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출발점 이었다. 교사로서의 그의 삶은 '참 교육의 정신'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겐지는 냉혹한 현실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소극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쓰고 또 쓴 글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조차도 그를 버렸다. 그의 글들은 그 나름대로의 세계를 보는 정신의 궤적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를 이해해주는 단 두 사람이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토시와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카나이라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그의 후원자 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토시가 지병으로 눕게 되고 카나이가 자신과의 다른 길을 가게 되자 겐지는 좌절하게 된다. 특히 카나이와의 결별은 좌절의 깊이를 더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카나이와 겐지의 관계는 짧게 나타나지만 상당한 무게를 갖는 만남이고, 이후 겐지가 갈등하는 전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카나이: 난 언젠가 꼭 천상계처럼 아름다운 농장을 지어서 거기서 연극이나 축제를 하고 새로운 농촌예술을 만들어 내 보고 싶어. 어의 너의 꿈은?  

 겐지: 나의 꿈은 이 세계의 배후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진실한 힘의 수수께끼를 풀어 밝히고 그 길을 나아가고 싶어. 
 카나이: 멋진 꿈이군.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 길을 가는데....? 
 겐지: 아직 그 방법을 찾지 못하겠어. 
 카나이: 그래?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찾을 수 있을거야. 
 겐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카나이: 물론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군.   


   (3년후) 겐지는 도서관 어느 한적한 곳에서 군인이 된 카나이와 조우한다. 
 

겐지: 어째서 함께 갈 수 없다는 겁니까? 
 카나이: 이 세계에 정말로 위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면 왜 사람은 서로 다투는가? 왜 생물은 서로 죽이고 서로 먹는 것인가? 
 겐지: 그 그것은... 그것도 또 진실한 힘의 의지인지도.. 아니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같이 가지 않았습니까? 
 카나이: 당신은 마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군요. 이상이라는 구름 위를...  


 그렇다. 카나이와 겐지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할 때부터 이런 이별은 예견된 것이었다. 카나이의 꿈은 농장을 지어 농촌예술을 만들어 내는 현실지향적인 것이었고 구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겐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배후의 진실한 힘을 찾겠다고 했다. 너무 이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카나이는 현실을 냉혹히 바라보는 군인이 되었고 겐지는 이상을 찾아 헤매는 작가가 되었다.  

  카나이의 와의 결별과 함께 겐지의 높은 눈은 땅을 향하게 된다. 그는 정식 교사를 그만두고 현실에 발을 붙이기 위해 농사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밤이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한다. 이상만을 추구하던 겐지에게 땅의 일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주위사람들의 비아냥거림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농사를 위해 그가 들인 모든 노력들은 비와 바람으로 망쳐지기 일쑤였다. 비와 바람을 피해 일궈놓은 농작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아 버린다. 그를 도와 농사일을 도왔던 학생들에게 그는 말한다. "표시를 세우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열심히 황무지를 일구고 소중히, 소중히 야채를 기르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야채의 목숨을 뺏앗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음산한 날, 밭을 갈던 겐지는 땅에 쓰러진다. 그리고 또다시 환상에 젖어들며 독백한다. '거봐 역시 허수아비조차 되지 못했군. 끝이 무거워 땅속으로 가라않는 것 같군. 조금이라도 모두가 같은 것을 먹으려하거나 하늘나라 사람과 결혼한다던가 허세부려보기도 하고, 하지만 모두 진실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분명 그걸로 뭔가 쫓는 일이 있는 게 아닐까하고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지.'

(환각이 계속된다) '나도 여기 까지인가? 땅바닥에 붙은 저 새까만 구름속... 나로서는 안돼는 것인가? 컴컴한 큰 것을 나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인가? (환각 계속) 깜박이고 있는 것은 나인가? 세계인가? 빛은 그대로 있으나 그 전등은 잃어 버리고, 이것은 변합니까? 이것은 변합니다. 이것은 변합니까? 변합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변합니다. (그의 살아온 행적이 오버랩 되어 스쳐지나간다) 결국  모두가 말하는 대로인가? 토시... 잘 되지 않아.'

 이제 이야기는 종착역을 향해 치닫는다.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에서 겐지는 괴로워한다. 이상을 추구하던 그가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를 무능한 지식인으로 몰아간다. 멍하니 누워있는 겐지의 귀에 빗물을 떠서 갖다달라는 토시의 환영이 들린다. 토시를 위해 눈을 떠먹이는 겐지를 또 한명의 겐지가 보고 있다.

숨을 거두는 토시. 슬픔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마음을 담아 "새로운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여! 숨막히는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이 은하계를 풀어놓아라."라는 겐지의 외침과 함께 이 영화의 가장 압권인 영상이 화면을 수놓는다. 땅의 철로가 갈라지면서 땅속에서 열차 두 대가 하늘로 올라간다. 

 어디까지라도 진정한 행복을 찾으러 갔지만, 눈덮힌 밭에서 깨어난 겐지. '분노의 씁쓸한 그리고 푸르른 4월의 기층의 빛 저 아래를 침 뱉고 이를 갈고 왕래한다. 나는 한 사람의 수래인 것이다.' 아련하고 신비한 음악과 함께 겐지는 뛰기 시작한다. 4계절의 변화가 그가 뛰는 길을 수놓으면서... 


                                                                3.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요절한 작가. 순수한 열정과 진정성 넘치는 이타심으로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미야자와 겐지. 그가 추구한 이상과 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미야자와 겐지의 전기다.

 김훈의 에세이를 보는 것처럼, 작고 평범한 사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시적인 표현들이 작품전체를 수놓고 있다.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덧붙임] 
 작품을 보고 감동한 것만큼 글에 담지를 못해 한탄스럽습니다. 하여간 이 작품은 굉장한 작품입니다. <메모리즈>의 '대포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강한 상징적 영상들로 가득 차있지만 작품 색깔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호>, <은하철도 999 극장판>, <우주왕립군> 등 캐릭터의 대화들이 아포리즘을 방불케하는 몇 작품들이 있지만, 화려하고 상징적인 영상과 함께 전달하는 이 <겐지의 봄>에 비교해서는 그 주제의 진정성과 소재의 중량감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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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8-2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저는 저 애니를 보지 못 했어요. 급 땡기는군요...

yamoo 2010-08-20 09:08   좋아요 0 | URL
이거 완전 대박입니다! 만화책도 있는데, 만화책은 한 권 짜리구요...애니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이 영화는 겐지의 전기에요! 것두 수준높은 전기! 마크로스 감독한 감독이 만든 작품인데, 저런 영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작품입니당~ 마고님 꼭 구해보시길~ 후회 절대 안할 거라 보장합니다!ㅎ

stella.K 2010-08-2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는 IP TV에서 하면 당장 볼텐데...OTL

yamoo 2010-08-20 13:42   좋아요 0 | URL
ip티브로는 보기 힘들어여~~ 렌탈 숍 가면 있습니다. 빌려 보도록 하시와여~~^^ 이건 케이블티브에서도 안하더군요..이상하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