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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1
찌는 듯한 폭염과 열대야 현상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어 심신을 지치게 하고 있다. 활자 속에 파묻혀 잠시나마 더위를 잊는 것 말고는 정말 다른 대책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 읽다가 지루해서 포기했던 몇 권의 책 중에서 골라낸 것이 움베르토 에코의 <전날의 섬>(열린책들, 2001)이다.
에코의 책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초반 100여 페이지 까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인내를 요하게 한다. 그 지루함으로 인해 뒤에 오는 지적 충격과 놀라움을 맞보지 못한 독자가 얼마였던가? 나 역시 <푸코의 추>를 읽다 포기한 경험이 있기에 이 말을 하려니 좀 머쩍은 감이 있다.
어쨌든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편인데, 에코의 소설들은 꼭 찾아서 읽는 이유가 하나있다. 바로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작가 이문열은 언젠가 교양주의로 표현했다. 소설을 읽고 나면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것! 에코의 작품들은 이것을 충족시켜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소설들을 읽고 나면 한없는 지식의 계보를 산책한 무한한 즐거움이 있다. 넘치는 기지와 절묘한 복선, 의외의 상황설정, 퍼즐을 맞추는 듯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는 철학적 언명들!
난 <전날의 섬>을 다시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을 치면서 보았다. 무거우면서도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에피소드들 속에 녹아 있는 철학적 사색의 흔적을 만날 때면 줄을 치지 않고는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한편, 이 소설은 장르구분을 무색케 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구구절절한 사랑을 전하는 연애소설이고, 심오한 철학을 쉽게 소설화한 철학소설이며, 성경을 과학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분석한 종교소설이기도 하다.
또한 실타래처럼 얽힌 사건 하나하나를 풀어가는 추리소설이며,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자아성찰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거대한 이야기 구조를 이루고 있다.
2
에코는 중세에 대해서 주로 얘기한다.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세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중세를 통해 오늘을 재조명해 보고자 하는 그의 창작의도에서도 연유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에세이를 썼는지도..)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 역시 갈릴레이 시대(17세기)의 중세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대의 학문적 풍토를 대변하는 황당한 학설이 매우 많이 나온다. 지금의 과학적 지식과 논리적 사고로 생각하면 엉터리 같은 이론들 이지만, 그 당시는 진리였다.
과거에는 진리였던 것이 현재 쓸모없는 지식으로 폐기 처분 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지금 우리가 따르고 추종하는 진리와 학문이 다가올 시대에 황당한 허구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입장에 선다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된다.
어쨌든 소설 속의 상황에선 그와 같은 일련의 이론들이 진지한 이론체계로 논의된다. 그런데 그 중요한 논의 중의 하나가 ‘영원’이라는 시간관념이다.
주인공 로베르토는 경선의 비밀을 찾고 있다. 경선이 무엇인가? 우리는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와 그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지구과학 시간에 하품을 하면서 배웠던 경도와 위도의 측정, 표준시, 그레고리력, 율리우스역, 대척점 따위의 개념들 말이다.
지학시간에 배웠던 이런 개념들은 사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한 우주의 원리 속에서 변하지 않는 표준을 찾으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 속에는 너와 나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에코는 바로 이런 노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소설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중세의 경도 측정은 엄청나게 어려운 첨단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컴퓨터와 인공위성으로 그 값을 간단히 산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 시대에는 경도 값을 계산해 내기 위해서 해와 달의 움직임,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 등 천문학을 연구해야만 알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었다. 현재 간단히 구할 수 있는 경·위도 측정의 이론적 토대는 바로 이 시대에 로베르토와 같은 사람들의 모험적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깨달았다.
경선은 지구상의 표준시를 측정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요 출발점이다. 이 출발점이 확정되면 적어도 이 지구상에는 시간체계라는 진리의 표준이 성립된다. 서울에서, 뉴욕에서 그리고 사모아제도에서의 시간 차이를 논리적이고도 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게끔 만드는 '영원한' 진리체계를 도출하게 된다. 그렇기에 경선의 비밀을 밝히는 것은 무엇이 진리의 기준인가를 찾는 시도였다.
3
시간 속에서 ‘나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는 자전적 성찰의 소설인 <전날의 섬>은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만이 이 절묘한 제목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 로베르토는 사모아 제도 근처의 좌초된 배 다프네 선상에서 한 미지의 섬을 바라보고 있다. 그 배와 섬 사이에는 날짜변경선이 가로지른다. 그러므로 로베르토 앞에 있는 동시간대의 그 섬은 날짜변경선에 의해 어제의 섬이 된다.
어제란 무엇인가? 과거다. 그런데 그 다프네 선상에서 섬을 보고 생각의 나래를 펴는 로페르토의 의식은 이미 그 섬에 도착해 있다. 즉, 날짜 변경선을 두고 대치하는 섬과 다프네 선상은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로베르토는 전날의 섬을 바라보면서 그의 지난 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다프네 선상에서 펼쳐진 그의 생각들은 전날의 섬과 함께 항상 자기의 시선 앞에 있게 된다.
너무도 절묘하다. 생각하고 인식하는 로베르토의 존재는 섬과 함께 전날이 되고, 다프네에 묶인 육체는 현재에 있다. 동일한 공간에 날짜변경선을 사이에 두고 시간의 의미와 무게가 어떤 것인지 로베르토를 통해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에코의 이 작품은 우리에게 시간의 관념과 그 속에서의 인간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오늘의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