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소설의 여주인공 강진희라는 인물이 있다. 직업은 대학교수.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인물. 소설속에서 그녀가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건 도통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시간에 쪼들려 사느냐. 그렇지도 않다. 3명의 애인을 만나고 다닐정도로 시간이 남아돈다. 시간에 쪼들릴 때는 학생들 레포트와 시험 채점을 하는 순간 뿐이다. 전형적인 도시의 인텔리이다.

소설은 강진희라는 여자의 부조리한 내면적 불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절절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여자를 위로하고 픈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 이유는 그녀가 택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 삶의 한 쪽 면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면의 우울함을 삶 전체로 확대시킨다.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가볍게 살자는 것'.

가볍게 사는 그녀에게 믿어야 할 대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어떤 것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랑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사랑에 대한 그녀의 신조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배신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허망한 말이다. 왜냐하면 배신은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 배신으로 완성되는 사랑이란 완전한 모순이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은희경은 사랑이 자기애의 표현이라 했다.)

그녀의 삶이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의 삶은 부조리하다. 항상 3명이 애인이 그녀의 주위에 있지 않을 것이다. 40대가 오고 50대가 올것이다. 아름다움이 꺼진 때가 왔을 때 여전히 그녀 옆에서 애인이 되어줄 남자가 있다는 건 불확실 한 일이다. 불확실한 일에 하루하루를 걸며 살아가는 것은 부조리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강진희는 <행복한 죽음>의 주인공 뫼르소와 닮아있다. 넘쳐나는 시간에 질식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 순간의 허망함을 타게하기 위해 일시적 사랑에 목메는 모습이 비슷하다. 두 인물 모두 부조리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뫼르소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었으며 행복하게 죽는 것이 그가 꿈꾸는 것이었다. 뫼르소의 삶의 과정은 부조리했지만, 그는 '바라는 것'을 죽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뫼르소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반면에 강진희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뫼르소와 똑같이 방황하는 삶이었지만 뫼르소처럼 인생에 있어서 바라는 바가 없었다. 행복해 지고 싶지 않았고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제의 본질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이 가는대로 기분 가는 대로 살 뿐이었다. 삶의 목표가 행복하게 죽고 싶은 사람과 아무 목표도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는 지극히 크다. 목표를 이루는 삶은 죽는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지만 목표 자체가 없는 삶은 인생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원받을 수 없다. 끝없이 방황하다가 거꾸로 지는 인생.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까.

허망한 강진희의 삶. 그 어떤 것도 강진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없어보인다. 자신이 만든 굴레를 끊임없이 도는 악순환의 업을 깨뜨릴 만한 내면적 의지 같은 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술과 담배와 섹스에서 삶의 위안을 찾는다. 부조리한 삶이 아니라고 어떻게 항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여자는 피곤하다. 그 어떤 것에도 설득되지 않는다.

교수면 충분히 멋지게 살 수도 있다. 더군다나 3명의 애인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여자라면 더욱 그렇다. 시간도 넉넉하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교수가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는 유아론적이다. 그녀는 남아 도는 시간에 자기가 추구하는 삶이 뭔지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가볍게 살고 싶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볍게 산다는 건, 전경린이 말한대로 창녀가 아니면서 결혼한 유부남을 사랑임네하고 주장하는 그런 여자의 삶을 산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볍게 사는 게 삶의 목표인가? 이것처럼 부조리하고도 허망한게 또 있을까.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려도 그녀가 전혀 안쓰러워 보이지 않다. 아무리 개인적인 삶의 원칙을 존중해주고 싶어도 강진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그녀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누리기 위해 모든 시간을 다 바쳐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지 난감하다.  

뭐,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내팽게치고 삶이 무의미하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강진희의 삶은 사랑 때문에 귀중한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일갈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 무의미한 그것을 얻기 위해 시간을 채우는 나의 행위는 또 무엇이란 말인지...

강진희는 말한다. “나는 희망 을 갖는 게 두려워...희망을 갖는다라는 건 뭔가를 믿는다는 거야.....그 결과가 무엇이라 생각해? 삶은 믿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배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있는 거야."(pp259-260)
“나는 인생에 자신이 없어. 그래서 가볍게 살고 싶은 거야....희망을 가지면 난 약해져."(260p)

이 말은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말과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무안하게 한다. 희망을 갖는게 두렵고 믿음에 부정적이고 인생에 자신이 없어 가볍게 산다는 그녀에게 삶의 의미 운운하는게 우스울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 그녀는 안정과 지루함이 두려운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외로움을 채워주고 긴장감 있는 섹스가 필요한 것 뿐이다.

결국 그녀는 삶의 문제에 정면으로 무딪쳐 보기보단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가볍게 살고 싶다고 한게 바로 그것이다. 가볍게 사는 사람에게 자유는 없다. 용서도 없고 연민도 없다. 희망은 조롱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희망을 갖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죽은 삶은 더러운 땅에서 질척거릴 뿐이다. 무슨 얼어 죽을 춤인가. 진흑탕 속에서 질척거림만 있을 뿐이다.

부인도 아니고 창녀도 아닌, 독립된 여성으로서 '사랑입네'하는 여자들의 대표 강진희. 그녀의 마음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은 남자가 있어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남자를 찾을 것이다. 불륜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해될 건 없어 보인다. 맞다. 그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은 비켜갈 수 없다. 방정식의 풀이 과정은 복잡해보여도 해는 곧 문제의 본질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불륜의 방정식이라는 게 있다. 윤성희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다. 항상 3이라는 숫자와 함께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불륜의 대명사 강진희. 그렇기에 그녀의 불륜의 방정식은 'y=3x', ' y=3x의 제곱', 'y=3x의 3승'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불륜의 방정식은 'y=3x의 3승'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극대점과 극소점을 갖는 3차방정식. 정점에 올랐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구조. 미분을 해도 나락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극소점인 진흑탕에서 영원히 질척거릴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