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견설 범우문고 141
이규보 / 범우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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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적인 말이라고 하면 귀부터 막는 사람이 있다.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는 것이다. 남을 훈계하려고 하는 책들은 그러고보면 인기가 없다. 그래서 고전류가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인 듯하다. 선생의 입장에서 감나와라 대추나와라 하니, 요즘 젊은이로서는 여간 거부감 드는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편견을 날려버리는 책이 있다. 누구도 읽기 싫어하는 고전에 속하는 <슬견설>(범우사, 2003)이 바로 그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저자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이규보. 이 사람의 가장 유명한 글인 <슬견설>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었고, 아무도 읽지 않아 보이는, 그래서 책이름으로만 유명한 <동국이상국집>속의 <동명왕편>이 국사책에 조금 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국어와 국사시간에 잠깐 듣고 영영 잊혀지는 사람이 이규보일 듯하다. 이규보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아하~ 알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이다. 헌데, 그 사람이 언제적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 거릴 사람이 많다. 조선시대 사람인가? 아니, 고려시대인가? 아님, 신라인가? 그렇게 대놓고 고민하면 자신의 무식이 폭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모르면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자. 

이규보는 무신 정권 시대를 살다간 고려의 문신이다. 한 때 사극 <무인시대>가 인기를 끌던 시대보다 약간 후대의 사람이다. 서구에서 십자군 전쟁이 한 창 이던 1168년에 태어났다. 23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1193년 서사시 <동명왕편>을 발표했다. 그 후 여러 하위 직책을 전전하다가 1232년 위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결국 문하시랑평장사라는 벼슬까지 오르고 정계에서 은퇴를 했다. 1237년에는 몽고침입을 불력으로 막기 위한 대장경 판각 사업에 참여하여 유명한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일찍이 그를 가리켜 서거정은 “동방의 시호(詩號)는 오직 규보 한 사람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고려사>집필자는 규보를 가리켜 “성질은 활달하여 생산은 돌보지 않고 술을 좋아하여 호탕하고 그 시문은 옛 사람을 본받지 않았다”고 그의 성격과 문학을 단적으로 평했다. 이 책 속에는 그의 그런 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성품과 그가 지향했던 삶의 모습이. 

근래에 와서야 수필이 하나의 문학 장르로 받아 들여 졌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수필은 문학의 범주에도 들지 못했다. 이규보가 이름을 떨치던 고려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동방의 시호라고 까지 불린 그였지만, 오히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잡설이라는 형식으로  독창적이고 교훈적인 글을 많이 남겼다.   

<슬견설> <차마설> <이옥설> <경설> <주객설> <뇌설> 등은 수필이라는 글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그 진수를 맛볼 수 있게끔 한다. 탁월한 비유와 풍부한 소재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설’이 끝날 때 “나는 후세 사람들이 이와 같은 허탄한 말에 현혹될까 염려하여 이 글을 써서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p37)라는 문구를 자주 섰다. 자신의 반성적 사고로 깨달은 인생의 지혜를 후대에 읽히게 하기 위한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맙게 다가온 구절이다. 

한편, 수록된 각 에피소드의 제목을 보면 뒤에 <통제기>, <슬견설>, <슬잠> 등 기(記), 설(說), 잠(箴) 등이 붙는데, 이는 신변잡기류의 글들 중에서 이보다 격이 높은 수필양식의 글을 일컫는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오늘날 우리에게 생소한 우리 한문수필의 다양한 형식을 살펴보자.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설’(說)과 ‘기’(記)가 있다. 양자가 비슷하지만 엄밀히 구별한다면 “설은 어떤 사실을 해설한다는 뜻이요, 기는 어떤 사물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기에는 <접과기>, <사륜정기> 등이 있는데 “자기의 이상을 모두 현실과 결부시켜서 쓴 것”이다. 설이 더 에세이 쪽에 가깝다. 특히 이규보의 설은 모두 예리한 비판과 심오한 철학을 지니고 있어 수필로서의 격조가 높다. <경설>, <슬견설>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서는 서간문이다. 특정인물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작자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고민, 처세의 비결, 대인 관계 등등 실로 다양한 인간 프로필을 엿볼 수 있다. 끝으로 제문이 있다. 제문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전하는 글이다. 여기 실린 제문은 짧기도 하나 진정과 정성이 살뜰히 서려 있어서 가히 현대에도 모범이 될만한다.(pp17-20) 

수록된 짧은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렇게나 먼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노 철학자가 생활의 지혜를 이야기로 들려 주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 부담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무릎을 치고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의 글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않으며, 속박을 벗어났지만 산만하지 않다. 현란하거나 무겁지 않으면서 날카롭고 반성적이다. 정열적이지 않지만 심오한 지성을 감추고 있으며, 흥미를 주지만 흥분시키지 아니한다. 미소를 띠게 하는 여운과 원숙한 삶의 지혜와 인생의 향기가 있다. 이런 글을 차와 함께 음미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인생을 사는 참 맛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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