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이미지의 운명>(현실문화, 2014) 제1장을 읽다가 심한 빡침을 감내해야 했다. 이걸 읽으라고 번역해서 내놓은 건지. 비문이 많아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보이기도 한다. 2,3장은 감내하면 읽을 만 하다. 하지만 1장. 이 1장이 문제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은 장인데 어떻게 이렇게 번역했을까?

 

일단 번역한 내용 중에서 두 페이지 정도를 옮겨 본다. 이걸 읽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면 철학과 미학에 정통한 교수급이겠지. 대체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3번 정도 정독하면 얼추 알 수 있지만 줄친 부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똑같은 변증법이 변성적 이미지들을 특징짓는다. 이런 변성적 이미지들이 식별 불가능성이라는 공리에 의지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 이미지들은 실현매체를 바꿈으로써, 이것들을 다른 시각 장치 안에 놓음으로써. 다른 식으로 강조하거나 말함으로써 오로지 이미저리들의 형상들의 자리를 바꾸러고 피할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예술의 이미지가 사회적 이미저리의 형태에 대해 특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차이로서 산출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세르주 다네가 마지막 텍스트들에서 미망에서 깨어난 고찰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것이 바로 이 물음이었다. 이미지의 흔하디 흔한 유통을 혼란에 빠드린다고들 주장하는 모든 형태의 비평.놀이.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유통 자체에 의해 첨가된 것이 아닐까? 비판적인 모던 영화는 이야기 전개와 의미의 연결을 중지시킴으로써 미디어 이미지와 광고 이미지의 흐름을 중단시키라고 주장 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Frmcoi Trulaut의 <400번의 구타Les Quasrc cens coups)(1959)의 마지막에 나오는 정지화면은 이런 중지의 전형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지에 찍힌 상표는 최종적으로 브랜드 이미지의 대의에 봉사한다. 컷과 유머에 기초한 절차들은 그 자체로 광고의 상투적 요소가 된다. 즉, 광고가 자신의 아이콘에 대한 숭배를 낳는 동시에, 이런 숭배를 조롱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 의해 이런 아이콘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품게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분명 이 논의는 결정적 유효성을 갖고 있지 않다.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정의상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56쪽)

 

예술의 이미지가 사회적 이미저리의 형태에 대해 특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차이로서 산출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전형적인 비문(非文)이다. 도대체 뭘 의미하는 문장인지 모르겠다. ‘이미저리’에 대한 정의도 없이 이미지와 이미저리에 대한 걸 논하고 있다. 입문자가 보기엔 이미저리가 뭘 뜻하는지 모른다. ‘특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차이로서 산출되는 것’이라니, 비문을 떠나 원문을 보고 싶게 하는 번역문이다.

 

이미지의 흔하디 흔한 유통을 혼란에 빠드린다고들 주장하는 모든 형태의 비평.놀이.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유통 자체에 의해 첨가된 것이 아닐까?

 

모든 형태의 비평, 놀이, 아이러니가 흔한 유통을 혼란에 빠뜨리는 주체들이다. 근데 이런 비평, 놀이, 아이러니가 ‘이런 유통’(?) 자체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유통’은 뭐고 첨가된 것은 무엇인가? 이후 기술되는 건 이 문장에 대한 예시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모호한 내용이다. 원문을 보고 싶은 번역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반대 논리가 지닌 자원을 신중하게 빌려아만 한다. 즉, 애매한 몽타주가 비판 적이거나 유화적 시선의 자유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직시적(명시적인) 대면의 논리를 따라 마주침을 조직해야만 한다. 또한 광고 이미지, 디스코 사운드나 일련의 텔레비전 영상에 커뮤니케이 션의 흐름을 가로막는 작품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커튼 뒤의 약간 어두운 작은 공간 속에 고립된 미술관 공간에서 이것들(광고 이미지, 디스코 사운드나 일련의 텔레비전 영상)을 재-현prscmter 시켜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효과가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작은 공간의 출입구에 작은 마분지를 붙이고, 관람자들에게 그들이 들어가려는 공간에서 보통은 그들을 매료시키는 미디어 메시지의 흐름을 지각하고 그에 대해 거리를 두는 법을 새로 배울 것이라는 점을 종종 명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장치의 효력에 부여된 이 터무니없는 힘은 그 자체로 미디어 이미지에 아무 저항 없이 잠겨드는, 스펙터클 사회의 가련한 얼간이라는 다소 단순하기 그지없는 시각에 부합한다. 이미지의 유통을 그다지 거창하지 않게 변경하는 중단, 표류, 재배치에는 성역이 없다. 그것들은 어디서나, 아무때나 생겨난다.

하지만 이미지들의 동시대적 변증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직시적 이미지의 변성(변신)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8쪽)

 

직시적(명시적인) 대면의 논리를 따라 마주침을 조직해야만 한다.

 

마주침을 조직해야한다? 한국어 문법 구조에 이런 조어법이 있을까?

 


광고 이미지, 디스코 사운드나 일련의 텔레비전 영상에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을 가로막는 작품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커튼 뒤의 약간 어두운 작은 공간 속에 고립된 미술관 공간에서 이것들(광고 이미지, 디스코 사운드나 일련의 텔레비전 영상)을 재-현prscmter 시켜야만 한다.


프랑스나 독일 철학 번역본에서 가장 많이 보는 유형의 문장이다. 직역을 했는데, 한국어 문법을 무시한 문장의 나열이다. 번역이 아닌 해석 작업이다.

 


왜냐하면 작은 공간의 출입구에 작은 마분지를 붙이고, 관람자들에게 그들이 들어가려는 공간에서 보통은 그들을 매료시키는 미디어 메시지의 흐름을 지각하고 그에 대해 거리를 두는 법을 새로 배울 것이라는 점을 종종 명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걸 번역이라고 했는지. 학부생의 원서 해석 과제와 대동소이한 문장이다. 번역자들은 왜 한국어 문법 공부를 하지 않는지 정말 의문이다.

 

이 번역본은 전체적으로 매우 난해한 문장들로 점철되어 있다. 1장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위와 같은 문장들로 채워져 있어, 읽기 여간 곤욕스러운게 아니다. 비문은 아니더라도, '이런 번역본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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