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책을 구매했다.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했던 책인데, 예스24 중고매장에 눈에 띈 김에 그냥 샀다. <바닷가에서>. 얼마나 대단한 서사가 담겨 있길래 그렇게 회자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다. 아주 읽어야 할 책이 쌓이고 쌓였지만.
읽기 전에 리뷰나 좀 검색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알라딘에 접속하여 리뷰와 페이퍼를 읽어 가는 중에 스코트 님의 페이퍼를 보게 됐다. 거기 실려 있는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
'한국 문학은 배타적이에요. 배운 언어로서의 한국어로 창작된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한국어 원어민만 작품을 쓰고, 그 원어민은 또 다 같은 민족이고. 그래서 완전한 타자가 들어올 때 언어가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한국 작가 중에 영어로 쓰는 사람도 나올 테고요. 그때가 오면 한국 작가가 한국 문학을 하는 게 어떤 의미인가 다시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문학에 대한 접근법이 달라지겠죠. 주제에 대한 과도한 집중도 그런 폐쇄성에서 나와요. 문학의 도구, 용기(用器)에 대해 주목하지 않고 오직 주제만 보는 거죠. 문예지에서도 언어 예술의 관점에서 문학을 논의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영화에서 감독과의 인터뷰를 하면서 그 장면을 왜 그렇게 찍었는지, 어떻게 찍었는지 기술적 문제에 관한 대화가 이뤄지고 끊임없이 관객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작자도 몰랐던 부분을 발견해 나가거든요. 그런데 한국 문학에서는 그런 기회가 드물어요. 플롯, 캐릭터보다 왜 썼느냐, 세계관은 왜 이러냐, 왜 이런 주제를 택했느냐를 작가의 개인사와 연결 지어 논의하죠.'
-2010년 김연수 작가 인터뷰 중에서
김연수 작가의 오랜 꿈 중에 하나는 한국에 거주 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서 한국 문단에 등단 시키게 하는 꿈이 있다는 말을 수 년 전 부터 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작가는 제주도 문학관에 초청을 받아 작품을 집필하면서 한 편으로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도 창작 공간을 들어 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을 넌지시 해왔다.
만약 김연수 작가의 꿈이 실현 된다면 다른 국가 출신에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외국인이 한국의 주요 문학상 을 수상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한국어는 다른 언어로 번역 출간 될 것이다.
과연 그런 날이 오게 될까? -scott님 페이퍼 중에서
김연수의 위 인터뷰 중 앞 5문장을 다시 한 번 보자.
한국 문학은 배타적이에요. 배운 언어로서의 한국어로 창작된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한국어 원어민만 작품을 쓰고, 그 원어민은 또 다 같은 민족이고. 그래서 완전한 타자가 들어올 때 언어가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한국 작가 중에 영어로 쓰는 사람도 나올 테고요. 그때가 오면 한국 작가가 한국 문학을 하는 게 어떤 의미인가 다시 생각하게 될 거예요.
너무도 신선한(?) 이 주장. 다른 사람도 아닌 김연수다. 김연수가 이런 말을?! 그래서 다시 읽고 또 읽어 봤다. 읽을수록 해괴한 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런 페이퍼를 쓰는지도..
몇 줄 읽지 않았지만, 김연수는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듯 보여서다. 한국문학이 배타적인 이유가 한국어로만 작품을 써서 그렇다는 논리인데, 도대체 이런 논증을 김연수에게서 본다는 게 정말 의외였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배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중세문학으로부터 축적된 그 지역 언어공동체로부터 자생적으로 태어난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배타성이 강한 문학일수록 타 문화에서 접해 볼 수 없는 신선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수밖에 없다.
아니, 언어 자체가 그렇다. 노벨문학상과 여타 상을 수여하는 걸 봐도 그렇다. ‘영어로 쓰여진 작품 중’운운 하는 수상작 기준이 그렇다. 물론 영어는 거의 공용어가 되다시피 했지만.
일문학도 그렇고, 아프리카 문학도 그럴 것이다. 꼭 다른 언어로 작품을 써야할 이유가 도대체 뭘까? 물론 한국어로 쓰여진 작품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량 유통되고 향유된다.
20세기까지는 한국의 문화적 역량이 크지 않아 한국 내에서만 즉 한국인이나 한국동포만 작가로 활동할수밖에 없었다. 독일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어를 배워서 프랑스 작가가 되고 그 작가의 작품을 프랑스인들이 읽는...뭐가 문제가 될까.
물론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영어나 타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영어 이외에 공용어를 채택하는 국가들이 꽤 되니까. 나라로 나뉘어져도 언어생활을 공유하는 민족 개념이 가미되면 언어적인 면이 크게 부각된다. 나라 의미가 많이 희석된다. 구 유고가 그런 나라였다.
문학에서 배타성은 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 배타적 속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적 특색이란 것이 약해질 수 있다.언어나 문화를 모르면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아예 몰라 향유할 수 없다. 이걸 배타성이라고 볼 사람이 어느 정도 될까.
그런데 김연수는 아닌 거 같다. 김연수의 논리는 타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가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작품활동을 해야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아예 미국 시민권을 받고 미국에서 작품을 영어로 발표한 사람은 제외될 거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강이 영어로 쓴 게 아니라 한글을 아는 영국인이 번역했기에 김연수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의 작품도 여기에 해당 안된다. 그는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모국어로 작품을 쓴 게 아니라 영어로 썼지만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문화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모국어인 한국어로 작품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는 제외된다. 당연하다. 배운 일본어로 일본에서 작품활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운 언어로서의 한국어로 창작된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김연수가 지적하고자 한 의도는 명확하다.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작품을 창작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거다. 이게 그의 배타성의 주된 근거다.
그의 바람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게 꿈이라고 하니, 그가 주장하는 근거가 어떤 것인지 좀 더 확연히 지지된다. 이게(배운 언어로서의 한국어 창작 작품) 김연수가 주장하는 한국 문학의 배타성의 주된 속성이다.
처음에 이 주장이 이해가 안 됐던 게 '배운 언어'라는 표현 때문이다. 한국어도 배운다. 어렸을 때. 근데 김연수는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운 것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어를 배워 창작활동을 하는 게 꿈이라니, 그가 말한 '배운 언어'는 제2외국어로써의 한국어라는 의미였다.
배운 언어로써(제2외국어로써) 한국어로 작품 활동을 해야 한국 문학이 배타적이 되지 않는가?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지 모르겠다. 김연수가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매우 배타적이라는 걸 그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배타적이라는 걸 너무 '언어'로 한정하고 있는 듯해서다. 이민진과 한강은 결론적으로 한국어의 배타성을 벗어났는데, 왜 그는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한국어를 배워 작품을 쓰는 게 꿈이라고 하는 걸까? 배운 언어로서 한국어 작품이 없다는 게 그렇게도 배타적이라는 것일까?
도대체 '배타적'이라는 걸 김연수는 어떤 의미로 생각하고 있는걸까?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라는 단어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지배적이다. 아까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언어를 모르면 배타적일수밖에 없다. 읽을 수도 없고 작품활동을 할 수도 없다. 모르는 언어니까!
그런데, 이런 현상을 두고 배타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배타적이라는 말의 핵심 속성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서로 아는 데 하나를 배척한다는 의미다. 이런 '배타적'이라는 의미를 김연수의 주장에 그대로 대입해 보면 매우 어색하고 해괴한 논리가 되 버린다.
왜냐하면 김연수의 논리는 아주 단순한데 있기 때문이다.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운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작품활동을 해서 한국 문단에 이들이 많아 지기를 바라서다.
다시 말해서 한국 문단에 외국인들도 구성원들로 참여해야 한국문학의 배탕성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이렇게 될 때에야 한국작가가 한국 문학을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는 거다. 정말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김연수는 배타적인 걸 매우 싫어하나 보다.
물론 배타적이면 세계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음을 함축한다. 근데 윤동주의 서시를 한번 보자. 한국인만 잘 아는 시다. 그런데 이 시가 한국어(모국어)로 쓰여졌기에 배타적인가?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면 배타적(읽을 수 없다!)일 수 있겠지만, 그 정서는 매우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라 생각한다. 단지 잘 알려져있지 않을 뿐이다. 오랜 시절 후진국이었으니까.
이건 매우 언어적인 현상이다. 김연수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어로 쓰인 작품이기에 외국에 안 알려져서 배타적이 될수밖에 없게 된다. 김연수는 언어적이 현상을 그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혼동하고 있다. 언어는 배타적일 수 없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배타적일 수 있는 거다.
근데 뭐, 이런 논의는 접어두고 라도, 세계 속에서 한국어의 위상이 어떤지 잠깐만 생각해도 김연수가 하는 말이 왜 해괴한지 단번에 알 수 있다. BTS를 위시해서 한국의 가요와 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이들은 한국어를 배워 한국 노래를 따라부르고 그 의미 파악에 열을 올린다. BTS가 신곡을 발표하면 유툽상에서 바로 영어로 번역해 올리고,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한국어로 멋진 에세이를 발표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말이다.
신라의 향가까지 외국인들이 즐긴다고 생각해 보자. 뭐, 지금과 같은 추세면 그리 먼 시간이 걸릴 거 같지 않다. 근데 만약 그렇게 되어도 김연수의 주장이 타당할 수 있을까?
가장 한국적인게 세계적이라는 걸 요즘 우리가 목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김연수는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말을 배워 작품활동을 한 적이 없기에 한국 문학이 배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한국 문단 자체가 배타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 문단은 썩어 빠진 고인물이라고 꽤 오랫동안 회자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서울대라인, 고대라인 하면서 제식구 챙기는 관행은 여전하겠지. 그런 배타성이라면 문제제기도 안했겠다.
김연수가 어떤 문제를 저격하려고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해괴하여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단의 배타성'을 공격하기 위해 '한국 문학'의 '배타성'을 운운한 지점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