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킨 노트 - 마음을 전하는 5초의 기적
가스 캘러헌 지음, 이아린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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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저자 가스 캘러헌은 암환자다. 그것도 벌써 4번의 암 진단을 받았으며, 외동딸인 엠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확률은 채 8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런 저자는 암 진단을 받기 전부터 남들과 달리 꼭 하던 일이 있다. 그건 바로 아침에 일어나 딸의 도시락을 싸는 일, 그리고 그 도시락에 특별한 종이 한 장을 넣는 일이다. 바로 냅킨에 사랑하는 딸을 향한 짧은 편지를 적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냅킨 노트는 저자가 암 진단을 받으며 더욱 특별한 일이 되었다. 저자는 매일매일 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이렇게 사랑하는 딸을 향해 마음을 담아 냅킨 노트를 적어 주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전히 도시락을 싸며, 그 안에 냅킨 노트를 적어 넣기를 저자는 소망하며, 이것이 그의 꿈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편지, 냅킨 노트를 통해, 딸 엠마가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성으로 성장하기를 저자는 바란다.

 

냅킨, 어쩌면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엔 너무나도 하찮은 물건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위에 사랑하는 딸을 향한 아빠의 간절한 마음이 담아질 때, 그건 단순한 냅킨이 아닌, 세상 무엇보다 커다랗고 소중한 부정(父情) 가득한 것이 된다. 게다가 그 아버지의 하루하루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작은 냅킨 한 장에 담겨진 커다란 사랑이야기인 『냅킨 노트』는 읽는 내내 감동 가득하며, 눈물짓게 하는 책이다. 가스 캘러헌은 자신의 딸이 고등학교에 졸업할 때까지 자신이 여전히 살아 도시락을 싸고, 그 안에 냅킨 노트를 적어 넣는다면, 그 숫자는 826장의 냅킨 노트가 됨을 계산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약속한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때까지 826장의 냅킨 노트를 쓰는 것이 자신이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자신과의 유일한 약속이라고.

 

“알렉스 씨, 비행기에서 당신의 기사를 보고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 한 가지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제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826장의 냅킨 노트를 쓰는 것, 이게 바로 저의 약속입니다.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유일한 약속.”(171쪽)

 

이처럼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아 냅킨 노트를 쓰는 것을 아빠가 소망한다면, 딸은 또 다른 소망을 품는다. 826번째 냅킨 노트를 받고 나면, 827번째 냅킨 노트를 기다릴 것이라고 말이다.

 

“826번째 냅킨 노트를 받고 나면... 그럼 저는 827번째 냅킨 노트를 기다릴 거예요. 아빠는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냅킨 노트를 써주셨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쭉 냅킨 노트를 써주실 거예요. 제가 아는 아빠는 언제나 도시락을 싸고, 냅킨 노트를 쓰고, 마음을 나누는 멋진 사람이에요. 저는 냅킨 노트 덕분에 아빠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저처럼 아빠한테서 냅킨 노트를 받는 친구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199쪽)

 

엠마가 아빠에게서 826번째, 827번째, 900번째, 10000번째, 그 후도 쭉 더 많은 냅킨 노트를 받을 수 있길 소망해본다.

 

아울러 이렇게 작은 마음의 표현이 부모와 자녀 사이를 더욱 끈끈한 정으로 묶어준다면, 나 역시 이런 편지를 적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사실 나 역시 딸(초등2학년)에게 가끔 엽서에 글을 적어 살짝 딸 책상에 올려놓곤 한다. 물론, 딸은 엽서를 받고 많이 좋아하고, 딸 역시 엄마 아빠에게도 엽서를 쓰곤 하며, 아빠에게 더 자주 엽서를 써 주길 바라기도 한다. 그럼에도 더 자주 적지 못하던 내 모습을 반성해본다.

 

“냅킨 노트”,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강력한 사랑의 수단이 될 것이다. 이 책 『냅킨 노트』와 함께 가족의 사랑을 더욱 키워본다면 어떨까?

 

저자가 딸 엠마에게 적어 보낸 냅킨 노트 가운데 한 가지를 적어본다.

 

나의 엠마에게

한 줄기 빛으로도 어둠은 금이 간단다.

아빠가

 

그렇다. 한 줄기 빛으로도 어둠은 금이 가며, 금세 물러나게 된다. 아무리 삶 속에 커다란 어둠이 우릴 짓누른다 할지라도, 냅킨 노트와 같은 작은 정, 사랑, 한 줄기 빛만으로도 우리 삶 속의 어둠이 금이 가며 물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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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영, 삶을 풍요롭게 가꿔라 - 임어당이 극찬한 역대 최고의 잠언집
장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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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꿈의 그림자’란 의미를 품고 있는 책, 『유몽영(幽夢影)』은 청나라 강희제 때의 장조가 쓴 잠언집이다. 장조는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시험과는 인연이 없어 관직은 보잘 것 없었다고 한다. 말년에 한림원의 고서를 정리하고 교정하는 9품의 한림공목에 머문 것이 고작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불운이 도리어 집필 작업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말이다.

 

각설하고 이러한 장조가 집필한 『유몽영』은 잠언 내지 경구 형식의 문체로 이루어진 잠언집이라 말할 수 있다. 총 219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서에서는 이를 3부분으로 나누어 유몽일영, 유몽이영, 유몽삼영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울러 『유몽영』의 속편들 가운데서 청나라 말기 문인인 주석수의 작품인 『유몽속영(총 86칙)』을 4부에서 현대의 편역자(이하 저자라 표기)는 다루고 있다.

 

이러한 305칙의 내용을 저자는 독서와 문학(57칙), 자연과 예술(83칙), 꽃과 여인의 언급(43칙), 인생과 처세술 언급(122칙) 이렇게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 말한다(여기에 대해, 나는 그냥 3가지로 나눠도 좋다 여겨진다. 독서, 풍류, 그리고 삶의 바른 태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처세술에 대한 언급들이 많은 이유는 『유몽속영』에 이러한 내용이 많아서라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잠언이라는 것이 물론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후세에게 성공의 비결을 가르치는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처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처세술’이라고 해서 부정적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든다면 이런 내용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라(80칙).” 얼마나 멋진 가르침인가! 그런데, 우린 어떤가? 반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진 않은지.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겠나.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말이다. 우리 모두 반대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언제나 자신의 일에 엄격하게 접근하며, 남들의 모습에는 조금 관대하고 너그럽게 접근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독서에 대한 내용들이 많은데, 이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도 있다. 책을 읽는 독서, 책을 사는 매서에는 탐욕스러워도 된다는 내용이다(118칙). 언제나 책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아,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러한 탐욕을 버리지 못함을 탓하곤 했는데, 장조의 가르침이 책 욕심에 대한 면죄부를 허락한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장조의 『유몽영』을 통해, 책 욕심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으니, 마음껏 책 욕심을 내봐야겠다. 심지어 장조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 책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반드시 읽어라(166칙).” 그러니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장조는 책을 읽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강조하는 것이 명산을 유람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10년간 독서했으며, 10년간 명산을 유람하고, 10년간 저서활동을 한다고 했으나, 장조는 저서활동이야 2-3년이면 족하고, 독서와 명산 유람은 100년을 해도 다하지 못한다고 말한다(179칙). 왜 이처럼 명산 유람을 중요하게 여길까? 장조에게 산수는 또 하나의 책이었기 때문이다(147칙).

 

이토록 장조는 독서함과 함께 자연을 즐기는 것을 강조한다. 어쩌면, 이를 행복한 인생, 삶을 즐기는 자세로 볼 수는 없을까? 이것 역시 성공한 삶의 한 모습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난 것은 장조는 이렇게 독서함과 자연을 즐기는 일에 있어 적합한 ‘상황’이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독서에도 맞는 ‘때’가 있다. 경서는 겨울에, 사서는 여름에, 제자서는 가을이 좋다면, 봄에 읽기 좋은 건 문집이다(1칙). 소년 시기의 독서가 일부를 본다면, 중년시기의 독서는 뜰에서 달을 보는 것과 같고, 노년시기의 독서는 누대 위에 올라 가리는 것 없이 온전히 달을 보는 것과 같다(35칙).

 

또한 꽃구경, 달빛구경, 눈구경에 함께 할 적합한 사람들 역시 각기 다르다(11칙). 뿐 아니라, 글씨체 역시 문인과 장수에 적합한 글씨체가 각기 다르다(13칙). 비 역시 계절에 맞게 내리는 적합한 바가 다르다(36칙). 뿐 아니라, 계절에 따라 내리는 비에 제격인 것 역시 다르다. 봄비에는 독서, 여름비에는 바둑, 가을비는 추억, 겨울비는 음주가 제격이다(86칙).

 

이처럼 각기 상황에 적합한 바가 다름을 이야기함이 장조의 철학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그르거나 옳을 수 없으며, 같은 일이라도 상황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처한 ‘때’는 무엇에 적합한 때인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내용이다.

 

이 책, 『유몽영』을 읽어감에 있어 4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 즐거움은 각각의 내용은 사자성어로 제목을 붙여놓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장조의 작품이 아닌, 이 책 저자의 작품이다. 두 번째 즐거움은 이러한 제목 아래, 유몽영의 원 텍스트 내용에서 대표적인 문장을 뽑아 놓았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제목이 될 수 있을 법한데, 이렇게 정리된 문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세 번째 즐거움은 장조가 기록한 『유몽영』본문을 읽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네 번째 즐거움은 이러한 본문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읽는 즐거움이다. 물론, 이러한 형태는 『유몽속영』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서로 다른 즐거움 가운데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유몽영』, 언제나 곁에 두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또한 삶의 속도를 정함에 있어 지침이 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그윽한 꿈의 그림자’를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이 보다 더 풍요로워지고, 보다 더 맛깔 나는 성공한 인생이 되길 소망해본다. 그 안에 담긴 독서, 풍류, 그리고 삶의 바른 태도를 통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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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 소년을 찾아서
정선엽 지음 / 연지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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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아마도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원에서는 신학을 공부했다. 수년간 여러 교회에서 일했지만 번번이 쫓겨났거나 달아났다.” 신학공부, 그리고 목회사역에서의 빈번한 사역지 이동. 이러한 저자의 경험(?)이 소설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은 알아주는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학위만을 남겨두고 자퇴한다. 왜냐하면 꿈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젠 공부하던 그곳에서 성지순례여행객들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하며 살아간다(그래서 지리적 배경이 당연히 이스라엘일 것이라 여겼는데, 아마도 독일쯤인 것 같다).

 

이 주인공이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바로 보물섬이다. 아니 이 보물섬의 지도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보물섬의 지도는 꿈을 향해 용기를 내었을 때, 갖게 된다. 예를 든다면, 주인공이 자신의 꿈(아마도 글을 쓰는 것)을 위해 신학을 자퇴하는 그런 용기를 낼 때, 보물섬의 지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보물섬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두 갈래 길에서 익숙한 길 대신 낯선 길로 한 걸음 내딛을 정도의 용기를 갖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니, 익숙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낯선 길이라 할지라도 꿈을 향해, 한 걸음 용기를 내어 내딛었을 때, 이 한걸음으로 시작하여 종국에는 보물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보물섬은 오직 한곳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물섬이에요. 보물섬에는 보물이 있어요. 아주 특별한 보물이에요. 오직 자기 자신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보물이랍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물섬의 장소를 알지 못해요. 음, 그곳의 지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음,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일 거예요.”(96쪽)

 

우리는 오직 나 자신만이 발견하고 볼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그런 보물섬을 찾았는가? 아직 찾지 않았다면 저자의 말처럼 낯선 길로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내보자. 물론, 그것이 어쩌면 용기가 아닌 무모함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무모함이 결국엔 보물섬을 발견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저자는 이 소설에서 또한 이러한 보물섬을 찾아 무모함일지도 모르는 용기를 내게 된 이유는 결국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내적 갈등임을 밝히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서 언제나 거룩(?)한 길로만 가야한다는 당위성과 실제는 그렇게 못한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매어 놓은 운명과 꿈 사이에서의 갈등. 어쩌면 주인공(내지는 저자)이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목사인 아버지의 강요 내지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 효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주인공은 달리기를 잘하는, 아니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달리기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모가 정해 놓은 운명을 향해 가기 위해선 달리기가 아닌 공부를 해야 했기에. 이러한 갈등이 결국엔 보물섬을 찾기 위한 용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과연 저자는 보물섬을 찾았을까? 아니, 보물섬을 향해 나아가는 지도를 발견했을까? 저자가 결국 자신만의 보물섬에 안착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저자의 앞으로의 삶 속에 설레는 일들이 가득하길 바란다. 이미 저자는 모퉁이를 돌았으니 말이다(저자는 책 속에서 빨강머리 앤의 대사 “모퉁이를 돌면 설레는 일이 기다릴 것”을 몇 차례 반복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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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청춘에게 - 시인 장석주가 고른 사랑과 이별, 청춘의 시 30 시인의 시 읽기
장석주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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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시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 물론 시란 것이 대체로 함축적인 언어로 써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에 대한 독자들 잠재의식 가운데 자리 잡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각설하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시를 어려워하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어주는 ‘친절한’ 작업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이 책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청춘에게』가 바로 그처럼 시를 읽어주는 책이다. 저자 역시 시인이면서 본인이 선별한 서른 편의 시를 ‘친절하게(?)’ 읽어주고 있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춘’을 일차적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있으며, 책 소개에서도 “시인 장석주가 고른 사랑과 이별, 청춘의 시 30”이라 설명하고 있으니, 서른 편의 시들이 대체로 청춘의 시기 겪게 되는 사랑, 이별, 우정,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청춘의 고뇌 들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앞에서 이러한 시들을 저자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말하며, 옆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시 읽기는 친절한 해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설’이란 단어는 ‘무엇의 내용이나 의미 따위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함’이라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기 쉽게 풀어서’가 중요하다. 그리고 애초부터 시를 풀어주는 주된 이유 자체가 독자들의 시 울렁증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 쉬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 읽기는 쉽지 않다. 시인의 시 읽기는 시를 쉽게 이야기해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시를 통한 세상 읽기라고 해야 할 듯싶다. 그렇기에 단순한 시에 대한 해설로서의 ‘시 읽기’가 아닌, ‘인문학적 시 읽기’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애당초 <시인의 시 읽기>는 <시인의 시 읽어주기>가 아닌 <시 읽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애당초 시인은 시를 우리에게 쉽게 풀어주려는 마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도리어 이 책은 소장하며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그만큼 작가의 통찰력이 멋스럽다.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통해, 세상을 읽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시라는 텍스트(text)를 단순히 해설하고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시를 통한 또 하나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텍스트 이야기를 이왕 했으니,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보자. 시인은 서른 편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며, 꼭 그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각 시를 잉태하여 세상에 출산한 시인들이 과연 그 시를 어떻게 잉태하게 되었는지의 콘텍스트(context)에 대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때론 저자가 각 시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사항을 통해, 그 콘텍스트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저자가 시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없거나 정보가 없는 경우 역시 제법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 시인의 또 다른 시들을 통해, 시인의 콘텍스트를 유추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부분 역시 참 좋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시와 시인에 대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각설하고, <시인의 시 읽기>가 어쩌면 시를 더 어렵게 하는 머리 아픈 책이 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에 대해 심도 깊은 접근을 하고 있는 좋은 책이기도 하다. 물론 판단은 독자 각자의 몫이다. 아울러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텍스트로 사용된 시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 역시 절대적일 수 없음도 당연하다. 시란 시인의 손을 떠나면, 시인의 것이 아닌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불확실한 미래로 향해 나아가며 힘겨워할 청춘들이 시에 함축된 비의들을 발견하며, 힘겨운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서른 편의 시들 모두가 좋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가슴에 와 닿는 시 한 편 소개하며 마친다.

 

두부

이영광

 

두부는 희고 무르고

모가 나 있다

두부가 되기 위해서도

칼날을 배로 가르고 나와야 한다

 

아무것도 깰 줄 모르는

두부로 살기 위해서도

열두 모서리,

여덟 뿔이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사납게 모 나는 두부도 있고

이기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모 나는 두부도 있다

 

두부같이 무른 나도

두부처럼 날카롭게 각 잡고

턱밑까지 넥타이를 졸라매고

어제 그놈을 또 만나러 간다

 

비록 연약한 두부라 할지라도 두부로 살기 위해서도 칼날을 배로 가르고 나와야 하며, 여전히 삶 속에서 비록 물러터진 내면을 숨기고 있다 할지라도 각을 세우고 살아야만 하는 세상살이가 왠지 서글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네 세상살이라면, 어쩌겠나! 비록 심사가 뒤틀려도, 또 다시 그 세상을 향해 넥타이 단단히 졸라매고 부딪칠밖에. 우리 모두, 그리고 특별히, 청춘들이 이렇게 나아갈 때, 시 한편이 그들의 삶에 위로가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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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후기 시집 문예 세계 시 선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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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과 함께 독일 문학을 대표한다는 릴케, 그의 시집을 접하게 되었다. 솔직히 그토록 유명한 릴케의 시집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책 제목이 『릴케 후기 시집』이라 되어 있다. 그러니, 릴케의 작품시기를 둘로 딱 나눠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바로 그 후기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전기의 작품은 같은 출판사에서 2014년에 출간되었다).

 

처음 이 시집을 접할 때는 릴케의 유작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소개글에 ‘후기’라는 단어를 ‘말기’로 이해했다. 그랬기에 릴케의 마지막 시기의 작품들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릴케의 작품 가운데 중기 이후의 작품들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이 시집에는 먼저, 릴케의 3기 시집(그의 작품세계를 4기로 나눴을 때) 『새 시집』의 작품들이 실려 있고, 그 다음으로는 < 새 시집 이후의 시 >로 여기에 실려 있는 시들은 릴케의 사망 후 발표된 작품들이다. 그러니, 릴케가 한참 활동할 때, 쓴 시들이지만, 사망 후 뒤늦게 발표된 작품들인 것이다.

 

그 다음 수록된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가 < 새 시집 이후의 시 >와 어쩌면 같은 시기의 작품들이고, 마지막 부분 < 후기의 시 >가 릴케 말년에 속하는 작품들이라 보면 되겠다.

 

과연 릴케의 시가 얼마나 대단할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의 시를 접해본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건데, 외국 시인들의 시를 접하면 왠지 우리 시인들의 작품과 느낌이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다. 물론, 나의 메마른 감성 탓이겠지만, 우리 시인들의 작품을 감상할 때의 그런 감흥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독자인 나의 탓이겠다). 어쩌면 이것이 정서의 탓일까? 아니면 번역시의 한계일까? 아무튼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대가의 작품을 대하는 경외감을 잃지 않고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릴케의 시에 대해 평을 할 실력은 나에게 당연하게도(!) 없다. 그렇기에 시집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릴케 후기 시집』 안에 담겨진 그의 시들 가운데서 ‘죽음’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땠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물론 이러한 정리 역시 나의 견해일 뿐이다. 설령 그것이 시인의 의도와 상반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미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의 손에 있음에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은 이미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 위안하며).

 

아직 실행되지 못한 것 속을 헤치며 / 무겁고 묶인 것 같은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이 고초는 / 백조가 땅 위를 걷는 어색한 걸음걸이와 흡사하다. // 그리고 죽는다는 것, / 우리가 매일 서 있는 발밑의 땅을 이제는 밟을 수 없다는 것, / 그것은 백조가 물에 들어갈 때의 그 불안감과 같다. // 그러나 물은 상냥하게 백조를 맞아들이고, / 백조의 가슴 밑으로 / 기쁘고도 덧없이 세찬 물결이 연달아 뒤로 밀려간다. / 그러나 백조는 더없이 조용히, 확실하게 / 점점 의젓하고 왕자다운 기품을 지니고 / 유유히 물 위를 미끄러져간다.

< 백조 > 전문

 

시인에게 있어 죽음은 두려움이다. 불안함이다. 마치 백조가 물에 들어갈 때에 품는 마음처럼. 그러나 물에 들어간 후의 백조는 기품 있다. 그리고 유유히, 의젓하며, 기품 있게, 그리고 조용하고 확실하게 그 물 위(죽음의 두려움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를 미끄러져간다. 이것이 시인의 죽음에 대한 견해를 잘 보여주지 않을까? 시인은 바란다. 기품 있는 죽음의 순간을 맛보길 말이다. 우리 역시 그럴 수 있길 소망해본다.

 

<백조>를 통해 알 수 있는 시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죽음의 경험>이란 시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연기를 계속한다. 불안하게 간신히 익힌 대사를 되뇌면서. / 그리고 때때로 솟구치듯이 몸짓을 크게 하면서. / 그러나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너의 존재가, / 우리들의 작품에서 밀려난 너의 존재가 // 때때로 우리를 엄습하리라. / 마치 저 진실의 인식이 내려앉을 때처럼. / 그런 사이에 우리는 갈채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 오로지 삶을 연기하는 것이다.

<죽음의 경험> 일부

 

비록 죽음이라는 떨쳐낼 수 없는 존재가 때때로 우릴 엄습할지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연기하겠다는 시인의 고백이 마음을 울린다.

 

그렇다면, 시인의 이런 고백, 죽음에 대한 견해는 그의 말년에는 어떻게 변하였을까?

 

오라, 마지막 고통이여,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 육체 조직 속의 엄청난 고통이여. / 정신 속에서 불탔듯이, 보라. 나는 지금 / 네 속에서 불타고 있다. 장작은 / 네가 불타오르는 불꽃에 동의하기를 오랫동안 거부하였다. / 그러나 나는 지금 너를 부양하고, 네 속에서 불타고 있다. (중략) 이 삶. 밖에 있는 것이 삶이다. / 나는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오라, 마지막 고통이여> 일부

 

시인은 마지막 순간에 고백한다. 자신은 고통을,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겠노라고. 이런 죽음에의 수용은 그의 병든 육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수용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 삶 밖에 있는 삶을 꿈꾼다. 이 밖에 있는 삶이 있다고. 그 삶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고. 물론 죽은 자들은 세상의 것으로부터 멀어짐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영원이 존재한다고.

 

이상한 일이다. 서로 관련되어 있던 모든 것이 풀려서 / 공간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 그리고 죽어 있다는 것은 고생스럽고, 보충해야 할 것이 넘칠 만큼 많은 것이다. / 그리하여 죽은 자는 차츰 약간의 영원을 느낀다. /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삶과 죽음을 너무나 단적으로 구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두이노의 비가』중 <첫 번째 비가> 일부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는 불안함과 두려움의 존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나에게 주어진 연기에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자. 아울러 죽음 이면의 삶이 존재함과 영원의 실재를 믿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백조처럼 기품있게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어날 때는 모든 이의 웃음 속에 홀로 울고 나왔으니, 이제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이의 울음 가운데 홀로 웃으며 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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