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은 걸까? - 함께 생각하자 원자력 풀빛 그림 아이 47
황위친 글.그림, 문현선 옮김, 김혜정 해설 / 풀빛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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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걸까?』는 원자력에 대한 그림동화랍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시절(당시에는 국민학교)부터 배워온 것이 원자력은 안전하고, 깨끗하고, 경제적이어서, 우리나라가 집중적으로 매달려야 할 자원이라는 내용이었답니다. 그런데, 머리가 커지고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원자력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이며, 얼마나 반환경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돈을 집어먹는 괴물 같은 것인지를 말입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어느 고장은 방폐장을 유치하는 문제로 인해, 주민들이 반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상처주곤 했답니다. 물론, 방폐장은 결국 다른 고장에 유치되었지만, 그곳은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자력이 안전하다는 거짓말에 있답니다. 다 쓰고 남은 봉을 완전 봉쇄해서 바다 깊은 곳에 폐기시키는데, 절대적으로 방사능이 새어나오지 않고 안전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답니다. “정말 좋을까요?”, “정말 안전할까요?”, “정말 친환경적일까요?”, “정말 경제적일까요?”

 

최소 10만년이상은 생태계로부터 격리해야 하는 폐기물을 수명이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콘크리트로 봉해, 바다 깊은 곳에 폐기하는 것이 안전할 때, 이것을 믿는 것이 긍정적인 사람이며, 믿지 않으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걸까요? 게다가,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답니다.

 

바로 우리 이웃나라 일본이 그러한 점을 몇 년 전 보여줬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곳은 방사능이 흘러나와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변해있죠.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말합니다. 우린 안전하다고요. 그리고 그런 주장에 반대하면, “빨갱이”가 되고, 요즘은 “종북”이 라고 분류한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자의 질문, “정말 좋은 걸까?” 이 질문, 이 의심이 오늘 우리에게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안전해 진답니다. 이 의심은 고약한 의심도 아니고, 사회 불만세력들의 의심도 아니랍니다. 이 의심은 우리를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아니랍니다. 이 의심은 정당한 의심이요, 세상을 더욱 건강하게 하는 긍정적 의심이랍니다.

 

이 책은 짧은 그림책이지만, 바로 이런 생각을 해보게 한답니다. 게다가 책 뒤편에 나오는 김혜정 씨의 해설을 꼭 읽어야 한답니다. 아주 잘 썼거든요. 원자력의 두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음으로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때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 그리고 핵으로부터 안전함을 보장받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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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진설 - 근황 인문학 수프 시리즈 6
양선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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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소가진설』은 소설의 어원을 밝힐 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소설 쓰기는 작고 ‘가벼운 이야기’로 ‘생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란 의미로 이 제목이 사용되어진 듯하다.

 

그러니, 이 책은 삶 속의 ‘가벼운 이야기’들을 주제로 삼는다. 때론 tv 프로그램을 보다, 때론 잡지를 보다, 때론 책을 보다, 때론 영화를 보다가, 때론 가요를 듣다가, 때론 산책을 하다 떠오른 생각들을 주제로 삼는다. 말 그대로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처럼 ‘가벼운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생의 진실’을 밝힌다. 그가 표현한 것처럼 거창하게 ‘생의 진실’을 밝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상의 가벼운 주제에서 출발하여 연관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도출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생의 진실을 찾는 작업)을 저자는 “인문학 수프”라 표현하나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작업인, “인문학 수프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이다.

 

에세이집이라 말할 수도 있고, 수필집, 산문집이라 말할 수도 있다. 왠지, 에세이집이란 표현보다는 수필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성 싶다.

 

저자는 유독 사자성어를 좋아하는 듯싶다. 어떤 부분에서는 사자성어가 글을 필요이상으로 예스럽게 만들고, 때론 글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도 하며, 또 어떤 부분에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사자성어 사용을 포기하지 않는다. 책 제목도, “소가진설” 아닌가!

 

저자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솔직히 책 표지와 책 제목은 선뜻 이 책 집어 들기를 망설이게 하는 그런 디자인과 제목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디자인도, 제목도 왠지 어울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왠지 상업적인 호객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느껴지기도...

 

수필집이기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가 뭘까 생각하진 않겠다. 단지 유독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저자의 글의 전체적인 느낌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글공부의 목적이란 사람 되는 공부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 되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글 자체에만 집착하는 이가 있다면, 이런 이들을 “글자 병신”, “책 귀신”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끓이는 인문학 수프의 목적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렇다. 우리의 모든 글공부, 책읽기는 사람됨을 지향한다. 그럼에도 사람됨에는 관심 없이, 내가 책을 천권 읽었노라. 2천권 읽었노라 하는 것을 훈장처럼 여긴다면, 이 역시 책 귀신이 되는 모습 아닐까? 분량을 떠나 사람됨을 지향하는 책읽기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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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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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카린 지에벨의 『그림자』는 추리소설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이지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주인공 클로에는 광고회사 부사장으로 회장 승진을 노리는 성공한 여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는다. 시시때때로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갑자기 정전이 되기도 하고, 현관문에 죽은 새의 시체가 놓이기도 한다. 집안의 물건들이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없어졌다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클로에는 자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어느 누구도 클로에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도리어 점차 주변 사람들은 클로에를 망상증 환자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과연, 클로에를 괴롭히는 그림자가 실존하는 걸까? 아님, 정말 클로에는 망상증 환자가 되어 버린 걸까?

 

한편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강력계 형사인 고메즈 형사. 그는 동물적인 성향의 위험한 남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으니,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내가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 결국 아내의 죽음 뒤에 덩그러니 놓여진 고메즈.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메즈 앞에 아내와 닮은 여인, 클로에가 등장한다. 누군가 스토커가 자신을 괴롭힌다는 신고를 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 여인. 하지만, 아무도 그 여인의 신고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고메즈만이 문득 1년 전 친구 형사가 알려줬던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여기며 관심을 기울이는데... 과연 고메즈는 클로에를 괴롭히는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과연 “그림자”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첫째, 당연히 클로에를 괴롭히는 사이코패스이다. 그가 클로에를 괴롭게 하는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교묘하고, 악마적이다. 어둠 속에 숨어 누군가를 괴롭히며, 그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악한. 이런 악한, 사이코패스는 누군가를 괴롭히는 못된 그림자이며, 아울러 그 존재 자체가 의미 없는 그림자일 수밖에 없다.

 

둘째, 그림자는 클로에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이다. 이는 지난 26년간이나 그녀로 하여금 가면을 쓰고 살게 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이다. 이 그림자 역시 사이코패스 못지않게 클로에를 괴롭힌다. 어린 시절 동생을 데리고, 공장에 놀러갔다가 동생을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게 만든 그 사건. 그 사건은 평생 클로에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내적 그림자이다. 우리 안에는 이런 그림자가 없는가?

 

셋째, 클로에를 지켜주는 그림자이다. 바로 고메즈 형사. 사건을 의뢰한 피해자와 형사의 신분으로 만났지만, 점차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클로에에게도 고메즈는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그림자가 된다. 아무도 자신의 주장을 믿어주는 이 없어 망상증 환자로 입원하여 사이코패스인 그림자의 농락거리가 될 때 조차도, 고메즈 형사는 클로에의 참 사랑, 언제나 지켜주는 그림자가 되어 힘이 된다.

 

넷째, 주변 사람들 역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클로에의 주장에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 클로에의 절친도, 남친조차 클로에의 말을 믿기보다는 그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망상증 환자로 몰아간다. 이런 그들은 결코 클로에의 참 주변인이 될 수 없다. 비록 그들이 때론 함께 수다도 떨고, 살을 맞대기도 하지만, 실상은 허상에 불과한 그림자다.

 

개인적으로 이 첫 번째와 네 번째 그림자에 분노가 끓어오른다. 사이코패스와 못된 놈이니 그렇다 치고, 어느 누구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그 아픔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 모습이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너무나도 쉽게 단정해버리고, 포기해버리는 모습은 아닌지.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존재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카린 지에벨이란 작가,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지만, 또 다른 그의 작품이 우리를 찾아올 날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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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노래 - 이해인 수녀가 들려주는
이해인 지음, 백지혜 그림 / 샘터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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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노래』는 이해인 수녀님의 동시집 『엄마와 분꽃』(왜관 : 분도출판사)에 실려 있는 “밭노래”와 백지혜 선생님의 예쁜 그림들이 만나 이루어진 그림책이랍니다.

 

먼저, 이해인 수녀님의 아름다운 시가 살포시 미소 짓게 하네요. 평범한 텃밭에서 자라나는 채소들은 밭이 젖을 먹여 살려내는 아이들이 되네요. 그리고 밭은 그 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가 되고요. 많은 아이들을 먹여야 하기에 밭은 ‘젖이 많은’ 엄마가 되어야만 하고요. 이처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밭에서 엄마의 마음을 읽어내는 시인은 눈, 참 예쁘네요.

 

밭은 해마다 / 젖이 많은 엄마처럼 / 아이들을 먹여 살립니다 / ...

/ 아이들의 이름은 / 참 많기도 합니다

 

밭이 엄마의 마음으로 키워낸 채소들이라 생각할 때, 이제는 채소 한 점 허투루 대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또한 아기 홍당무가 빨간 이유를 묘사하는 대목은 살며시 미소 짓지 않을 수 없고요.

 

땅속을 몰래 빠져나온 / 아기 홍당무가 / 흙 묻은 얼굴로 웃고 있다가

/ 나에게 들켜서 / 얼굴이 더 빨개졌습니다

 

역시 시인입니다. 홍당무의 붉음을 이렇게 멋지게 묘사할 수 있음이 신기하기까지 하네요.

 

우리 아이들이 이해인 수녀님의 『밭의 노래』를 읽는 가운데, 땅의 모성(母性)을 깨닫게 되고, 그 생명력을 공급받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게다가 백지혜 화가의 그림도 참 멋지구요. 시의 내용과 너무 잘 어울리네요. 왠지 채소와 꽃, 나비를 즐겨 그리신 신사임당을 떠올려보게도 되고요.^^ 이번 추석에는 딸아이를 데리고 할아버지 텃밭에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 한우리 북카페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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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황홀 - 우리 마음을 흔든 고은 시 100편을 다시 읽다
고은 지음, 김형수 엮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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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황홀』은 국민시인 고은의 수많은 시 가운데 엮은이가 100개의 시구(시의 전문 또는 일부를 선택)만을 골라 엮은 시집이다. 시인은 이러한 엮은이의 작업을 평가하길, 마치 자신의 많은 시들이 오랜 세월 자라 하나의 나무를 이루었다면, 엮은이는 이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드러내며, 자른 나무로 칠현금의 악기를 만들어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시가 무엇인지를 시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엮은이의 표현처럼 시가 시인이 연주하며 만들어낸 악보라면, 이 악보를 가지고 또 다른 연주를 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모한 용기를 내어 독자의 입장에서 또 하나의 나이테를 드러내 선율을 만들어 본다. 비록 그 소리가 불협화음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시인의 주옥같은 시 가운데, ‘삶’이라는 나이테를 뽑아본다.

 

시인은 말한다. 시는 오래전 신들의 희로애락이었다고. 신들의 희로애락이었던 시를 읊조린다는 것,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런 특권을 누리는 고은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아울러 그 특권을 엿볼 수 있는 우리 역시 행복한 사람 아닐까?

 

이렇게 주어진 특권으로 시인은 궁핍 가운데서도 시의 풍요로움과 속 깊은 축복을 누렸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시가 허락하는 황홀경이란다. 그래서 시인은 힘겨운 가운데 시가 허락하는 황홀경을 통해, 삶을 일구어 낸다.

 

시인은 삶을 노래한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있어 시란 궁핍 가운데서 풍요로움과 황홀경을 허락하는 것이기에 시는 삶을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시인은 삶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존재를 재미나게 보여주는 시구가 있다.

 

풀 보아 / 나무 보아 / 똥 안 누고도 / 잘 사는 / 조각달 보아

나야 죽어도 달 못 되어 똥마려워 <무제시편 103> 전문

 

생활인인 시인은 삶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삶은 힘겹다. 하지만, 그럼에도 맞서야 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시인의 삶에 대한 자세를 잘 보여주는 시가 <두고 온 시>이다.

 

갓난아기로 돌아가 /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부터 /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왜 없으리 / 삶은 저 혼자서 / 늘 다음의 파도 소리를 들어야 한다 <두고 온 시> 일부

 

그렇다. 삶이란 아무리 힘겨워도 언제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할 숙제다. 그렇기에 이러한 삶 속에서 여전히 일상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시인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절하고 싶다 저녁연기 자욱한 먼 마을 <지나가며> 전문

 

그들이 항상 먼저였다 / 어둑어둑한 데서 / 거리의 쓰레기를 쓸고 있었다 / 그들이 먼저였다 / 공장으로 가는 그들이 먼저였다 / 첫차는 씽씽 달려간다 / 이때뿐이다 / 가장 좋은 때는 새벽뿐이다 / 그놈들 아직 뻗어있으니까 <새벽> 전문

 

이처럼, 힘겨운 삶 속에서도 여전히 삶을 이어나가며 새벽을 여는 사람들, 저녁밥을 짓는 아낙네들의 치열한 삶이야말로 경외의 대상이다. 나의 삶은 어떤 삶인지 돌아보게 된다. 난 어디에 속하나? 뻗어 있는 ‘그놈들’인가? 아니면 힘겨운 삶이라 할지라도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을 열고, 치열한 삶을 헤쳐 나가는 ‘그들’인가? 그놈이 아닌 그들이 되길 소망할 뿐이다.

 

이처럼 시인은 힘겨운 삶, 궁핍한 삶을 벗어나려는 도구로 시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시를 통해, 힘겨운 삶을 정면으로 맞으며 열어가기에 비로소 시의 황홀을 맛보게 된다. 그런 시인에게 고단한 삶마저 삶의 축복이 된다.

 

옷소매 떨어진 것을 보면 / 살아왔구나! 살아왔구나! <旅愁 158> 전문

 

떨어진 옷소매는 어쩌면 궁핍한 삶의 증거이지만, 그것이 되려 살아왔음의, 살아있음의, 살아감의 증거가 된다. 시인은 옷소매가 닳아 떨어진 것을 보며, 애처로워하거나 지난한 삶을 원망하기보다는 힘겨운 삶을 견뎌내며 살아왔음에 감사한다. 이러한 감사는 아버지라는 시에서 더욱 돋아진다.

 

아이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 극락이구나 <아버지> 전문

 

이러한 마음을 품을 때, 우리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더 가지려는 마음, 더욱 움켜쥐려는 마음이 우릴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진 않을까? 자녀들이 밥 굶지 않을 수만 있다면, 설령 밥을 굶는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따스한 밥 한 공기 앞에 둘 수 있다면, 그것이 극락이요 천국이라는 고백이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가! 이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궁핍 가운데 누리는 시의 풍요로움이다. 이러한 “시의 황홀”을 맛볼 수 있음이 독자들에게는 축복이요 황홀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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