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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시
이상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6년 5월
평점 :
중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규 작가의 신작 시집 『13월의 시』를 만났다. 제목이 독특하다. 「13월의 시」라니, 시인은 무엇을 노래하고 싶었던 걸까? 에티오피아에서 실제 사용하는 달력에는 13번째 달인 13월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에티오피에서 13월은 실제의 삶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13월은 결코 일상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13월의 시’란 비일상의 시라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인은 일상을 도외시한 시를 노래하려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시인은 비일상의 시간을 집어넣은 시집 『13월의 시』를 통해 일상을 노래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시집과 동명의 시를 살펴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시전문지 13월 호에 실린 나의 시를 아무리 읽어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누가 썼는지도 모르겠다. 시가 이데아라고? 구원이라고? 시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시의 위의(威儀)라고? 한 때의 상처와 마주했던 언어라고? 아팠던 상흔의 기억이라고? 오랫동안 단어들에 익숙한 한 사람이 단어 옆에 단어와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이었다. 오랫동안 시에 익숙한 사람이 시 옆에 시와 나란히 멍청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값비싼 종이에 인쇄된 먹으로 깊이 눌러 찍어낸 내 시의 가려운 혓바닥, 13월의 시를 나는 찢어버린다.
그러자 그 자리엔 푸른 나무 한 그루가 솟아났다. 영성의 땀방울이 찢어진 종이 잎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13월의 시> 전문
그렇다. 시인은 ‘13월의 시’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푸르른 생명이 솟아오르고, 영성의 땀방울이 꿈틀댄다. 이렇게 찢어낸 시는 무엇인가? 그건 시인이 말하듯이 시인이 ‘아무리 읽어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말할 그런 어려운 시다. 예전엔 시집 하나 손에 들고 다니던 모습이 흔한 풍경이었는데, 요즘엔 시가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시가 난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과 같이 시대적 아픔이나 사회적 부조리를 노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흔한 사랑시가 가득한 것 역시 가볍게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시가 자꾸 어려워지고, 시인의 세계에만 갇혀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때, 시를 찢어버리겠다 노래하는 시인의 용기, 그 시도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이렇게 일상이 배제된 시, 13월의 시를 찢어버린 그 자리에 시인이 채우고자 하는 것은 시의 원시성이다.
시간이 끌어오는 변화는 / 태양의 기울기이다. /
이 시대의 / 태양은 너무 많이 기울어져 있다. /
텅 빈 세련된 문명이 곳곳에 늘려 있다. / 복원할 수 없이 기울어진 /
태양을 밀어내고 / 주술 같은 원시성을 채워 넣는다.
<글머리> 전문
그러니, 결국 시인이 노래하고자 하는 시의 원시성은 결국 일상의 노래가 아닐까? 그렇기에 시인은 손녀가 주는 행복, 잠시 다녀간 손녀의 여운을 그리워하며 노래하기도 하고, 아내의 된장찌개, 일상의 식사요청을 노래하기도 한다.
손녀 윤이의 웃음소리는 / 마이다스의 손이다 / 추석에 다녀가면서 /
떨궈놓은 웃음소리 / 베란다 창가에 자글거리며 내려앉는다
<마이다스의 손> 일부
아내가 끓이는 된장찌개 소리와 / 식사하라는 다정한 부름을 /
듣지 못하는 / 난, 청력 장애인
<청력 장애인> 일부
어쩌면 이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시의 원시성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일상 속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는 아내의 정성의 소리, 식사하라는 아내의 다정한 부름을 듣지 못하는 청력 장애인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 속에서 행복을 찾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어쩌면, 그 일상의 삶이 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