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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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추천사는 탁월하다. 오래 전 책 대여점에서 소설을 뒤적이다가 표지 뒷면에 인쇄된 글이 너무 좋아서 그게 본문을 발췌한 것인 줄 알고 빌려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본문이 아닌 김연수 작가가 쓴 추천사였다. 그 책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다.

<완벽한 날들>의 표지 뒷면에 인쇄된 김연수의 추천사 역시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내게 "어떤 시인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짐짓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쉼보르스카나 네루다, 혹은 파울 첼란"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거기까지 듣고도 "그리고요?"라고 또 묻는 사람이 있으면 마지못해 "메리 올리버도 좋아해요..."라고 털어놓았다.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어서. (...) 이제 당신 앞에도 이 이 기쁨이 놓여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든다. 그냥 안 읽고 지나가기를. 나만 읽기를. 너무나 인간적인 그 마음으로.  -김연수 추천사 중

 

이런 추천사를 읽고 기대를 안 품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한 권만으로 김연수가 품은 애정의 깊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평생의 동반자인 몰리 멀린 쿡(책에서는 M으로 지칭된다)과 함께 숲과 바다가 있는 '프로빈스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였다는 메리 올리버는 자연을 향한 사랑과 경이를 시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읽고 있노라면 이 뿌옇고 복작대는 도시에서의 삶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고,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책의 크기나 색감도 좋다. 아름다운 책.

잘 정비된 개미 언덕을 바지런히 오르내리는 검은 개미들도 하나의 기회다. 뜨거운 모래밭의 말랑말랑한 두꺼비도 하나의 기회다.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건 기회들의 향연이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물에서 떠도는 새들이 돌아본다. 이따금 바람도 돌아보는 듯하다.  -33쪽

인간은 무릇 가정적이고, 견실하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바람의 손아귀에 든 먼지처럼 소용돌아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의 유연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신념이었다.  -81쪽

상실은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있던 게 없어지는 거니까. 먹이고, 산책시키고, 목욕시키고, 안아줄 대상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소중히 여기고, 걱정하고, 동정하고, 위안을 얻을 지각력 있는 생물체가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난 베어는 어디 있을까? 우리는 흰 구름을 유심히 본다. 조만간 저 하늘에서 무심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베어를 보게 될 것이다. 전능의 신들은 떠도는 먼지로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창조했는가! 비단 같은 흑기러기, 시폰 스카프, 편지, 빈 봉투, 미국오리, 낡은 신발, 떠나간, 떠나가버린 조그만 흰 개. 우리 삶의 모든 음악은 그것들 안에 있다. 신들은 행위하고, 우리는 그 행위의 목적은 알지 못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세상은 우리의 깊은 관심과 소중히 여김의 소용돌이와 회오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124쪽

날이 선, 반짝반짝 빛나는 십 대, 자물쇠 채워진 시간. 단단한 이십 대. 느슨해지는 삼십 대. 초조한 사십 대. 가끔은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는, 버팀의 오십 대. 지금은, 육십 대.
그리고 난 단순하고 헌신적이고 싶다, 떡갈나무처럼.  -129쪽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똑같은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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