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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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네로 이사할 때마다 주변 도서관을 한번씩 찾아가곤 하지만 책을 빌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 책의 깨끗한 종이를 문질문질하는 느낌이 좋고, 반납기한에 쫓기는 느낌은 싫어서.

그런데 얼마 전 이 동네에서 처음 간 도서관에서 절판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을 발견했고, 두께가 얇고 상태도 좋아서 오랜만에 빌려 보았다. <싱글맨>을 반납하러 갈 때는 다른 책을 또 빌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신착도서 코너를 훑어보다가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발견. 신착도서이니만큼 반짝반짝 새 책인데다 자리에 앉아 잠시 읽다보니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즈 첫 번째인 <나의 눈부신 친구>가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극적인 장면으로 끝났기에 뒷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던 차였다.


페란테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다층성'이다. 대중적인 요소가 풍성한 이야기 속에 여성 문제, 계급 문제, 물질만능주의, 이탈리아 사회의 남부 문제 등 수많은 사회적 이슈를 함축하고 있다. 동시에 페란테는 시대와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감성을 다루는 데 탁월하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제1권에 이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엉클어지는 릴라와 레누의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극의 중심이 되는 감성은 '두려움'이다. 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랑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두려움, 선택과 결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  -662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유년기가 중심이었던 <나의 눈부신 친구>와 달리 릴라의 결혼을 신호탄처럼 하여 시작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릴라와 레누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를 보여주면서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 내면과 심각한 삶의 문제들을 다룬다. 1권에 비하면 2권에서의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릴라의 결혼과 레누의 대학 진학으로 인하여 둘 사이의 접점이 많은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연대감과 묘한 경쟁심, 서로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470~471쪽


 릴라의 결혼은 첫날부터 파탄에 이른다. 폭행과 강간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남편 스테파노의 비겁한 거래를 용납하지 못한 릴라가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그 후 이어지는 릴라의 굴곡진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그에 비하면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사에 있는 대학에 학비 걱정 없이 진학하게 된 레누는 지성인들 사이에서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고향의 온갖 지저분한 관계들에서 멀어진다.


 2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 세대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폭력적인 가부장제다. 릴라의 남편 스테파노는 결혼 첫날 릴라의 뺨을 때린 데서 시작하여 결혼생활 동안 많은 폭력을 가한다. 어디 스테파노 뿐인가? 릴라의 영민함, 강함, 격정적인 변덕스러움과 그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남자들은 결국 같은 이유로 릴라를 욕하고 그녀를 굴복시키려 한다. 릴라와 레누가 깊이 사랑했던 니노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강하고 똑똑한 릴라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다. 리노는 아내인 피누차를, 미켈레는 여자친구인 질리올라를, 스테파노는 아내인 릴라와 정부인 아다를 때린다. 레누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당하지는 않지만, 안토니오와 헤어질 때 폭력의 위험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인다(오늘날 흔히 보이는 이별폭력을 생각하면 60년대의 이탈리아와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아왔다. 낯선 남자는 우리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지만 부모님과 남자친구나 남편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뺨을 때릴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가르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68쪽


 레누의 경우 피사에서 겪는 어려움은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지역적 불리함, 지성도 부도 없는 가정이라는 계층적 불리함, 여성이라는 성적 불리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릴라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릴라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스테파노와 결혼한 후 그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만 후회와 체념에 빠지기보다는 그때그때 원하는 바에 충실하게 행동하면서 버텨나간다. 레누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치열하게 공부하여 아예 그 지긋지긋한 나폴리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한 비범한 여성들이다.  

 릴라의 적당히 타협하려 하지 않는 성정과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레누가 휘둘리는 모양을 보면 릴라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 또한 릴라가 가난과 가족들의 강압(릴라를 이용하여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것들 - 학업적 성취, 예술적 감각, 뛰어난 미모까지 - 을 생각하면 그녀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으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그녀의 비범함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일견 바닥까지 떨어진 듯 보이는 릴라와 빛나는 미래를 약속받은 듯 보이는 레누가 3권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봄에 출간된다는 글을 봤는데.. 지금 봄인데? 5월에는 출간되려나. 영문판으로는 4권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으나 이 두꺼운 책을 영어로 읽어낼 자신은 없다(슬픔). 어쨌든 마지막까지 함께하련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 리뷰


어느 날 오후 릴라가 니노에게 부자와 빈민 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조용히 말했다.

 "왜?"

 "하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니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어떻게? 모두를 상류층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하류층으로 전락시켜서?"

 "그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상류층 사람들이 기꺼이 하류층이 되려고 하겠어? 하류층 사람들이 신분 상승할 기회를 포기하겠느냐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너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응. 계급 간 투쟁이란 다른 계층의 사람들끼리 카드놀이나 하면서 노는 게 아니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거고 이들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거야."  -289~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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