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다섯 가지 위기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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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보의 홍수 속에 많은 것들이 불확실해졌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는 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그른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만 보고 쉽게 믿기 때문에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은 묻히기도 한다. 세계화를 지나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 정책, 중국의 부상과 오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어진 혼란은 세계가 격변하고 있다는 것을, 정세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의태란 생물이 공격이나 자기 방어를 위해 몸체의 색과 모양을 주변의 동식물이나 자연환경과 똑같이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국가 단위의 의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 미국 유럽등은 의도를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의태화한다는 설명을 하는데, 특히 일본 중국의 경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일본의 의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중국도 동북아 공정등을 뒤에서 공작하면서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신뢰성이 낮은 정보로 넘쳐나는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들은 발견하기 힘들다. 저자의 사례처럼(저자에 대한 왜곡된 보도가 위키를 통해 널리 퍼진 사건)진실속에 교묘하게 섞여들어가 본질을 왜곡하지만 아무도 진실을 검증하려들지 않는다. 근거 없는 소문이 확인없이 진실처럼 떠돌아다니고, 특정 세력의 목적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이다. 저자가 지적한바 대로 인터넷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현실세계에서 처럼 판결해줄 사람도 없거니와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에 교묘하게 스며들어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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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에 200년 전통의 독일 본대학 철학과 최연소 석좌교수가 된 저자는 신실재론을 설파하는 철학자이다.

저자는 현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가지 위기들을 가치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테크놀로지의 위기로 규정하고 그것을 신실재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실재론이란 좀 복잡한 개념이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여러개의 현실을 포괄하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의 현실을 원칙상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인간은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현실을 만들어 왔고 디지털 화로 그것이 무너진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철학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이 간다. 도시에 대한 콘셉트는 독일인과 일본인과 한국인이 다 다를것이다. '남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남자는 어때야 한다는 생각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남자라는 개념과 남이 생각하는 남자라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은 오답이고 내 생각이 당연히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창시절 똑같은 답을 맞추던 습관때문인지 몰라도 정답은 하나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 한국에서 그 정답은 다수의 사고 방식이다. 다수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천박한 생각도 이기적인 사고방식도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옳은 것이 되버린다.

 

 

저자의 신실재론과 좀 다를 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sns같은 가상의 사회 정치적 공작과 거짓등으로 인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분별력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본다. 해야 될것은 하지 않고 안해야 될것을 따지고, 주제와 상관없는 것에 집착을 하고 주제는 뭔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진다. 존재하는지도 확실히 모르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믿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외면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상을 하나 혹은 두가지로 설명하려고 하고 규정하려 하고 거기에 속하지 않으면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현상은 수 없이 나뉘어져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실제가 아닌 사이버 현실속에서의 규칙이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중요하지 않은, 2분이면 끝날 것들을 이분법으로 질질 끌며 서로 옳다고 싸우는, 전혀 발전없는 토론에 힘을 쏟느라고 정작 현실세계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게 되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보다는 다수가 진실이고 힘이 진실이 되어버리는, 이분법적 논쟁에서 더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식의 소모적인 싸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도덕적 관념은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종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과 흑인 노예 사냥은 그들을 같은 종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참극이 아닐까 싶다.

도덕적 관념의 잘못된 판단도 문제이다.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될 문제를 종교나 도덕의 이름으로 강요하고 간섭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동성애의 문제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할 생각이 없고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반대로 내 권리를 동성애자가 침애하는 일이 생길 때에는 반발할 것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 및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친 간섭과 억압을 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서 그러하다. 인터넷에서는 저자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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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내가 보기엔 굉장히 균형적인 시각을 담고 있고, 공감이 많이 된다. 인종과 편견에 대한 장은 특히 그렇다. 차별도 특별함도 모두 주의해야 할 특징이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듣고 자란 아이가 흑인에 대한 편견을 이겨내기 위해 흑인과 친구가 되었다면 그 다음단계는 흑인을 특별 대우 하는 것이 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굉장히 동의 하는데, 여성은 차별을 받아서는 안되는 존재인 것에 자명하다. 그 점에서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다. 허나 차별을 넘어섰다고 해서 특별 대우를 받아서도 안된다. 흑인도 백인도 동양인도 그냥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여자도 남자도 성전환자도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과거에 차별을 받았다고 해서 지금 특권을 누려야 된다는 주장을 하는 페미니스트도 있는데, 그것은 연좌제 처럼 아버지가 노비였으니 너도 노비다 라고 하는 것과 다름 없는 또다른 차별인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라지만 나는 처음 접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다른 저서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신실제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목소리도 한 번 귀기울여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철학은 여전히 내게 어렵지만 그래도 이책은 분량도 적고 쉽게 풀어쓴 책이라 재미도 있었다.

서양 철학사를 이야기하는 책들처럼 플라톤이 어쨌고 소크라 테스가 어쨌고 이런 얘기를 질질 끌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이라서 좋았다. 철학 용어 같은것을 잘 몰라도 읽을 수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보통 책보다 약간 작은 판형에 200페이지를 겨우 넘는 얇은 책이지만 생각할 거리는 두꺼운 책 이상이므로 참 할말도 많고 떠올랐던 생각도 많았는데, 다 적자면 너무 길어질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다. 이미 굉장히 길어진것 같다.

책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생각을 하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보다 책을 보고 어떤 사고를 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자유롭게 마음대로 쓴 리뷰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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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 거대한 전환점이 될 팬데믹 이후 10년을 통찰하다
김동원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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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돈에 빠졌고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혼돈의 시대를 맞아 앞으로 국제 및 국내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는 책을 써냈다. 

스페인 독감 이후 근 100년만에 찾아온 세계적 팬데믹으로 인해 100년 전처럼 연쇄적인 혼란의 시기가 도래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책이기도 하다. 우려한다라고 쓴 이유는 그 예측이 예언처럼 운명론적이 아닌 대비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봤기 때문이다. 끼워 맞추기일 수도 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100년 전 세계 1, 2차 대전으로 이어져 수 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시대의 주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은 흐름이다.


물론 세계의 흐름은 딱딱 맞춰서 흐를 수는 없다. 독감을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전조로 보기엔 다른 원인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미래 예측을 할 때는 다각도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언같은 걸 전혀 믿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나 성경의 예언도 마찬가지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는 은유로 된 글이 많은데, 음모론자들이 그 은유를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토정비결이 그러하다. '북쪽은 해롭고 남쪽은 길하리라' 라는 식의 점괘는 누구에게나 맞출 수 있는 것일 뿐. '바넘효과' 처럼 무작위로 받아든 결과를 받은 사람은 자기와 맞다고 믿는 식이다. 사람에게는 많은 특성이 있고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 맞지 않겠는가?

노스트라다무스 1999년 7월 공포의 대마왕이 내려온다는 지금으로는 웃기는 예언을 실제로 믿은 사람이 많았다.

예언이 맞았다 하더라도 우연에 불과하다. 그런 예언은 나도 할 수 있다. '미래에 큰 자연 재해가 중국을 덮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적당히 은유적인 문구를 던지면 된다. 다만 나에게 없는건 예언가의 명성일 뿐이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대학교수가 하는 것하고 동네 아저씨가 하는 것하고 받아들이는 무게가 달라지듯.


물론 예언과 예측은 다르다.

예측은 지난 역사와 현재의 현상들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대비할 수 있으면 하자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저자도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의 이야기들이 나중에 들어 맞든 안맞든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약에 일어날 혼돈에 대비할 수 있는 과정 자체가 중요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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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책은 예측서라기 보단 현재를 돌아보는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백신 보급이 시작되고 하루에 확진자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1년 넘게 거리두기를 시행해오고 몸과 마음을 닫았던 답답함에 희망이 보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다시 헤이해지고 확진자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벗어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코로나의 영향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코로나에서 벗어나도 다른 팬데믹이 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쏟아내고 있는 것은, 지구 환경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오염될만큼 오염되어서 이런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시각이 많이 있다.


코로나는 탈 세계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코로나로 인한 동양인 혐오부터 안그래도 싫어했던 중국을 더욱 경계하게 되는 우리들처럼 교류의 문을 닫을지 모른다. 사이가 좋았던 베트남 등과도 입국이나 비즈니스 문제로 사소한 마찰이 있었고, 중국은 세계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성숙하지 못한 신흥 패권 국가의 등장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도 과거에 그러했는데 중국의 중화사상으로 인한 안하무인은 미국을 뛰어 넘는다. 제1 패권국가 유지가 오래전부터 국가의 방향과도 같았던 미국은 경계를 할 수 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제2의 냉전시대가 이미 시작이 되었고, 트럼프로 인해 불이 붙었고, 코로나로 인해 심화가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로 인한 긴급 재정은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인플레이션을 가중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예에서 보듯이 인플레이션만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예측도 잊지 않는다. 암울한 상황을 나열하는 것은 지금 암울하니까 계속 그럴것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진단하고 인정해서 돌파구를 찾자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나 경제계 뿐만이 아니라 개개인도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이런 책의 가치는 예측이 얼마나 들어맞는지가 아닌 어떻게 대비하고 회복할 것이냐라는 거다.

다음 팬데믹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측했는데 안일어나면 거봐 틀렸네 엉터리다 라거나, 일어났는데 왠지 이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일어난거 아닌가 한다거나.... 둘 다 엉터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찾아올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적이 처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훈련을 하지 않거나 경계를 느슨히 하면 안되는 것처럼. 이런 경각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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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기를 진단하고 극복하는 후반부분이 역시 인상이 깊다. 인구 절벽에 처한 한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나와 관계 없다고 해서 외면한다면 앞으로 내 아이들 조카들이 힘들어질것이다.


저자의 정치적? 견해에도 적극 동의한다. 조선시대의 양당파 싸움이래 마치 한국의 전통문화인것처럼 이분법으로 나누어 발전도 없는 소모성 내전을 벌이고 있는 한국. 갈수록 나아지기는 커녕 심해지는 것 같다. 대대로 남자의 경쟁자는 남자고 여자의 경쟁자는 여자인데, 남녀가 서로 극심하게 인터넷에서 대립하고 있다. 사람이 남자아니면 여자인데 여자란 이유로, 남자란 이유만으로 전부 일반화 시켜서 서로를 탓하고 혐오한다. 이것은 인터넷 시대의 부산물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저자도 지적했듯이 군사 구테타(저자는 혁명이라는 말을 썼지만 난 구테타라고 하고 싶다-이것으로 정치적 성향을 규정하지는 말아주길.)


60년 이후의 정치 역사는 좌우가 번갈아가며 싸우다가 바톤 터치할때마다 서로 비난하고 부작용만 일어난다.

또다시 패거리 정권이 들어서서 파가 갈리는 것은 이제 보기도 지겹다. 내 정치적 성향을 쓰지 않아도 한쪽으로 몰아 쉽게 패대기를 친다.

 내 정치적 성향은 한쪽에 소속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성향이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과거의 과오를 미화해서는 안되지만 다 잊고 인정하며 저자의 말대로 탕평의 시대 내지 중용의 시대로 가야 한다. 저자의 말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공감이 되고 있다. 한쪽을 매도 하고 한쪽만 옹호하는 것이 애국일까? 이제 그런 당파싸움은 지겹다.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코로나 이후에 오히려 기회가 되고 있는 국내기업들이 많지만 국내투자여건이 미흡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IMF 국가부도사태를 벗어난 나라이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처럼 너무 자주 겪는다면 타격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위기가 있을때 서로 합심해서 벗어나야 한다. 위기 의식이 중요한 것 같다. 작은 위기도 위기로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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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지능이다 - 신경과학이 밝힌 더 나은 삶을 사는 기술
자밀 자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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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트콤 빅뱅이론을 보면 천재 물리학자인 '쉘든'이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준다. 머리는 좋으나 공감지능은 보통사람 이하여서, 이기적이고 괴팍하다.

쉘든 정도는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이런 사람 한 둘쯤은 보았을 것이다.

아니, 그게 자신일지 모른다. 누가 나에 대해서 그런 말이나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공감은 지능이다' 는 공감 능력이 인간의 두뇌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연구를 모은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이코 패스나 소시오 패스들을 보면 타고났고, 과학도인 쉘든도 마찬가지다. 그런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라는 신조를 확인이라도 하듯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저자는 공감능력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에서 과학적 실험이나 근거들을 내세우면서 주장한다. 내 개인 경험상으로도 이것에 동의한다. 한 때는 남의 마음에 크게 관심도 없었고 공감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것도 하려는 의지가 있으니 많이 나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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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능력을 굳이 성장시킬 필요가 있을까?

사는데 크게 불편한 것 없을것 같기도 하다.

남의 처지를 너무 공감을 해주다가 그게 거짓말이어서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오지랖만 넓어져 손해만 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지 않은가.

저자에 의하면 공감능력은 꼭 필요한 것이고, 공감을 키울수록 대인 관계 및 직업, 행복지수가 좋아진다고 한다.

많은 실험들로 그것을 증명해놓았고, 책의 부록 부분에는 챕터에서 이야기 했던 주장들의 신뢰성에 점수도 매겨 놓았다. 5점이면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거의 확실시 되는 근거와 검증이 된 것이고, 점수가 낮을 수록 다각도로 검증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2 점이라고 해서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검증이 많이 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읽어보기에도 점수가 낮은 것들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공감에는 남의 감정을 느끼는 인지적 공감, 감정을 함께 나누는 정서적 공감, 그것을 해소해주려고 하는 공감적 배려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들만의 전유물 같지만, 동물들도 공감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결과가 많다.

공감은 진화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필수적으로 협력을 해야 하고, 다른 개체의 위험이 자신의 위험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친절과 협력과 배려는 종 전체의 생존에 필요하기도 하다. 물론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상황도 있지만, 상황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그 중요성을 인지할 능력이 있다.

쥐 한마리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면, 고통받는 쥐를 보고 동요하는 다른 쥐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양이가 달려들어 한마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나는 강아지 두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 강아지들도 공감능력을 보이곤 했다. 한마리를 목욕을 시키고 몸을 말리고 있으면, 다른 한 마리가 그 앞을 떠나지 않고 안절부절 못한다거나, 한마리가 기쁘게 장난을 치면 다른 한마리도 기분이 좋아진다.

지능지수 또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래전 학자들은 지능지수가 한 번 정해지면 평생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수록 퇴화된다고 굳게 믿어왔고 그렇게 공표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고정주의자라 하고, 반대는 유동주의자이다.

과학적 실험의 결과들은 전혀 다르게 나온다. 지능지수가 높아진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아서 따로 검증이 필요없을 정도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의 지능지수가 환경이 좋은 곳에 입양되고 교육을 받으면 크게 올라간 결과를 보인 것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수십년 전에 그 이론은 잘못 되었음이 판명이 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고정주의자에 비해 유동주의자의 공감능력이나 지능지수가 유동주의자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이다. 진실은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지만, 효과는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현명하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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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과한 것은 좋지 않다. 저자는 지나친 공감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공감도 너무 과하면 피로와 스트레스를 불러온다. 우울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너무 지나치게 공감하면 같이 수렁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서비스나 전화 상담원들의 감정 노동에 대한 피로와 스트레스는 건강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공감능력을 진화시켰지만, 최근에는 공감능력이 퇴화되었다고 한다. 80년대와 지금의 조사는 그것을 입증한다. 굳이 자료 없어도 갈수록 삭막해져간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듣곤 한다. 특히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일 수록 그것이 심하다. 그러나 배려와 공감은 손해가 아니라 이득이다. 물론 저자가 지적했듯이 지나치면 그렇지 않지만.

책이 참 좋다고 느껴졌다. 주장에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고 설득력이 있다. 어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와닿는다. 그리고 삶에 도움이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공감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좀 달라질 것 같다. 공감능력의 '쓸모' 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왠만하면 책을 지인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쉽고 재밌다는 이유로는 더 추천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자유롭게 느낀 마음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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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헤이의 내면의 지혜 - 마음과 영혼을 위한 명상
루이스 헤이 지음, 엄남미 옮김 / 스타라잇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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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가장 살기 좋았던 시절은 언제일까?




답은 바로 지금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노동을 해야 했으며, 전쟁과 질병으로 쉽게 죽어갔다. 아버지 세대만 해도 쉽게 죽는 아이가 많았는데, 아버지 밑으로 삼촌도 어릴적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맞다. 별로 수긍이 안간다.




하지만 언어학자이자 생물학자인 스티븐 핑커에 의하면 이말은 사실이다. 통계나 그래프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물론 개인별로 국가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우리나라만 해도 식민지를 거쳐 6.25, 탄압이 심했던 군부 독재 시절을 거쳐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과거가 자꾸 좋아 보이는 것은 사람들은 과거를 미화하는 성향이 있고, 과거의 시절이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때가 좋아 보이는 것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닌데? 라는 말은 일단 접어두자. 개인적 이야기는 지인이나 상담전문가에게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고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몸은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스트레스나 마음의 병, 우울증 등을 앓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아 진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다루는 책이 참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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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헤이는 뉴에이지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동기부여 작가이다.


심리치료 전문가라고도 하는데 학자는 아닌 것 같다. 상당히 유명한 사람 같은데, 검색을 하니 많은 정보들을 볼 수가 있었다. 영성가라고 하는데 영성이라면 왠지 종교적 성향이 있는 사람같은데 뉴에이지는 특정 종교에서 싫어하는 집단이므로 또 종교적은 아닐 것이다.



영혼을 위한 명상이라고 씌여져 있어서 읽게 되었지만, 명상하는 방법이 나와있는 것은 아니고, 긍정적인 메세지를 읽음으로서 마음을 다스리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메세지를 읽고 그것을 되새기면서 명상을 해도 될 것이다.



책은 얇고 글이 짧기 때문에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단숨에 읽을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아니 그러면 안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달하는 메세지의 주제는 단순하다.



'긍정' '자신을 사랑하기' '치유하기'



시크릿 류의 자기계발서들이 권유하는 메세지를 모은 아포리즘적 격언 모음이라고나 할까. 논리나 그런것은 없고 그냥 확언, 자기 긍정, 자기 최면 이런 것을 위한 책인 것 같다.



책을 받아보고 처음엔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내면의 치유를 하는 방법이나 명상을 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왠지 이런 책들은 비평하기가 힘들단 말이다... 비평하면 내가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할것이 아닌가?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의 형식은 어떤 주제를 위해 그 근거들을 나열하는 일반적인 방식의 책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활용한다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류의 긍정론을 무조건 긍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는다. 무조건적인 긍정은 현실 부정이나 왜곡, 회피의 도구로 잘못 사용될 위험이 있다. 나의 실수로 누군가 다치거나 피해를 입히는데 내 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개인이 잘 판단할 일이다. 그래서 판단력이나 주관이 없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경험상 효과도 있다. 영업직에서 일할 때 목표를 잡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효과가 있었다. 그걸 한다는 것이 은근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현상은 현상일 뿐인데 사람은 그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그것만이 답인것 마냥 생각하곤 한다. 아니 아예 그렇다는 것도 인식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현상을 나쁘고 고깝게만 보면 모두 그렇게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부정적 사고 방식이 습관화가 되면 일어나지 않은 일도 걱정하고 걱정대로 되기라도 하면 거봐 그렇잖아 라며 생각해 버린다. 내가 그것을 예측했다는 어떤 쾌감 같은 것이 내 상황을 망칠 수도 있는데 그 쾌감을 위해 일이 꼬이길 나도 모르게 바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은근히 즐기는 사춘기 처럼.



이 책은 그런것 같다. 책 자체로만 보면 별게 없다.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다. 자기 확언이나 자기 최면 같은 것은 심리학적으로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이 된 실험 결과들도 많이 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느낌을 솔직하게 쓰자면 뭐야 이거 좀 황당하고 단순한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잘 활용한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어느 쪽으로 더 강화를 시킬지는 독자에게 달린 것이다.



저자는 얼마전에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90세 가까이 살았으니 장수를 한 편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치라면 바로 저자의 삶이 아닐까 싶다. 노령에도 삶을 좋은 쪽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퍼트리는 삶이었으리라고 대략 짐작이 되니까. 뭐 저자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대략 찾아본 것으론 그렇다.

 

제목을 루이스 헤이 '내면의 지혜' 로 했으면 어땠을까? '의' 가 두번 들어가는 문장은 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자유롭게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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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만만해지는 책 - 넷플릭스부터 구글 지도까지 수학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발견
스테판 바위스만 지음, 강희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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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이 곧 수학자였다는 그리스 시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문과와 이과라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학문이 어떻게 하나의 학문처럼 여겨졌을까? 인문학과 수학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학은 과연 인생에 도움이 되는 학문인가?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사람들은 '계산기가 다 계산 해주는데 그걸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나?' 라는 핑계거리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 나는 수학이 얼마나 필요하고 쉬운 학문인지 입증하고 싶다 '


수학은 딴세상의 학문, 마치 외국어를 읽는게 더 쉬워 보일정도일 지경인데 쉽다니! 학교 수업 말고는 필요없어 보이는 학문인데.

저자가 불과 스물 한살에 '수학철학' 으로 박사 학위를 딴 천재라서 쉬워보이는건 아닐까? 과연 평범하디 평범한 나에게도 쉬울 수 있을 것인지... 이 책은 수학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는 에세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수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흥미를 갖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씌여있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나? 수학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수학에 친근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수학공부하는 학생이나 부모님, 수학을 포기했던 나같은 사람이 읽어볼만한 책이다. 

무엇을 공부할 때 이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동기가 부여가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수학박사가 될 수도 있고 수학 포기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 학문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면 공부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판단력과 주관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학교가 그런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주관이나 판단력은 어른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긴 하다만. 공부 잘해야 돈 잘 벌고 훌륭한 사람 된다는 막연하고 정확하지 않은 말로 때우는 것은 반감만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예가 많을 뿐더러, 동기라는 것은 좀 더 구체적이고 개인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수학 과목에 있어서 학교가 못해주는 그런 역할을 대신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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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본다면 누구나 수학이 '쓸모' 있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검색이나 알고리즘은 수학을 통해서 결과를 산출한다. 우리가 쉽게 하고 있는 컴퓨터는 수학의 이진법을 언어로 사용한다.


수학은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이미 음지에서 '쓸모' 있게 쓰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주 보고 신뢰하기도 하는 '통계'만 해도 수학인데...


1960년대의, 이름마저 수학적인것 같은 천재 수학자 '퀀트'는 수학을 이용해 라스베거스에서 수학을 이용해 블랙잭을 이기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는 실제로 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라스베거스로 가서 블랙잭을 했는데, 불과 1주일 만에 판돈의 2배 이상의 돈을 땄다고 한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식시장도 수학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저평가된 증권을 매수하고 고평가된 증권을 매도하는 방식으로 개인투자에서 30년간 연평균 20%의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어보니 수학과 철학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철학은 그냥 그렇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항상 논리적이다. 논리는 수학의 체계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눈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가 아닌 실제의 그림자로 보는 이론인데,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도는 실제 땅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지도는 땅을 비슷하게 그려낸 것이지 땅 자체가 아니라는 말로서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 우리 자체는 아니다라는 인식에 주로 쓰인다. 사람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고 한 행동이나 결과적으로 어리석게 된 행동 때문에 실수를 하면, 내 자신이 실수투성이인 사람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고 나와 내 행동을 분리하면 나 자신이 실수가 아닌 내 행동이 실수인 것이 된다. 그것은 책임회피같은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을 곧바로 수정할 수 있고 다른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한 사고 방식이다.


이데아라는 개념은 이것보다 더 어렵다.

위의 말을 인용하자면 '땅은 실제 땅이 아니다' 라는 말이 되는 건가?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 있지만 이데아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밝혀진게 거의 없던 시절, '신' 이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시대의 사관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철학자들이 신을 잘 언급하진 않지만, 신이 있는 세계에서는 반드시 '영혼'이라는 추상적인 존재가 늘 있고, 그 영혼의 관념이라는 것이 육체의 실체 즉 이데아로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플라톤은 우리가 보는 사물도 그림자에 불과하고 숫자는 인간의 세계가 아는 다른 차원에 부유하는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아주 고대의 생각이기 때문에 깊기는 해도 저자의 말대로 너무 멀리 나간것 같긴하다.

매트릭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매트릭스에서의 공간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을 '수학' 이라면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구글이나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길을 찾아내고 영화를 추천하고 추천할 수 있는지, 겉으론 보이지 않는 수학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더이상 수학의 '쓸모'를 논하는 것 자체가 쓸모 없을 지경이다.


수학은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학의 비유도, 언어의 추상적인 단어도 수학만큼 세상의 추상적인 것들의 본질을 표현하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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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는 개념, 단어 자체가 없는 소수 부족들도 수학에 대한 기본 감각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물이나 어린아이도 그런 감각이 있다는 것을 실험한 결과도 재미있었다. 수학의 기원과 수학과 함께한 역사이야기도 재밌었다.


수학은 복잡하지만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축소 시키기도 한다.

제일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알고리듬에 관한 이야기다.

수 많은 정보 중에서 어떤 것이 엉터리 정보이고 어떤 것이 좋은 정보인지를 판별하는 것, 조회수 보다 신뢰도가 높은 싸이트와 연계된 정보를을 걸러 결과를 보여주는 것등도 수학적 계산으로 가능하며, 그것은 굉장히 이치에 맞고 논리적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글에서 원하는 결과를 쉽게 찾을 수가 있고, 넷플릭스에서 내가 마음에 들만한 영화를 추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학의 추론은 인문학의 것과 많이 닮아 있다. 무엇이 의미있는 정보인지, 쓸데없고 신뢰가 안가는 정보인지를 가려주는 것에 수학을 적용하니 높은 적중률로 정보를 보여준다.


물론 저자도 지적했듯이 이런 결과는 확증 편향적이거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특히 나에겐 넷플릭스가 그런데, 다양하고 식상하지 않은 장르를 좋아하는 내게 많이본 장르이기 때문에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삼류 공포영화를 추천해 주는 경우가 그렇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내게 많은 도움은 되질 않는다.


확실히 인터넷 초창기인 90년대 말에는 검색을 하면 엉터리 가짜 정보나 엉뚱한 결과를 보여줄 때가 많았는데, 현재는 많이 진화하여 정확한 키워드만 입력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세상의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도덕적이든 아니든. 수학을 모르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세상 돌아가는 방식' 이 수학을 잘 아는 사람에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수학을 포기한 것이 참 후회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학생이라면 미래를 위해서 수학을 공부할 동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자유롭게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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