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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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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 출행랑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손자병법이 더 유명하고 인정받아온 고대 중국의 병법서이지만, 삼십육계도 그 못지 않게 유명하다. 옛날에는 손자병법에 비해 간략한 계략이 많다고 하여 무시되어왔으나 현대에 도리어 인정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이란 나라는 싫어하지만 중국 고전은 꽤 접해본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삼국지 속의 사례가 많이 나오는데, 내가 어릴 때 처음 읽은 장편소설이 삼국지였다. 어린이 책만 읽던 시절을 벗어나 사춘기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즈음 되서 유일하게 읽은 책이 삼국지인데, 만화 60권짜리로 접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삼국지 3번을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그 세번 이상 읽은 사람이다.

말은 그냥 말이라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고 해석하기 나름인데, 3번 읽으면 똑똑해지기 때문에 안 읽은 사람을 앞선다는 식의 해석이 있고, 3번 읽으면 교활한 권모술수를 익히게 되어 교활한 사람이 되므로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전자는 삼국지 전집 광고에서 은근히 조장하는 말이고, 후자도 잘 모르겠다. 책하나 읽는다고 사람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 것 같다.

고대의 전략 전술을 현대에 활용하려면 응용을 잘 해야 할텐데 그게 부족해서일지 모르겠다.

36계는 본격 전략서로서 그 가치가 더할 것인데 문제는 앞서 말한 응용일 것이다.

 

그냥 읽으면 이게 뭔 소린가 싶거나 그냥 이야기 거리로 읽게 될 것인데, 이 책은 현대에 응용을 할 수 있도록 풀어 써놓은 것이 좋다.

 

그리고 한자원문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도 눈에 띈다.

어르신들이 들으면 길길이 뛰시겠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나도 중년에 접어든 나이지만 60 70이 넘어도 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드는 중국의 음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도 중국의 문자를 쓰지 않아야 하고, 쓰려면 중국어인 외국어로서 써야 한다고 본다.

 

한글이 창제된지 500년이 넘었지만, 제대로 한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일제 강점기 부터이다.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호 발행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한글로된 글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한글을 언문이라 무시했던 식자층들이 나라의 큰 위기를 맞이하고 나서야... 모든 사람이 쉬운 글을 알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음이 같다고 한자를 써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데 언어는 원래 그 뜻이 원래 있던게 아니라 무엇이든 인간이 붙인 거기 때문에 결국 만들어 쓰는 것이므로 이중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자성어나 유행어 줄임말이나 본질적으로 다를바 없다. 어렵고 복잡하면 유식한 것인가? 요즘에는 한자 말고도 배워야할 학문이 너무 많기도 하고 우리만의 문자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한자를 안쓰는게 옳다.

그리고 베트남 같은 경우에도 한자음이 많아 우리 말하고 비슷한 단어가 참 많다. 학생을 학씽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그렇지만 베트남은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자를 썼으나 한자를 폐지하고 문맹률이 높이 올라갔다.

우리는 베트남어보다 훨씬 훌륭하고 한자보다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 있으므로 한자에 기대지 않아도 전체적 문맥을 살피면 충분히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중국 고전을 읽을 때는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원전 그대로 볼 능력이 없으면 반드시 해설을 겸한 책을 봐야 한다. 한자를 잘아는 사람이면 중국어본을 읽거나 하면 된다.

한자가 하나도 안나오는 것에 아쉬울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전혀 아쉬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영어같은 외국어로서의 한자를 배우면 모를까.

 

 

현대인들이 비교적 삼국지에는 친근하기 때문인지 삼국지의 상황을 많이 넣었다. 36계라는 책이 정확한 원전이 없기도 하고 이전에 나온 여러 병법서를 참고하거나 편집한 내용이 많다고 하니 이렇게 풀어서 해설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손자병법의 손무는 최상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삼국지 인물을 무력 순으로 좋아한 어릴때는 이해가 안되었는데, 나이가 드니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삶에서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리게 되지만 그게 물리적이든 말싸움이든 내가 이지던 지던 석연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싸우지 않고 잘 해결하는 것이 서로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피하기만 하면 안되지만 꼭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안싸우는 것은 현명한 것이다.

 

한고조 유방이 통일을 할 때 1등 공신인 군사 전략가 한신은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건달이 자기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하자 그냥 기어갔다고 한다. 후에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었을 때 그 건달은 벌벌 떨었으나, 보복하지 않았다.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고 큰 목표를 위해 작은 어려움 쯤은 넘길줄 아는 대범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신의 이 일화를 생각하며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날뻔한 비매너 운전자에게도 이젠 그냥 넘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다른 중국 고전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너무 과대평가를 할 필요는 없다. 중국 고전 그대로라면 현대에 응용하기란 쉽지도 않고,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찾아보는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응용하는가에 따라 충분히 실용성이 있는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의미를 살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더 전문서적을 찾아보면 되고, 이런 대중서에서는 이렇게 풀어서 쓰는 것이 읽기도 편하고 재미도 있고, 응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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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과학 - 친절, 신뢰, 공감 속에 숨어 있는 건강과 행복의 비밀
켈리 하딩 지음, 이현주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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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다는 것이 왠지 익숙하지 않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구 등 몇몇에게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익숙해져버린것 같다.

학교에서도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어느정도 표면적으로 필요할때만 발휘되는 다정함.

 

다정함을 모든 사람에게 발휘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잡상인이나 호객꾼들 사기꾼들, 배신, 거짓, 이기주의가 난무하는 곳에서 다정함을 발휘한다는 것은 내 보호장벽을 없애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래 거절을 잘 못했던 나는 호구가 된적이 많았고 반드시 거절이라는 것을 익혀야 했는데, 거절도 웃으면서 부드럽게 하면 되지만 그게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표정을 찌푸리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행동을 단호하게 해야 거절을 할 수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보이지 않는 장벽을 어느정도 치고 살아가는 것 같다. 과거의 경험이나 교훈이 어느정도 그렇게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을 쉽게 믿고 사기를 당한다는 것은 착한게 아니고 약한 것이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은 겁이 많아서 사람들이 나쁘다 라는 핑계를 대는 것이기도 하다. 그저 분별력을 갖추면 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꺼려하고 나쁘게 보는 것 중 많은 경우가 자기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자존감을 가지고 분별력을 갖추면 해결되는 문제일지 모른다.

 

내가 경험한 나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잘 알 수 없기에 일단 벽을 치고 보면 좀 더 쉽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 믿음대로 그런 편이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외로움이 요동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맹수들보다 힘이 약하지만 불과 도구를 이용하고 지능을 발달시킬줄 알았지만, 무리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민족과 나라, 종교 등을 통해 응집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생존과 진화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친절, 신뢰, 공감은 무리 생활에서 결속력을 높이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현대의 사회생활에서도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일텐데, 이것이 건강과 행복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이 책은 하고 있다. 컬럼비아대 메디컬센터의 정신의학 교수인 저자 켈리 하딩은 원인불명의 질병 증상들에 대해 연구하다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치료뿐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요인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랜 연구와 풍부한 임상사례 등을 이 책에 담아냈다. 건강의 숨은 요소라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적 요인의 영향을 분석하고 증명하여 좀 더 본질적인 건강의 요소를 탐구하는, 놀랍고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어떤 성질이 더해지는 것을 DNA 메틸화의 후성유전과정인데, 유전자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세포의 성질을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한다. DNA가 생각보다 유연하다는 것인데 우리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전자를 껐다 켰다 할 수 있고 한다. 사회적 환경은 인간 DNA의 서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환경과 결집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인간의 생존률을 높이고, 유대 관계는 진화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여럿이 생각하는 것이 뛰어난 법이다. 한 명의 뛰어난 학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학자 혼자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아무리 우수한 두뇌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해도 환경이 없다면 말조차 하지 못한다. 단순하게 타고난 행동을 태어나자마자 하는 동물도 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역사도 깊고 복잡하기 때문에 습득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종이 유년기가 유독 긴것일지 모른다. 정글에 혼자 남겨진 아이가 운이 좋아 생존한다고 해도 저절로 언어를 익히고 학습을 할수는 없다. 동물들의 보살핌이라는 환경에서 자라나면 인간도 동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한 명의 뛰어난 사람도 이미 뛰어났던 사람들의 지식을 익혔기 때문에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전화가 발명되어 있는데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전화를 연구하고 개발하여 만들어 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각해보면 굉장히 당연하고 단순한 원리이지만, 사람들은 자꾸 타고난 재능과 집안, 환경을 이야기 한다. 우수한 아이를 갖길 원했던 여성이 학력이 높고 지능이 높은 사람의 정자를 기증받아 낳는다고 해도 환경의 도움없이 그 아이기 뛰어나기란 불가능 하다. 그 여성은 정자를 기증받을 것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강아지가 아무리 뛰어나도 말을 할 수 없듯이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봤자 인간이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아무리 모잘라봤자 인간이다. 유전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후천성 환경적 요소가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입양된 쌍둥이가 한 명이 좋은 가정에 입양되어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되어서 나중에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찾았는데, 그 쌍둥이 동생은 성적도 우수하지 못했고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알콜 중독자에 폐인이 되어있었다는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3장의 사회적 연결 부분과 4장의 직장과 일 부분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도 혈압과 질병과 스트레스를 낮추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직장에서의 존업성과 일에 대한 만족도는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직장은 스트레스 투성이이기도 하다. 자신의 직장에 만족하면서 일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며 돈만 있으면 이런 직장 따위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것이다. 나 또한 그런 직장인 중 하나다. 하지만 직장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생각의 관점을 많이 바꿔야 될 것이라는 필요성 또한 느꼈다.

 

 

건강함은 단순히 좋은 음식을 먹거나 꾸준한 운동을 한다고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닌듯하다. 물론 필수 요소이긴 하지만 운동과 식단을 조절하는 사람들도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잘 마시지 않고 특별히 나쁜 음식을 아주 즐기지도 않는데 병에 걸린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의사는 주요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책에서는 사회에서 건강의 비결을 찾고있다.

물론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성 만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요소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앞서 기술한 진화적 의미에서도 그럴 것이고,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여러 실험결과들도 그 사실을 증명 해주고 있다.

중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모아니면 도의 양 극단보다는 항상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깨닫고 있는데,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한 두가지의 보편적인 알려진 원인으로 생각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여러 요소가 원인이다. 알려진 원인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스트레스나 사회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건강한 삶이란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어렵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느정도의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사랑의 힘이라는 만화책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진부한 설정이라 여긴적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컨텐츠들은 보통 남녀간의 사랑만을 중점으로 다루면서 그런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남녀간의 사랑이 순탄치 못했고 힘든 적이 많았으므로 그런 생각은 틀린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사랑은 그저 호르몬의 작용이고 첫사랑은 겉모습에 반해서 상대를 상대의 본질과 관계없이 내 상상속에서 키워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남녀만의 것은 아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누리고 있었던 부모님의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친구나 호감가는 지인, 어떤 물건 등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남녀간의 새로운 사랑을 할 필요가 없이 기존의 사랑만 잘 지키면 되는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정도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그동안 새로운 사랑을 찾는 중독에 빠져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정도 마음의 정리를 하게 되니 다른 사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메세지처럼 넓은 범위에서의 사랑이 '건강과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랑이 더 진실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남녀 혹은 남남 녀녀 등 연인간의 불같은 사랑은 자극적이고 강렬하지만 허무할 때도 있고 큰 상처와 허탈감이 찾아 올수도 있다. 너무 큰 상처를 받으면 방어적이 되어 연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벽을 치게 되기도 한다. 상처를 받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잘 되서 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페닐에탈아민 이라는 호르몬 물질의 유효기간 -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3년 - 이 지나면 더이상 그런 감정이 잘 들지 않는다. 어쩌다 생긴 새로운 상대에게 더욱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 끝나야 알아볼 수 있고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 배려 등의 감정은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호르몬의 작용이 끝났을 때에도 상대와 교감을 하고 신뢰를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겠다.

내가 이루어온 것들이 나혼자의 힘으로 해낸줄 알았는데 환경이라는 요소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많은 지식과 생각의 전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책이었던것 같다. 주관적이지만 이것이 독서의 즐거움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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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계몽 - 이성, 과학, 휴머니즘, 그리고 진보를 말하다 사이언스 클래식 37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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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스티븐 핑커의 책을 좋아한다. 심리학, 과학과 철학, 생물학 진화 심리학을 아우르는 그의 통찰력 깊은 글들은 섬세하고 폭넓고 꼼꼼하며 친절하다(부분적으로).

나의 역사나 과학 등의 배경지식이 그다지 폭넓지 못해 그의 책을 읽어나가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자신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그래서 그의 저서들이 하나같이 두꺼운지도) 읽다보면 의외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몇몇 저서는 전자책으로 소장을 하고 있다. 전자책 단말기로 독서를 겸하는 사람들 중에는 똑같은 책을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각각 소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어서 2권은 전자책으로, 나머지는 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있다. 구할 수 있는 그의 단독 저서는 다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신간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계몽주의에 대한 무지한 나의 인식은 교훈적인 근대 문학의 이미지뿐이었다.

 

유럽에서는 17~18세기에 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은 개항이후 일제 강점 초기에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 하는 등 계몽 소설도 많이 쓰였는데, 유명한 심훈의 상록수도 농촌계몽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훌륭한 운동이었지만 현대에서 계몽운동이 필요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교훈을 주려는 문학등은 현대에서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나의 무지함으로 인한 인식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미 우리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인류의 삶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착각이라고 근거를 들어 이야기 했던 그였는데 이 책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말한다. 생각해보면 사극만 봐도 종일 열심히 일해도 밥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것이 일부 귀족을 제외한 보통사람의 삶이었다. 근대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각종 탄압과 군부독재, 언론 조작 등으로 힘든 삶을 사는게 사람들이다.

허나 몇몇 사람들이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곤 한다. 나만해도 학창시절에 공부를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범죄자라도 된것 처럼 교사들에게 매일 두들겨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 요즘은 폭력배도 그렇게 맞지는 않을 것이다. 강아지로 매로 다스리면 말을 잘 듣기는 커녕 배뇨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그때가 좋았고 그립다고 느껴지기는 한다. 그것은 아마 그 시절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때의 젊음이 좋은 것일 거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지 않나 싶다. 생각해보면 휴대폰도 없고 집전화 혹은 공중전화에 줄을 서서 연락을 해야 하던 시대로 돌아간다면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닐텐데.

 

그렇다면 계몽 주의란 무엇일까?

장폴 샤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문학이 무엇인지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철학서적등에서도 철학이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는 철학자는 아무도 없다.

어떤 학문의 대가일수록 그 학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내린다 해도 학자마다 그 정의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뭐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면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티븐 핑커도 마찬가지로 계몽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바는 이야기 하고 있는데, 바로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 이다.

계몽주의는 인류의 생존과 진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런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엘리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문화속에 자리한 오랜 계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기독교의 '원죄' 론은 태초의 한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연좌제를 적용시킨다.

나는 맛보지도 못한 그깟 열매 한 개 때문에 태어날때부터 죄인이 되어 회개를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그걸 이용해 교회에 안다니면 큰 죄를 짓고 있는지도 확인시켜주지 못할 지옥에 떨어진다며 협박을 한다. 마치 자신들이 신의 권한을 가져서 그렇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존재처럼 말이다.

그렇게 구축한 시스템으로 그들이 얻는 것은 충성과 지지세력과 돈이다. 그것은 진정 신에 대한 것일까 교단에 대한 것일까? 그들의 신은 누구도 신의 권세를 누리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토테미즘적 신앙과 유교사상을 섞어 신대신 목사를 큰 어른으로 섬기며, 목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누린다. 그저 신의 말을 전달하는 라디오 내지는 뻐꾸기가 되어야 할 목사가 신대신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바트 어만이 지적한 대로 오류 투성이인 성경을 두고 자기들한테 불리한 것은 은유고 유리한 것은 직유로 해석한다. 과학은 이미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지 오래지만 종교의 이권을 포기 못하는 세력들은 신의 멱살을 잡고 현대까지 질질 끌고 내려왔다. 그리고 이제 성경에 과학을 이식하려고 한다. 진화론은 틀렸다고 말하며 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은 진화론이 진리라고 말한 적이 없다. 과학은 고집쟁이가 아니다. 그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하는 과정이 과학인 것이다. 과학은 그저 세상을 탐구하고 호기심을 탐구한다. 확증 편향적으로 결론을 정해놓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자신의 가설이 틀렸다고 입증하는 것이 과학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가설을 연구하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입증을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만약 진화론이 틀렸다는 증거가 있다면 과학자들은 그것을 발표했을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 신앙은 반 계몽주의 이념에 해당한다.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자신이 속한 공통체와 협동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만 그것이 다른 세력을 해하거나 불평등과 차별을 불러오면 안된다. 한국도 굉장히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 으로 인해 인종차별(특히 동남아권)이 심하고 폐쇄적이다.

 

종교나 민족주의 외에도 중국의 중화사상등 자신들만이 진리고 참이라고 주장하는 집단들의 번영은 다른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종교인들은 부정하겠지만 역사적으로 종교가 행해온 수 많은 전쟁과 학살과 테러 등을 보면 답이 보인다. 유일신이라는 이념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신만이 진리고 나머지는 틀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유일신은 유일하지 않다. 서로 자신들의 신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적그리스도며 악마라고 말한다.

중화사상도 마찬가지로 중국인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다른 국가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각종 민폐를 끼쳐도 괜찮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우생학과 별로 다를게 없는 생각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개개인에게나 집단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로 인해 혼란스러운 전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지표가 될 수도 있는 것이 계몽주의라고 생각된다.

각종 비관론은 현재의 시대가 암울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지만 현대야 말로 평화의 시대다. 지구 역사상 가장 전쟁이 없고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없는 시대이다.

 

다만 갖가지 색다른 현대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라가 곧 망할것 같고 세상이 곧 무너질것 같은 불안마저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서 이런 답답함과 불안함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바로 볼 수 있도록 시각과 관점을 바로 잡고 탐구를 해야할 것이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득' 이라는 목적을 가진 이들의 선동과 조작, 종교가 주입하고 있는 죄의식, 그들만의 해결방법인 회개, 등 수 많은 가짜 정보와 선동들이 넘치는 이 세상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본주의는 상대적 박탈감과 정신적인 고통을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보가 많을 수록 사람들은 원래 알고 있던 것들을 고집한다고 한다. 선택지가 많을 수록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뭐가 옳은지 판단하기 쉽지가 않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거라는 걱정과 로봇이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거라는 불안 또한 영화에서만 보는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점차 퍼져나가고 있는 고민거리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것 또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지만 이것을 걱정만 하기 보다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항상 낫다.

이성과 과학, 휴머니즘과 진보는 이런 수 많은 불안덩어리들을 없애진 못하겠지만 보다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계몽주의도 물론 완벽한 사상은 아니다.

유토피아가 그저 이상에 머물 수 밖에 없듯이 완벽한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개인이 코로나를 아무리 예방한다고 해도 어디선가는 새어나가듯 퍼져나가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증명하는 것이다.

바로 과학자의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온갖 가짜정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추종자들을 모아 집단의 힘을 발휘하려고 애쓴다. 그런 것들을 하나 하나 믿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믿음은 진리 자체가 아니다. 데이터와 증거 논리 등의 이성으로 온갖 미신적인 믿음을 물리치고 절대 진리가 아닌 입증된 사실을 추구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점을 추구하되 공통의 이익또한 생각하는 것이 길게 보면 내 자녀와 내 후손을 위한 길이 된다.

 

 

스티븐 핑커는 좌도 우도 아니고 자유주의자이다. 나의 성향도 그와 비슷하며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와닿았고, 지침이 되고 가르침이 될 수 있었다.

 


[이 글은 네이버 컬처블룸 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 받아 요약보다는 감상위주로 서술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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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
에발트 프리 지음, 소피아 마르티네크 그림, 손희주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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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나 중국의 역사관련 서적을 읽을 때 '오랑캐' 라는 말이 등장한다. 야만스러운 종족이라는 뜻으로 삼국지에도 흉노족이나 아만 족 등을 오랑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어감만 들어도 무슨 털이 잔뜩 난 야만인이나 유인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명국이라도 유사시에는 모두 오랑캐가 된다. 중국은 자기들 말고는 대부분을 오랑캐라 불렀다. 안하무인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중화사상은 아직도 자기들만 최고고 나머지는 오랑캐 내지 조연으로 전락을 시킨다. 나라 이름 자체가 오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나라도 오랑캐라는 말을 썼었다. 중국 사대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랑캐로 지목된 나라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당연히 오랑캐가 아니다.

 

유럽의 입장에서는 인디언은 야만인이고 아프리카나 인도 등도 모두 야만인으로 보았다. 콜럼버스의 탐험을 신대륙 발견이라고 칭송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인줄 알았다는 콜럼버스는 현 아메리카 대륙의 거대 제국 미국의 명분을 위해 새로운 꿈의 대륙을 찾아낸 위대한 발견자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듯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쓰인 세계사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야만인이었을 우리 나라의 역사서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던 필리핀의 국교가 카톨릭인것처럼 잠식당해있다.

 

그래서 이 책의 취지가 참 좋았다. 세로운 시점에서 세계를 관찰한 이 책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서양 중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문화권을 중심으로 하지도 않는다. 제목대로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책의 이곳 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책은?

 

큰 판형에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양장판으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은 소피아 마르티네크의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전개된다.

약 25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 인간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영장류가 살았다고 추정이 된다.

그러나 말을 하기까지 진화를 하게 된 것은 10만 년에서 30만 년 전부터라고 한다. 문자가 생긴지는 겨우 5,6천년 밖에 되질 않았다는데, 동물 벽화나 그림은 5만 년 전쯤에 그린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생인류와 비슷한 영장류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데니 소바인 등 4종이 있는데, 현생 인류 외에는 다 멸종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도구의 사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성경에 나온 이야기와 비슷한 노아의 방주, 대홍수 같은 문장이 나오는데, 구약성경이 이 바발론의 문학을 인용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한다. 문자의 발명도 바빌론에서 선이나 동그라미 십자가등의 표시나 그림, 글씨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기록을 보면 현재에 전해지고 있는 역사적 기록들이 어느정도 사실이나 조금씩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다른 국가의 설화가 서로 비슷한 것도 있고 심지어 문화권이 다른데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곤 하는데, 이것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구전된 것이 아닐가 한다.

 

바리가자와 갠지스를 지나 중국의 장안을 거쳐 비잔티움 제국 등으로 전개되는 문명의 이야기는 물길을 통해 흘러간다. 지정학적인 위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인도양의 바라가자는 교역망의 중심이었다. 후추처럼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물건들이 활발하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상인이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이라는 뜻인데, 주나라에 점령당한 상나라 사람들이 세상을 떠돌면서 교역을 했다는 것에서 유례했다. 인도양 지역이 동서양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가능하도록 잘 설명하고 있다.

 

 

 

 

다시 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린다. 아프리카는 유럽인이나 중동인들과의 접촉으로 많이도 변했다. 포르투갈인이 내륙으로 접어들어가고 교역보다는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무역이 시작 되었다.

 

알렉스 헤일리가 자신의 조상을 추적해서 출간한 '뿌리'를 읽어보면, 헤일리의 조상 쿤타킨테의 부족은 종교가 있다. 그런데 그 종교의 신이 '알라' 이다. 알라는 그냥 '신' 이라는 뜻으로 기독교의 야훼(하나님은 한국에서의 의역이라 할 수 있다)와 같은 뜻이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신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신의 이름이 필요 없다. 아프리카 지역에 오래 전부터 종교가 전파되었다는 근거일 것이다.

 

그러나 선교 뒤에는 침략과 노예 무역이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다가서서 침략을 하는 유럽인의 방식은 새로울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선교 때문에 세상의 분쟁이 더 많아지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본다. 일신교도들이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해악과 죄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과학이 없던 고대 시대에 이해하지 못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그저 '신' 이라 지칭하여 경외하였고,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낱낱히 밝혀놓은 사실들까지 왜곡하고 부정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고, 그 존재하지 않는 신에 의해 인간이 다시 해를 입고 있는 아이러니 한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철저한 무신론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훌륭한 주제와 멋진 삽화... 그리고.....

전설의 레전드식....

번역....번역...

 

책을 읽어나가는 데 초반부터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지금 글씨위를 달리는 것인지 책을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몇 번이고 돌아가 읽기도 했다.

그리고 곧, 얼마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역자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손희주... 낮선 이름이다.

 

그런데 옮긴 이가 번역한 책의 목록에서 얼마전에 읽은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나는 그래도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다.

 

올해 5월에 출간되었고 6월 초에 서평을 쓴 바 있는데, '좋은 내용이었지만 번역이 이상하다'라고 썼던 바 있다. 역자의 이름은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문장이 가독성이 떨어지고 비 전문가인 내가 봐도 '이렇게 번역하는게 맞나?'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말하자면 다 만족스러운데 번역만 마음에 안든 책이었다. 우르술라 누버의 다른 책을 읽고 싶었지만 역자가 같아서 포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5월에 <나는 그래도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를 출간하고 4개월도 채 안되어 이 500페이지가 넘는 전문적인 서적을 새로 번역을 해냈단 말인가? 한 역자에게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뭐 동시에 작업을 하거나 미리 해놓은 것을 나중에 출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그때 느낀 어색함보다 훨씬 어색하다. 어색하다 못해 어설프다.

과장 좀 보태서 무슨 구글 번역기를 돌린 것같이 느껴진다. 번역을 할 때 보통 윤문과정을 거치는데, 이 책은 윤문을 아예 안했거나 대충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29 페이지의 문장을 한 번 보자.

 


 

 

'쿡은 오랫동안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지구 남쪽의 커다란 대륙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경력으로 수 백년 전부터 내려온 의문점을 풀어주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글쓰기에서 금기하다 시피 하는 긴 문장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커다란' 대륙이라니.... 눈을 의심할 만한 문장이다. 대륙이라는 말이 이미 '광대한 면적'이라는 의미가 포함이 되어있는데 커다란 대륙이라니..... 전설의 레전드같은 우스갯 소리의 문장이 실제 정식 출판물에 쓰일 줄이야...

순간 책의 장르가 코믹 역사였던가? 싶었다. 역자도 역자지만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문장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까.

 

'쿡은 오랫동안 '남쪽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대륙이 실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경력으로' 수 백년에 걸친 의문을 풀어줄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 라고 한다면 더 깔끔하지 않을까?

 

마지막 문장의 첫 번째도 그렇다. '이번에도 쿡은 배 두 척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항해 내내 같이 움직였다.' 라니....

 

'이번에는' '이번에도' 가 한 문장에 같이 쓰여있다. 어둠의 다크 같은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도 쿡은 두 척의 배와 함께 길을 떠나서 항해 내내 함께 했다.' 라고 쓰면 될 것을 참 길고 복잡하게도 써놨다.

 

뭐 실수라고 치자.

허나 이 두 부분만 그랬다면 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이런 어색한 문장이 나올 정도다. 속독으로 읽어도 거슬릴 정도였는데, 정독해서 그걸 다 따지기 시작했다면 아마 백페이지도 넘게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어의 배치도 앞에 나와야할 단어가 뒤에 있는 느낌이 드는 문장 투성이었다. 뭐 문학 작품이 아니니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다면 그 쯤이야 할텐데... 문제가 있다... 이 책을 읽는데 상당히 곤욕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다시는 이 역자의 번역을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의 번역은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역자께서 마감에 쫓겨 구글과 파파고의 도움을 받으신것인지? 몇 개월 만에 원고를 마감해야 해서 후다닥 해치우시느라 이랬는지...

뭐 난 알 방도가 없다. 국어 실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왜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냐면 ... 그만큼 내용이 좋았기 때문에 번역에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문장에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블로그에 쓴 백여개의 서평중에 문장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한 책은 처음이다. 이것도 나의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행동이다.

책 읽다가 발견한 왠만한 오탈자마저 그냥 넘어가는 편이다. 그런게 있더라도 문장의 의미 전달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글을 못쓰며 어색한 문장이 있을 수 있다. 아니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아닌 독자이다. 그저 독자의 눈으로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포츠를 볼 때 응원도 하지만 비판도 있을 수 있는데 거기다 대고 '그럼 니가 해보던가'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가 더 잘하지 못하면 입을 다물어라' 라는 이야기인데 이건 굉장히 위험하고도 무서운 발언이다. 게다가 이 논리를 따르자면 그 사람은 발언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사고방식의 단순함으로 그 누구보다 못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생 벙어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 그런 논리대로라면 영화 감독이나 제작자만이 영화를 비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영화를 보고 비평이든 비판이든 한 번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세포 소녀나 긴급조치 제 1호 같은 영화를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모두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말같은 말인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낫다고 누군가가 평가한 사람에게는 입을 다물라는 것은 노예근성이나 다름 없다.

누군가는 나보다 돈이 많을 것이고 나이가 많을 수도 있고 스펙이 높을 수도 있다. 어느 한 부분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나은 면이 있을 것이란 얘기다. 사람에 대해 단순히 누구보다 낫고 못하다 라는 표현을 하는 자체가 그런 점을 고려하지 못한 단순함이라 볼 수 있다.

독재국가라면 또 모를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논리가 '불가능' 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에 그런게 가능해서 어떠한 '보편적 기준'같은 것에 맞추어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독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도 역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아무 감정도 없다. 그저 번역에 대해서 느낀점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지도는 땅 자체가 아니다' 라는 유명한 말처럼 번역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다.

 

좋은 주제와 취지를 가진 책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여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를 통해 책을 제공받은 뒤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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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판을 위한 36계 병법 - 생각을 꿰뚫어 승자가 되는 방법
임유진 지음 / 미래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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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유일하게 읽은 책이 삼국지였다.

책을 전혀 읽지 않던 내가 삼국지를 읽은 이유는 띄엄띄엄 본 TV의 만화 삼국지 영향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되새김질을 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본 삼국지가 조풍연의 12권짜리 소년 삼국지였는데, 후에 알고보니 일본 작가 '요시가와 에이지' 의 삼국지를 베낀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이문열이 삼국지를 출간하기 전이었는데, 이문열도 요시가와 에이지를 벤치마킹해서 평역 삼국지를 출간했다고 밝힌것처럼, 각색을 가미한 삼국지였다. 그 이후에도 여러가지 삼국지를 읽었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읽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다.

 

후에 삼국지의 영향으로 열국지와 초한지, 수호지 등의 중국 연의 등도 읽게 되었다. 중국은 싫어하지만 중국 고전은 참 좋아했다. 그러다 소설로 된 것이지만 손자 병법도 읽었다. 열국지에 있는 내용과 많이 겹치는 스토리 위주였는데, 전략과 전술 위주로 된 병법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책은?

 

오랫만에 읽은 중국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36계>라는 병법서를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누구나 36계 출행랑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텐데, 병법서로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중국 고전 7가지 병서 중에서 오자 손자 육도 삼략 사마법 이위공문대 율요자 등을 7대 병법서라고 하는데 거기서 빼어난 항목을 골라서 수록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처럼 한 모사가 직접 쓴게 아니고 후대 사람이 편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다 현대의 전술이라 할 수 있는 사례들, 반도체 기업이나 마이크로 소프트, 애플의 일화들도 실었다. 36개의 계책에 각각 5~8개 정도의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100개가 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삼국지를 10권짜리로 읽었든 만화로 읽었든 단권으로 읽거나 게임만 해봤던 간에 조조나 제갈량 방통 등의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을텐데삼국자의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삼국지의 후한 이전 항우와 유방의 항쟁, 더 이전의 춘추전국시대 고사부터 현대까지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폭 넓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다.

 

 


 

 

중국고전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미인계, 고육계 반간계 등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익숙한 사자성어가 많이 나오는데, 삼국지와 열국지에 수록된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이미 아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의미를 전술의 관점에서 읽었기 때문에 새롭게 보일수도 있다.

 

다만 관점에 따라서 다른 해석이 될 여지가 있어 보이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건 뭐 시험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답이 여러개일 수가 있다. 해석을 무슨 답처럼 여기는 것보다는 다른 방향의 의견도 생각해보고 의문 제기도 해보는 것이 독자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독서일 것이다.

 

해석은 원래 여러가지로 하는 것이 맞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 어떤 의도대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청자가 그것을 다르게 해석했다고 하면 청자가 틀린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독자의 권리이고 재생산이 된다. 그래서 문학이나 영화에서 작자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결말이나 장치를 집어넣기도 하는 것이다.

 

고사를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었다

고사에 자세한 해설과 해석등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자성어가 나온다고 골치아파 할 것 없다. 알고보면 별것도 아니다.

'상인' 이라는 말은 주나라에게 망한 상나라 사람들이 떠돌아 다니면서 장사를 하곤 했기 때문에 상나라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인이다. '기우' 라는 고사도 기나라에 살던 사람이 '만일 하늘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라는 걱정에 잠을 못이루고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쓸데 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낄끼빠빠라는 은어가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라는 뜻인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다. 아직까지도 한자는 어렵고 지식이 높은 사람들이 익히는 문자로 인식이 되고 있는데, 현대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배울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글자 자체를 배우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낭비가 될 수도 있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세종 창제 후 500여년 간 천대를 받아왔던데 비해 한자는 어렵고 식자층들에게만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글자 자체를 복잡하고 어렵게 익히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최신 연구 지식을 익히는데 거의 도움이 안된다. 국제어인 영어를 잘 하는 것이 훨씬 나을텐데 영어와 한자를 둘 다 쉡게 잘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이야 말로 훌륭한 언어인 것이다.


중국 고전 활용법?

 

중국 고전이 세계 1,2차 대전 장군들이나 각국의 지도자들, 현대 기업 CEO들까지 감명깊게 읽고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어디선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삼국지를 3번이상 읽은 사람하고는 이야기도 하지말라' 는 말도 유명하다. 그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문열 삼국지의 인기 기폭제가 된 서울대 수석입학생의 논술에 도움 되었다는(광고성이 짙은 것으로 의심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읽고 나면 똑똑해진다는 이야기로 들리고, 그저 권모술수를 이용한 속고 속이는 계책을 배워 교활한 사람이 될테니 상대하지 말라, 3번이상 읽지 말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3번 이상 읽은 당사자가 나인데,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은 잘 모르겠다. 똑똑해 지는 것은 더욱 모르겠지만서도 잔머리 굴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저 재미로 읽은 것이기 때문에 어릴 때 읽을 때는 싸움 잘하는 장수들과 신비하고 영웅적인 이야기들에 취해 읽었고, 커서는 모사들의 전략과 전술에 집중해서 읽었고, 더 커서는 군주들의 인간관계와 정치에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삼국지 등의 중국 고전이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명확히 말할 수가 없었는데, 이 책에서는 현대의 이야기를 가미해서 이야기 하기 때문에 고전을 어떻게 활용하고 해석을 하고 현대에 적용하고 응용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고전은 원전 그대로에 충실한 책을 좋아하고 저자의 주관적 생각이 많이 들어간 고전은 별로 좋아하질 않았다.

그렇게 된 계기가 이문열의 삼국지 때문인데, 삼국지를 읽고 평전을 따로 읽어보면 다 있는 이야기나 그저 하나의 관점으로 여기면 될 것들을 소설의 중간 중간에 자꾸 삽입을 하니 역자가 간섭하는 느낌이 들고, 흐름이 끊어지는 기분이 들어 읽기가 거북했다.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지 정사를 읽는게 아닌데 자꾸 비교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 지식이야 평전을 읽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거나와 삼국지 연의는 그야말로 연의지 정사가 아니다. 역사를 알고 싶으면 정사 삼국지를 읽던지, 원래 역사적 사실과 비교를 하고 싶으면 평전을 읽는게 낫다. 그래서 누가 삼국지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이문열은 읽지 말라고 한다. 김구용이나 황석영을 추천하고 있다. 평역 삼국지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덩달아 연의가 아닌 책들도 원전 그대로를 중요하게 생각해버린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일단 소설이 아니고, 36계 자체가 연의가 아닌 여러 병법서들을 엮은 것이며 각 계책에 들어맞거나 비슷한 에피소드들을 삽입한 것이기에 해석과 재미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재미도 있고 배울 점들도 많은 방식인것 같다.

고전을 원전 그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주석이 없다면 한자를 해석할 한자 실력이 없기도 하거니와 앞으로 공부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한자보다는 영어공부가 개인적으로 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의 서적이 나에게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중국을 매우 싫어하지만 중국 고대 시대의 지혜는 인정을 할 수 밖에 없고, 지금의 중국과 중국인들과는 관계가 없기도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종종 중국 고전은 읽게될 것 같다. 오랫만에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를 통해 책을 제공받은 뒤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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