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박완서님이요" 라고 대답하겠다.
사춘기때 오빠의 책장에서 발견한 '나목'을 읽고부터 이분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표현..피가 마른 상처의 딱정이를 다시 뜯어서 피를 확인하고 마는 가학성이랄까?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때 아름답고 이쁜 글보다는 박완서님의 글들이 좋았던 나..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염세적이고 우울하던 소녀였던 나에겐 이분의 글들이
'사는건 다 힘들고 어려워..그래도 열심히 살아가야겠지?'
'착한 사람만 있는게 아니야. 그렇다고 처음부터 나쁜 사람도 없어.
다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가는거야' 라는 의미로 읽혔던것 같다.
주변의 사람들이 다 비루하고 이기적으로 보이고..사는게 재미없고 지루하게 여겨지던 내겐
'휘청거리는 오후'의 비극적인 결말도 가슴 아프기 보다는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내옆에 있는 사람들중에 하나일라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도 집안으로 들어가면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 갈거라는...
'나목'부터 시작되는 육이오전쟁에 대한 소설들중에는 작가의 실제 가족사라고 느껴지는 소설들이
나오다가 마지막엔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의 연작들로
전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을 마무리하게 된다.
치열하게 느껴질 정도로 되풀이 되던 전쟁에 대한 기억은 다른 남성 작가들의 대하소설과는 다르다.
이책에 나오는 '그 가을의 사흘동안'과 '엄마의 말뚝2'에서 나오는 배경인 전쟁..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더 깊게 들어가서는 여자들의 삶이란게...남자작가의 시선에서 여자를 묘사한것과는 다르다.
'조그만 체험기'는 전기용품상을 하는 장사꾼인 남편이 사기죄로 검창지청에 끌려갔다가 무죄로 풀려나오는 동안의 이야기다.
무죄라는걸 알면서 건수 맞추려고 남편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고..돈을 요구하는 권주임,
면회가는데 주민등록증 아래 오백원을 넣어야 들여 보내주는 K지청의 수위,
옥바라지하면서 만나게 된 돈없고 빽없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특별면회나 불기소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변호사 선임 취소후에 재판해서 십오일후에 남편은 자유의 몸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그런일이 있은 후로는 하고많은 자유가 아무리 번쩍거려도 우선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가유부터 골라잡고 볼 것 같다.
억울한 느낌은 고통스럽고 고약한 깐으론 거기 동반한 비명이 너무 없다. 그게 워낙 허약하고 참을성 많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일게다.
..중략...
각종 공해 가스가 충만한 공기 중에 그까짓 무해무익한 원한쯤 떠있기로서니 어떨까도 싶지만,글쎄 원한이 인체에 정말 무해무익할까. 화학적 공해처럼 그것도 일정량이 넘으면 공해의 구실을 할지 누가 아나. 육신을 해치는 공해가 아니라 심정을 해치는 공해로서 말이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법없이 살만한 사람이란 남편이 옥살이를 하면서 알게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정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의 아버지 허성의 직업이 전구공장사장이란 것이 재미있다.
'해산바가지'는 아들선호사상과 치매걸린 시어머니가 나오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은 민주화운동때문에 대학생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시대배경에 따른 사회상이 읽혀진다.
책 마지막에 나오는 해설을 보면 '박완서는 분단의 상처,한국 사회의 물신주의와 중산층의 속물성,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결합으로 파생된 여성문제 등 후발자본주의국가의 여러 문제들을 다각도로 형상화해왔습니다' 라고 김양선님이 말한다. 이 한문장으로 박완서님의 소설에 대해 정리가 되는면도 있겠지만...그분 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읽기에 너무나 재미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주제도 술술 읽히게 만드는 그분만의 구수한 글솜씨는 어떤 찬사로도 표현하기 힘들것이다.
'20세기 한국소설' 로 창비에서 나온 50권은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을 보여준다는 말대로 쟁쟁한 작가분들의 책들로 채워져있다. 그중에 박완서님의 책을 받아드니 팬의 입장에서 가슴이 뭉클하다.
요즘 대입에 논술이 중요하다고 하다보니 이런 책 시리즈는 주대상이 논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박완서님의 장편을 읽어보기를 권하지만 단편집이라도 그분의 글맛을 맛보기에 아쉽지않은 책이니 적극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