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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1 ㅣ 세계문학의 숲 17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2년 3월
평점 :
창백한 불빛 아래 점원의 표정은 묘한 활기를 머금어 화사한 블라우스의 빛깔과 어우러졌다. 때로 그들은 손에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케이스 너머 가죽으로 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혹은 '이것 말고 다른 무엇'을 원하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약간 어둑한 문으로 가로막힌 매장 뒤의 작은 창고에서 요구사항에 최대한 비슷한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손에 지갑을 들고 있으면 나는 종종 내 지갑이 그 공간에서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되듯 제 생명을 새로이 얻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공간은 에밀 졸라가 130여 년 전에 이미 그려낸 곳, 백화점이다.
그곳, 백화점은 프랑스 파리 봉 마르셰 백화점(1852년)이 시작이었다. 루브르(1855년), 사마리텐(1869년), 갤러리 라파예트(1893년) 등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는 왕정복고 후반부터 생겨난 마가쟁 드 누보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의 부티크에는 가격표시가 없었고 상인과의 흥정은 필수였다. 소품종을 취급하며 고객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갔다. 그러던 차 생겨난 마가쟁 드 누보테에서는 현대의 백화점의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난다. 널찍한 상점, 현금 거래, 물건에 붙여진 가격표, 다양한 제품. 클리어런스 세일.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를 응시한다. 고객의 돈. 돈을 내는 자에게 천국이 있고 바라보는 자에게 욕망이 있다. 물건을 사는 것은 환상을 구하는 일이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에밀 졸라가 시도한 것은 물론 루공 마카르 총서의 한 핏줄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중심인물은 이 호사스런 백화점의 주인 무레도, 그가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오.'라고 마음을 바치게 되는 드니즈도 아니다. 이 소설의 거대한 움직임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덮은 '무언가를 사고 싶은 욕구', '여자들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지금도 길을 나서면 볼 수 있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쇼핑객과 판매원의 모습은 욕망하는 자와 환상을 창출하는 자를 닮았다. 그 뒤에는 파리의 거대한 백화점과 그와 대조되는 모습의 상점이 있다. 매장의 재고를 정리하며 눈이 침침하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참고 견디는 직원과 목이 말라 음료를 마시며 돈을 쓰는 의문의 여인이 있다. 에밀 졸라가 다룬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당시 봉 마르셰, 루브르, 생조제프 백화점의 매장 책임자, 판매원, 건축가, 변호사 등을 취재 끝에 그 윤곽을 드러냈다. 안팎의 모습, 백화점 안에서의 하루. 계절과 상인들과의 거래가 백화점의 매출과 판매원의 생사까지 쥐락펴락하게 되는 과정, 판매원들의 경쟁과 동맹관계를 통해 쇼핑객의 동선이 드러내는 것은 백화점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당시 새로운 삶의 어떤 방식이었다.
잠시 에밀 졸라의 전체 작품 속 이 소설의 위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에밀 졸라는 총 스무 권짜리 총서, 루공-마카르 총서를 기획했다. 20대 후반부터 구상한 이 총서는 유전의 법칙이 세대와 시간을 거쳐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면서 사회 안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다룬 작품이다. 전혀 다른 존재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서로 연결된 유기체와도 같은 유전의 법칙이 드러난다. 그가 관심을 둔 환경과 유전의 법칙, 결정론적 관점, 유전의 각기 다른 환경에서의 발현을 보여주는 이 총서는 당시 제 2 제정시대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의성이 짙은 작품들이기도 하다.
목로주점에 가면 변두리 노동자가 있다. 제르미날에는 셔츠를 풀어헤치고 자신을 쏘라고 외치는 탄광촌의 광부가 있다. 에밀 졸라의 소설에는 무엇보다도 시대를 호흡하는 사람이 들어있다. 그러던 그가 유일하게 낙천성을 가미해 꾸려낸 소설이 바로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고단한 판매원과 부유한 백화점 소유주의 감정은 이제는 낡고 구태의연한 것이 되었을지언정 정작 이 소설의 중심부에 있지 않다. 소설의 중심부는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며 분량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소설의 중심부는 오히려 다양해서 그 모습을 제각각 다르게 선보이는 인간 군상이 차지하고 있다. 어느 순간 등장한 자본가, 매장의 감시 직원, 상품을 어루만지며 거의 에로티시즘을 느끼는 여인. 이들을 엮는 일련의 감정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닌 여자와 욕망의 관계이다. 화려함의 격류, 두려운 속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발디딜 틈 없는 백화점.
더이상의 염세주의는 없다. 삶이 어리석고 우울한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말자. 그 반대로,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강력하고도 즐거운 것을 탄생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하자. 한마디로, 행동과 정복 그리고 노력의 시대와 함께하면서 이 시대를 표현하도록 하자. 그런 다음, 그 결과로써 행위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을 보여주도록 하자. -에밀 졸라
에밀 졸라가 그리고자 한 것은 새로운 힘이었다. 그 중심에 백화점의 소유주, 최고 경영자, 옥타브 무레가 있다. 루공-마카르 총서 중 루공 가의 운명, 플라상의 정복에 등장하는 마르트 루공. 그리고 같은 책에 등장하는 프랑수아 무레. 이 둘의 아들인 옥타브 무레의 이름은 이 작품 말고도 앞서 언급한 두 작품과 무레 신부의 과오, 살림, 삶의 기쁨, 작품, 파스칼 박사 등에도 등장한다. 총서의 열번째 작품 '살림'에서는 옥타브 무레의 이전 삶이 펼쳐지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는 그 이후의 옥타브 무레가 나타난다. 그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인물이다. 변화에 강하며 자신이 누릴 즐거움을 당연한 것으로 취하며, 인간의 권력과 야심을 드러내되 현명한 여인 드니즈의 충고를 받아들여 번영을 이끌어낼 줄 아는 인물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욕심을 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는 이러한 인물로 그려진다.
옥타브 무레가 이끄는 백화점과 그 안에서 일하는 드니즈의 삶은 생명체처럼 함께 호흡한다. 에밀 졸라는 에로티시즘을 제거한 이 두 남녀의 관계와 백화점의 공기를 통해 그가 만든 이상형의 인간을 선보인다. 흠 없는 남자와 이상적인 여인이다. 큰 키, 하얀 피부, 부드러운 눈빛, 압도적인 야심,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 차분하고 조용조용하지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여자, 한 번 바라보기만 하면 다시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매력, 바라는 것이 소박하고 이성적이며 자애로운 면모, 이것이 옥타브 무레와 드니즈 보뒤의 모습이다. 이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것은 기쁨을 누리려는 의지, 척박한 삶이라도 그것을 일구어나가려는 애착,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밝음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에서 삭제된 듯한 에로티시즘은 오히려 다른 모든 이들에게서 증폭되어, 백화점 곳곳을 물신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로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에밀 졸라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물신주의, 황금 만능주의 그 자체가 아닌 그것 때문에 뻥 뚫린 듯한 도넛의 구멍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백색 대전시회가 성황을 이룬다. 실제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는 연간 최대 비수기 2월에 백색 직물로 제작된 상품, 즉, 시트, 식탁보, 린넨, 속옷, 셔츠 등을 대대적으로 광고하여 판매했다. 무레는 그 속에서 대주교를 초청할 꿈을 꾼다. 이 역시 실제 프렝탕 백화점 개장일에 마들렌 성당의 신부가 그곳을 축복하는 의식을 거행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다. 종교와 세속은 이렇게 이상한 발걸음을 함께 했다. 백색 대전시회의 백색의 물결과 제비꽃, 응접실의 여성과 백화점의 여성, 감추어진 듯 드러나고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불타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백색으로 에밀 졸라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한 편의 욕망의 시의성, 물신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기슭에 선 인간군상의 다양함으로 직조된 세속화였다. 지극히 세속적인 로맨스, 백화점을 무대로 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 그 속에서 오가는 불타오르는 형형색색의 욕망, 고단한 노동과 돈으로 이루어진 소비 활동, 욕망을 욕심내고 환상을 사들이고 팔고 싶은 것을 팔지만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면서 돈을 쓰는 쇼핑객.
삶은 계속 움직이고 그 속에는 때로는 강력하고 즐거운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에밀 졸라가 행동, 정복, 노력으로 바라본 '새로운 시대'는 이제 다른 세기를 맞아 더욱 현란해 졌다. 결과로 존재하는 행위의 즐거움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덩치를 키워 에밀 졸라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 되어 인간의 삶을 지배할까 두렵다. 화폐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백색의 실크를 매만지고 새로운 시대의 발걸음을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에밀 졸라가 자연주의 작가로서 지켜온 원칙에 관하여 굳이 반칙해가며까지 그려낸 무레와 드니즈였다. 이제 그 속에 잠식당할 듯 백화점의 에로티시즘에 압사당하기 직전인 '지금의 새로운 존재'를 꿈꾸어야 할 때다. 혹은 이 거대한 공간에서 종잇장이 되더라도 그곳에 압사당하지 않고 군집 명사로 존재하는 이들을 종종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숙제가 아닌 독자의 삶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