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김기혁.호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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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들과 만나 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를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그게 우리 정체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김애란의 단편소설 '침묵의 미래'에는 소수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이 박물관을 지킨다. 마지막 화자가 숨을 거두면 그 언어는 빠르게 사라진다. 그 먹먹함을 파고드는 것은 대체재 없는 침묵이다. 말하는 없으면 소멸하여 자신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사라져 뚜렷한 형체도 없지만 그 스스로 말하는 존재, 소멸하는 언어. 말 속에 자신을 새기고 떠나고 빈자리로 몸을 움직인다. 중세 국어의 순경음 비읍의 흔적이 부산 경남 지역 사투리에서 흔적을 드러내고 제주어는 이제 관광지의 언어로 남았다. 전 세계 약 육천여 개 언어 가운데 많은 언어가 빠른 속도로 침묵에 빠져든다. 말하는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다. 쓰는 이가 있고 읽는 이가 있다. 침묵은 곳곳에 스며든다. 생각은 빠르게 잠식한다

 

 

 

 

 역사상 언어와 그 언어가 몸담았던 작은 사회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 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사라져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도, 아직 버티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감사해 한 적도, 이를 기록화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적도 없었다.-본문 발췌

 

 

 

 

 니콜라스 에반스는 field linguist, 현장 언어학자이다. 연구실과 강의실을 벗어나 현장에서 기록되지 않은 언어를 연구하고 소수민족, 방언을 쓰는 사람들, 고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현장 답사를 하며 채집, 기록, 연구, 보존까지 하는데 그가 그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에서 자취를 알리는 것은 에보리진과 파푸아뉴기니의 언어까지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사라져가는 언어라는 점. 이 책의 원제는 dying words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 절벽 같은 낙차를 니콜라스 에반스는 두려워한다. 모든 언어는 생각의 틀, 공유하는 인지구조를 체계화하고 소통한다. 그가 밝혔듯 어떤 언어든 언어가 전달하는 핵심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는가'인데 이는 결국 구성원 제각각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공공의 재원으로 쓰이는 것이다. 의미이자 존재 자체,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발화되고 쓰이는 순간 생명을 갖는 무엇이다. 매개체이자 형식, 개인재이자 공공재이다. 사회 없는 언어도, 언어 없는 사회도 없다. 배우고 소통하고 가르치고 충돌하고 고친 다음 다른 무엇으로 바뀐다.

 

 

 언어는 또한 역사 안에서 사회의 발전 혹은 쇠락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사회에는 종교, 역사, 사상이 핏줄처럼 흐른다. 일례로 다른 세계의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와 종교 전파를 위해서였다. 이방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최초의 체계적 시도는 선한 것만 기록하고 사악한 것은 기록하지 말라는 교회의 지침을 따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에 의한 것이었다. 수도학교 원장이었던 사아군이 수행한 업무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에 관한 관심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 목적은 물론 선교였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 이익에 다름없으며 일부는 누락하고 일부는 기록하는 이중 잣대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는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의 연구를 살펴보면 당시 사아군은 현재의 필드조사의 최초 수행자임을 알 수 있다. 즉 여러 곳을 여행하고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조사하고 풍속을 그림이나 글로 남겼으며 그에 관한 설명을 남겼다. 그와 같은 국적의 스페인 사람이 아닌 현지 멕시코 부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업은 종교 재판에서 유죄판정, 즉 사탄숭배로 간주되어 끝나고 만다. 사회는 이렇게 때로는 언어의 틀을 규정하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 기록마저 사람의 인지 체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만져진다.

 

 

 니콜라스 에반스의 관심은 언어의 기록에도 닿는다. 그의 눈을 통해 본 가독과 기록은 뜻을 함께하지는 않더라도 맥을 함께 할 수는 있다. 책의 탄생은 다음으로 생각한다 하여도, 책이 이렇게 범용화된 것은 오래지 않다. 디지털 장비는 말하지 않아도 더하다. 물론 고가의 무거운 녹음 장비를 이끌고 밀림으로 언어 채집을 하려 들어가는 수고 대신 칩셋을 꽂은 녹음기로 그를 대신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동시에 그는 기술이 발전함과 더불어 이미 기록한 죽은 언어를 담은 기기 자체의 사용 불가를 우려한다. 이것은 매체의 특성과 함께 오는 기록에의 양면성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라짐 뿐만이 아니다. 그는 모든 식음, 그 열기가 저절로 사그라져 재가 되는 과정을 걱정한다. 그 걱정은 기록과 전파로 변이한다. 조사 당시 호주 원주민 공동체의 원로가 사망하는 때도 여러 번. 그는 장례식을 여러번 참관할 때마다 하나의 사회가 죽어감을 본다. 그것이 비단 그 사회의 죽음만은 아니다. 무시당하여온 이름없는 언어가 속한 모든 문화의 소멸이다. 한 사회의 인구는 사회 집단이 가지는 질문의 척도까지도 가늠한다. 니콜라스 에반스는 매일 발화되는 언어가 어떻게 모든 것, 어떤 사회 집단 구성원들의 속도, 시간, 활동, 행위의 의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자문한다. 개별 언어는 다른 언어에 스며들 준비를 스스로 한다는 간단한 답이 나온다. 언어는 동일한 개념의 각기 다르게 존재하는 명칭만을 이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더 넓은 문화권의 다른 단위 개념을 포용할 태세를 늘 갖추고 있다. 현상과 사물, 방향과 지시는 한 언어에서 다른 것으로 번역하는 순간 다른 단어로 종종 변모한다.

 

 

 

 이러한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소수 언어의 종말은 곧 다양성의 종말이다.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지만 서사라는 장르 내에서의 언어의 다양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를테면 시는 언어를 압축하여 밀도를 높여준다. 인간이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노래를, 소설을, 발화를 가능케 한다. 일찍이 꿈꾸어보지 못했던 자유로운 형태 내에서의 창조를 꿈꾸게 한다. 곧 다양한 언어가 세상에 있을수록 다양한 생각이 가능하다

 

 

 

 생각의 발현은 언어로 하여금 그 가능성을 지닌다. 그 가능성의 소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하여 암울한 침묵의 미래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지막 챕터는 현장언어학자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견해다. 마지막 챕터, '들을 수 있을 때 들어라'에서는 사라지는 언어를 채집하는 현장에서 느낀 두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지막 화자가 죽음으로 사라질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화석처럼 변화고 서사는 잊히고 우리가 몰랐을 비밀은 영원히 입을 다물어 새로움은 더욱 요원해지고 기록은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언어의 죽음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문제에 기반을 둔다. 지속되는 사멸은 다양화의 상실을 뜻한다. 그 언어가 발화되던 사회가 가진 역사, 서사, 마음, 고유성이 침묵과 어둠에 묻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라짐으로 드러내고 드러남으로 잊힌다. 잊히는는 것은 슬프지 않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슬픈 법이다.

 

 

 

 개별의 요소는 큰 장치에 편입되고 시와 서사는 멜로디를 잃은 음악처럼 헛돈다. 니콜라스 에반스가 일반인도 읽기 쉬운 그의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얼음장 같은 미래다. 이러한 아카데믹한 용례와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읽고 쓰고 말하는 고유의 언어를 기쁘게 지켜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타자의 언어를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글만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언어를 돌아보고 타인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모든 언어가 말하는 것은 그 각각의 개성이며 다양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말과 글은 그 자신만의 생명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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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김애란 소설이,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했었는데, 이 책과 쟌님의 글이 딱 어우러지니까 당장 이 책 사러나가야 되겠어요. 안읽은지 한오백년(노래부름) 된 이상문학상 수상집도요! 이제는 수상집이 나오면, 이건 또 당선작 상금이 얼마야, 뭐 이런것부터 찾아봅니다..^^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기 전에는 하나의 언어였다고 하잖아요. 언어가 같다면 지금처럼 싸울일도 없었을까요, 아니면 아랍권, 라틴권, 영미권 뭐 이런 문화권 자체가 존재할일이 없었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말과 글도 그렇고, 쟌님의 글들도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좋은 오후!

Jeanne_Hebuterne 2013-04-29 09:05   좋아요 1 | URL
아무렴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겠습니까(각종 문학상 상금, 부럽습니다.)

저는 이러한 책이 낯설어서 아주 느리게 느리게 읽었지만, 언어학자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친근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하려 한 듯합니다. 지금도 니콜라스 에반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계속해오기도 한다는 소식을 떠올려본다면 이 학자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지금 다양성이 사라져가고 여러 언어가 사멸해가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겠지요. 경각심과 지식은 이럴 때 보면 비례해요.

김애란의 소설은 때로는 소설 쓰기의 얌전한 모범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어요. 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을 살짝 떠올려보면, 자신의 탄생에 관한 관심과 자전적 성향을 역사와 적당히 섞는 재주를 점점 다듬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요. 아이리시스 님은 김애란의 이상 문학상 수상작과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 무척 궁금합니다. 같은 작품을 읽을 때에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이 문학 아니겠어요? 그런 점이 또 무척 재미있어서 서재의 글을 읽기도 하고요.

언어가 같았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은 언어의 다름과 더불어 어른이 되면 점차 완고해져서 자신이 옳다는 가정을 지나치게 굳건하게 다져서 그 과정에서 싸우는 것이 아닐까요? 동시에 종종 영어 안에서도 영국식과 미국식('butt'이 영국에서는 담배꽁초, 미국에서는 엉덩이라고 하지요?)영어가 충돌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충돌에는 언어의 틀도 어느 정도 관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쓰는 사람의 손을 떠는 글은 독자적으로 생명을 가진다는데 모쪼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형상을 다듬어 나갔음 하는 바람으로 서재 생활을 하는데, 칭찬(맞지요?) 고맙습니다.

자, 이제 저는 이 시각 즈음 되면 이렇게 말해야겠지요?

좋은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