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가장 착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삶이 주는 일반적인 해답 이외에는. 그 해답이란 이렇다. 사람은 그날그날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꿈을 꾸어 잊는다는 것은 적어도 밤이 되기 전까지는 바랄 수 없다. 이제 목이 긴 병의 여인들이 부르던 그 노래가 있는 곳으로는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에서의 꿈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안나 카레니나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아우르는 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 그 하나하나가 갖는 밀도가 아우러져 이루는 전체를 조망하려는 욕심을 비춥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개개인이 갖는 감정과 상황, 각자의 개별성을 찬찬히 다루는 데 더 집중하곤 합니다. 후자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전자는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단편에서조차 비교, 대조를 통해 전체를 아우르곤 하지요. 그것은 집의 안팎을 한번에 쓱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가 관심을 두는 어떤 주제에 관한 응축물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때 전체와 총합은 다릅니다. 어떠한 요소가 한데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는 한데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결과가 전체라면,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전체란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와 소설은 그 걸음을 늘 함께 해온 것은 아닙니다. 드물게 영화 이후 소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노희경 작가, 김형경 작가가 그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소설이 먼저, 그다음이 영화입니다. 이때의 주제와 변주는 종종 창의적인 결과를 만드는데,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 전형이나 모범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재미있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는 작년 겨울 개봉 레 미제라블, 봄 개봉작인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하지요. 물론 웜 바디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굵직한 작품, 그중에서도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각색을 시도했습니다

 

 

 

 각색에 참여한 인물을 살펴볼까요. 키라 나이틀리, 아론 테일러 존슨, 주드 로. 장소는 런던 근교 셰퍼튼 스튜디오이며 의상은 재클린 듀란입니다. 영국 감독과 영국 배우들이 영국에서 발렌시아가와 샤넬, 디올 풍의 의상을 입고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의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키라 나이틀리가 그 이름을 올렸는데 어떤 점에서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전과는 다릅니다. 먼저 그레타 가르보가 있습니다. 1935년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스타덤의 그레타 가르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이었는지 영화 속 의상은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 가르보의 안나 카레니나는 종종 미국 켄터키주의 여자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종종 1967년의 러시아판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레빈의 역할이 무척 사소했을지언정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합니다. 이는 감독이 레빈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인데, 소설에서는 레빈이 더 비중이 높지만, 영화의 기본 캐릭터는 안나라는 점을 볼 때 감독으로써는 이례적인 선택이 분명합니다. 1948년에는 비비안 리가 가냘프고 우아한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쾌활한 남부 아가씨와는 달리 신경쇠약 직전의 안나였어요.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가 나오기 직전에는 1997년 소피 마르소의 안나가 있습니다. 실제 러시아인들이 상상하는 안나 카레니나와 너무 다른데다 국적도 러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평단의 호평은 얻어내지 못했다는데 국적 보다는 페르소나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Ivan Nikolaevich Kramskoi, , 1883, Oil on canvase

;러시아인의 안나 카레니나 이미지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상류층에 맞설 힘이 없는 개인이 우연한 사건을 만나 파국에 이르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다른 이들에 비해 주인공의 개성이 특출하기는 하나, 환경에 비해 크게 우위를 점하지는 않습니다. 안나의 경우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해지지 못하고 파국을 피하려 하지만 파국에 부딪힙니다. 그녀는 일반 독자, 혹은 관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녀는 브론스키를 원합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꿈꾸듯 구하게 되지요. 그런 다음 브론스키를 얻습니다. 결국은 브론스키를 잃는 과정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 파장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직함이 죄가 되는 과정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도 보여주지요. 영화의 관심 역시 '브론스키와 춤을 춘 그날과 안나가 기차에 뛰어들던 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는 과정입니다

 

 

 

 이 평이한 토대의 서사가 이렇게도 자주 영화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틈이 많기 때문입니다. 독자로서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음이 어떤지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뿐, '어떻게' 그리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안나도, 레빈도 아닌 19세기 러시아 상류층 사회입니다. 비중이 조금 큰 인물은 레빈, 그리고 키티 정도입니다. 안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안나가 죽은 다음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모든 것은 안나와는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레빈, 키티, 오블론스키,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이 모두를 사회라는 관점에서 조금씩 들여다보기에 안나 카레니나 한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도 효율적인 각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톨스토이는 안나를 처음에는 키티의 눈으로, 그 다음에는 브론스키의 눈으로, 그런 다음에는 카레닌의 눈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무대에 올라선 배우를 보듯이요. 소설에서 자살 직전 안나의 내면 독백은 아주 이례적인 일일 정도입니다. ,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는 만들기 쉽기 때문에 자주 가능한 일입니다

 




Keira Knightley in Joe Wright's Anna Karenina




 

 

 

 조 라이트는 이전의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와는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전의 두 작품도 각각 제인 오스틴, 이언 매튜언의 작품으로 소설을 각색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더 과감해지기로 한 듯 아예 무대를 연극 무대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과 취소를 몇 번이나 뒤집고 촬영 전에도 몇 번을 방문한 끝에 촬영을 석 달 앞두고 조 라이트는 런던 근교의 세퍼튼 스튜디오로 장소를 결정합니다. 프러덕션 디자이너 사라 그린우드와 세트 디자이너 케이티 스펜서는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도 조 라이트와 함께 일했으며 그들의 경력을 연극무대에서 시작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해 함께 일했기에 안나 카레니나의 무대 배경에 있어 균열이 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 그 이상으로 공동 작업에 기반을 둔 매체이니까요

 

 

 

 그리하여 탄생한 안나 카레니나의 배경은 정교하고 역동적인 세트, 연극 무대의 형식을 빌려 온 구성입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연극의 막이 오릅니다. 카메라는 무대 앞, , , , , 우를 훑습니다. 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문을 열고 러시아의 설원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조입니다. 러닝 타임이 마감 시간처럼 존재하는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이 무대 효과를 통해 시간을 절약했기에 키티와 레빈의 이야기를 할 여유가 있습니다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엔 될 수 있으면 낮은 기둥, 무너질 것 같은 대들보, 어두컴컴한 조명을 씁니다. 역광으로 인물을 비추다 광활한 초원 위에 선 레빈을 보여주는 식으로 마치 생쥐와 인간을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그러다 카레닌의 침실에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대리석, 높은 기둥, 그의 자기 과시적 품성, 딱딱함, 좁은 시야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 침실과 무대를 배경으로 안나는 검은 옷을, 붉은 옷을, 키티는 흰 옷과 파스텔톤의 크림색 옷을, 카레닌은 회색의 제목을 입고 오갑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각색이 허용되고 창의적으로 차용된 부분이 의상 부분일 겁니다. 코코 샤넬이 태어나기도 전인 시점에 안나 카레니나는 동백꽃 모티브의 코코 샤넬 주얼리를 하고 나옵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지방시, 발렌시아가, 샤넬풍입니다. 자신의 외도를 처음으로 인정하게 될 때에 그녀는 붉은색 드레스를, 다른 이들은 모두가 옅고 밝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와 처음 춤을 출 때엔 검은 드레스를 입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대사는 인물의 허울만 비출 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사보다는 종으로 횡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각자의 집,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의상, 대사보다 직접적인 움직임과 춤입니다

 

 


 



 

Yi-Lin Cheng for Focus Features

 


 

 매체의 특성을 잠시 생각해보자면, 소설의 독자, 영화의 관객은 무엇을 할까요. 행간을 읽고 단어를 파악하고 문단에 따라 호흡을 달리하는 이들이 독자입니다. 꾸며낸 이야기, 그럴싸한 무언가에 호기심을 느끼고 책장을 넘기는 이들이지요. 아무 곳에서 쓸 데가 없어서 오히려 독자는 자유롭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의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영화의 관객은 시퀀스를 따라갑니다. 카메라가 눈이 되어주고 음향은 귀가 됩니다. 의상이 색채를 덧입히고 빛이 이 모두를 아우르지요. 관객은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수의 시대'에서 롤랜드 아처가 수많은 중절모 무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될 때, 대부에서 마피아 보스가 어두컴컴한 실내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며 무언가를 지시할 때,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가 정신 나간 듯 정원을 헤매거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 마침내는 낯선 자신에게 침잠해 들어갈 때, 관객은 종이 위 활자가 마침내는 누군가의 의도를 투영한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을 목격합니다. 물론 문학과 영화, 이 두 장르를 상하로 파악해서는 안 되지요. 예술의 장르가 기능 올림픽의 종목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 이 두 장르가 종종 서로 대화를 나눌 때 그 묘한 접점과 발화를 바라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인간이 헤맬 수 있는 가장 넓은 평원을 보여줍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성공 혹은 실패를 맛보며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을 내딛다 농노제 폐지를 생각하는 레빈에게 그가 더 큰 비중을 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문학을 아마도 톨스토이는 선택했을 것입니다. 글은 모두 다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어떤 글을 읽는가에의 문제라고 본다면, 대문호와 그저 글을 쓰는 이의 차이는, 인간의 한계를 조망하고 생각의 깊이를 하나의 축으로 전개해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독자는 이 모든 글 사이에서 끝없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지요. 영화는, 그것이 이미 있는 소설을 기반으로 각색한 것이든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것이든 그 형식 본연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가 모든 안나 카레니나에 앞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조 라이트는 형식과 주제의 연관성을 깊이 생각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연극을 차용해 그 폭을 넓게 하고 요점은 카메라, 의상, 세트로 간결하게 전달합니다. 그리하여 멜로에 집중하면서도 당시 사회의 부조리함, 개인이 이런 사회와 부딪혔을 때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비극, 떨어질 때의 낙차에서 발생하는 허무함, 그럼에도 계속되는 타인의 삶을 보여줄 수 있지요. 작가가 문장을 고민하듯 감독은 형식을 고민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재미있는 실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과 영화의 대화를 통해 독자와 관객은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겠지요. 사회를 생각하고 개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계단의 아래를 돌아보는 일, 그런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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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4-2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고 싶었는데 저희 집 근처 극장에서 너무 어이없게 빨리 막을 내려버리더라고요. 시간 텀도 너무 어중간했고요. 참, 아쉬웠는데 쟌느님 덕택에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톨스토이는 정말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대단한 것 같아요. 조금 더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2 11:25   좋아요 0 | URL
이럴 땐 멀티플렉스가 참 야속하지요. 옛날에는 한 달까지도 영화 상영을 지속할지를 두고 봤는데, 요즘은 개봉일에서 사나흘이면 상영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하더군요. 상영한다 하여도 조금이라도 인기가 없으면 상영시간대가 영화를 보기 어려운 시간대로 변경되어버리고요. 이 영화가 참신해서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블랑카님께서 잘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제 영화를 보면 음악, 의상, 조명, 세트, 그리고 제가 여기에는 설명하지 못하고 대신 동영상을 링크하기는 했지만, 안무가 대사 이상으로 발언권을 얻어서 굉장한 파급력을 보여줍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형식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아마 이대로 계속한다면 오 년 후에는 더 재미있는 작품을 선보일 것 같아요. 의상은 보디스가 분리되어 있어서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면 투피스의 형상이고 무척 현대적이기까지 한데,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더군요.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체를 조망하려 한 톨스토이의 원작 전부를 담지는 못했지만(그건 어느 영화도 불가능하겠지요!)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시간을 절약한 덕분에 안나와 브론스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을 둘러볼 여유를 갖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렇지요. 집나가서 객사하시지만 않으셨더라도......늘 천재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