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악몽과 꿈. 피하고 싶은 모든 것. 마음 전체를 지배하는 절망. 과거와 단절된 현재, 집착이 존재를 넘어서는 순간. 단 하나의 구멍도 없는 이야기. 증언.
그의 운명은 비록 삶의 정도로부터 탈선해 버리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는 수천 명의 운명을 자신이 여기까지 짊어지고 헤쳐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결코 그 모든 고통을 '돌처럼 무감각하게' 견디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희생자들의 피가 언제나 그 자신의 피 속에 섞여 흘렀으며, 그들의 많은 아픔이 그의 피를 더 붉고 진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우리들을 잊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우리들을 기억하라!"
"우리를 구해다오!"
"우리를 잊어버리지 말라!"
아니, 그는 절대로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비헤르트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는 증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침잠해 들어가는 고통 끝에 그래도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이유. 절망과 좌절의 모퉁이에서 만나는 한줄기 외침. 그래도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손잡을 수 있는 까닭. 이런 것들이 밑바닥에 깔린, '실제로 있었던 인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외침이 테렌스 데 프레의 펜을 빌려 다른 색채를 띠는 까닭은 생존자의 좌표를 영웅도, 희생자도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두었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찬란하지도, 부조리하게 속쓰리지도 않은 사람 그 자체의 피와 뼈.
그러한 사람의 색채가 갖는 그림자. 피와 뼈와 머리카락은 이미 많이 있다. 소피의 선택, 안네의 일기, 더 리더,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페스트. 이것은 모두 생존자가 직접 썼거나, 혹은 어떠한 절망 속의 생존자를 생각하며 썼거나. 그리하여 드러나는 살아남은 어떤 이들의 면면이다. 저자는 먼저 문학작품 속에서의 생존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으로 독자가 느끼는 공기를 전환한다. 그곳은 카뮈의 페스트 속 오랑 시이기도 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이기도 했다.
앞을 알 수 없는 인간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영웅의 죽음보다 자신의 생존이 더 흐릿하게 보일 때.
사람이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숙명, 혹은 운명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굳이 존엄성이라고 쓸 필요도 없다.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 그 이상을 넘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을 대비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에서 죽음에 맞선 것은 살아남겠다는 각오 같은 것. 병든 이를 돌보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죽은 자를 치우는 사람들의 모습. 끝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남겠다는 목표 하나에 기대어 살아남는 이야기를 통해 테렌스 데 프레는 문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힘을 거울에 비추듯 바라본다.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삶을 선택함으로써 생존하는 인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들을 준비가 어느새 되어 있을 것이다. 조용히 따라갈 것. 좌표 그대로를 볼 것. 그것이 독자의 몫이다.
테렌스 데 프레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개인이 겪은 일을 개인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거대한 전체 중일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전체를 이야기했음을 테렌스 데 프레는 지적한다. 소비에트의 어느 수용소 변소 벽에는 '자유의 몸이 된 후에 입을 다물고 있는 놈은 어느 놈이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낙서가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나가는 자, 누구든지 우리 모두가 남긴 기록을 한 덩어리로 기술할 것. 죽음이라는 절대성 앞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허물고 굴복하지 않는 최소한의 저항의 방편이었으리라. 죽음의 절대성. 그 절대성은 아마도 처음에는 어느 순간 느닷없이 시작된 총질, 친위대원들의 모욕적인 행위, 혹은 가슴팍에 달아야 하는 다윗의 별 등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여타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그 모든 것의 문을 열 때 오물과 역겨운 냄새도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에 관한 명쾌한 답이 아래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이들이 기차에서 선 채로 용변을 처리하고 서로의 얼굴에 토악질하고 인간이 아닌듯한 몰골로 있어야 했던 이유. 죽어야 했던 이는 죽여야 했던 이의 반대편에 있어왔다는 것이 아래의 증언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나는 슈탄글에게 질문했다.
"저 사람들을 죽일 예정이면서 왜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까? 왜 저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슈탄글은 말했다.
"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여건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지요. 그들이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책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1974년 뉴욕의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같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의 모습을 허물어버리는 일. 소용소에는 몇천 명의 인원이 있는데 변소는 고작 하나였다.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이 누구나 오물 냄새를 잊을 수 없다고, 몇 미터 밖에서도 그 냄새가 냤고 그곳에서는 새조차 날지 않았음을 증언한 것은 그저 후각에 관한 기억이 기억의 여러 갈래 중 가장 우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사람에게서 벗겨 내 수용소 내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혐오감을 키우고, SS 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작업이 더욱 쉬워지는 상황을 빚어낸 정점에 그 오물 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증언의 힘은 그 원형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든다. 한 명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일을 그중 하나인 생존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증언 문학, 혹은 생존자를 다룬 영화나 희곡 등이 한편으로 그 드라마틱함을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감고 그 광경을 상상하노라면, 어쩌면 상황의 극대화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덩이를 파던 중 옆에 있던 이들이 갑자기 뒤에서 빗발치는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혹은 아이들의 사진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 다음 그 위를 진흙 묻은 신을 신고 걸어가는 대원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문학의 영역에서 다룰 때, 우리는 문학성과 사실을 분리하기가 어렵다. 상황은 극적이고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일 만큼 모든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구현된다.
<Battle field>, by Kathe Kollwitz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경험의 깊이와 넓이는 이러한 극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언제나 육체와 정신을 서로 연결하곤 했다. 밀턴의 지옥,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지하 세계, 리어 왕에 나타나는 폐허, 단테의 지옥도. 즉, 노스럽 프라이가 지적하는 '전적으로 거부하기를 바라는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집단 수용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오물과 악취, 가난과 배고픔, 모든 친숙한 것들과의 이별, 구덩이와 하수구, 무지개 저 너머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던 쓰레기장, 시련의 객관적 상관관계. 죽기와 살기, 그리하여 마침내 전략적 망각과 과거 속에서 살기.
...우리들은 그곳으로 달려가서 아직 채 파묻지도 않은 발가벗은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커다란 네모진 구덩이를 보았어.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엄마도 거기서 찾았어. 온통 피투성이였어. 그리고 내 약혼자 헤네코, 내가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도 거기 있었단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내 마음이 죽어 버렸을 뿐이야. 무슨 얘긴지 알겠니? 그들이 내일 다시 와서 아버지를 죽여도 난 까딱도 안할거야. 울지도 않을 거야. 아버지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이 나를 죽여 주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 나는 유태인 금지 구역으로 아무 데나 막 걸어다닐 테야. 그들에게 붙잡히고 싶어. 나는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거야.-클라인
인간이 완전히 빈털터리로 벗겨지고 나면 과거는 마치 이미 죽은 자의 미래와도 같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과거 속에서 살기 시작하는 즉시 현재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점점 모든 일에 소홀해져 마침내는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현재에 집착하는 순서가 따른다. 헬링은 이를 가리며 '철조망 안에서 몇 년을 살고 난 다음, 타고난 능력 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훨씬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지적한다.
협력과 저항,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이 노력 아래, 그런 마음이 있었다. 가스실에 가는 이의 명단을 이미 죽은 이름을 올려 바꿔치기하고, 카포(나치에 협력하는 유대인)로는 필요 분야의 비전문가를 보내는 일. 기기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친위대가 흘리는 정보를 수집하여 저항조직에 전달하고, 라디오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수용소 전체에 소문을 퍼뜨리기.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생존자들은 가만 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 자체에 아로새겨진 생존에의 속성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역시 하나의 화석이다.'라는 자크 모노의 말로 다시한번 증명된다. 누군가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몰살과 멸종의 위협 앞에서 수용소 사람들이 만든 연대와 협동,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전체가 함께 행동하는 행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다. 절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망에 무릎 꿇지 않기. 이때 절망에 대한 최선의 보호책은 바로 희망을 품지 않는 것. 현실을 살되 과거를 끊고 조금씩 미래로 나아가되 희망을 버리는 일. 버림으로 하여 가지고, 가짐으로 하여 버리는 뫼비우스의 굴레 속. 전쟁이 끝나갈 무렵, 사면 소식이 수용소 내에 퍼질 때에도 절망에 대비해 희망을 품지 말아야 했음을 이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그러한 환희 작약의 뒤에는 으레, 예정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데서 비롯되는 깊고깊은 절망의 늪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희망에서 절망으로의 엄청난 반전을 겪고도 정신이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정신적 평형감각을 보존할 수 있는 특수한 테크닉을 스스로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받을 길 없는 비관론자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골비체르
수용소 안에서는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보다 악몽을 꾸는 것이 낫다. 스마글레브스카 라는 생존자의 증언을 들으면, 수용소에 있는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집단 강제수용소에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이를 깨우지 않는 곳. 아름다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그들의 투쟁과 저항은 결코 희망을 품었기에 했던 일이 아니었다. 정신이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으며 비참한 수용소에 자신의 모습을 바위처럼 박아두어야 했다. 그들은 실제 이 세 가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첫째, 성공할지도 모른다. 둘째,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그래도 계속해서 시도하겠다.
이 거대한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종종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분노에 떨게 되는 순간, 내가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세수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만큼 자신 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 껍데기조차 거리에 뒹구는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먼저 씻은 사람만이 생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는 옮긴 이의 말이 있다. 가족이 사라졌을 때에는 그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수용소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말도 그 옆에 나란히 있다.
이 덧입혀지거나 살짝 걸쳐진 생각, 무겁거나 딱딱하고 육중한 형체 앞에서 나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죽은 이들의 화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기적처럼 대꾸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생존을 돕듯 누군가도 나의 생존을 도울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속에서 아주 작게, 기대어서는 안 될 희망이 살짝 피어오른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아마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기억날 책 한 권. 11월이 다가오는 가을, 낮 기온이 점점 밤 기온에 다가서려는 추운 날 읽노라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귀해 보이는 귀중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