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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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신경다발이다. 그것은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이고, 춤이고, 시간이고 또 얽힌 공간이다. 그래, 그래, 그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결말처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어떤 유명인의 초상. 그의 그림자. 지나간 세기의 시선. 35밀리 라이카 카메라. 매그넘 창시자. 포토저널리즘. 카르티에 브레송 가문. 포로생활, 아시아와 서방세계. 간디와 샤넬, 트루먼 카포티와 자코메티. 때로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필치를 작품으로 남긴다. 그들의 유명세는 벽이 되거나 성곽이 되어 길게 뻗어나가는데, 종종 그 그림자는 때로는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의 뇌리에까지 박혀있다. 2004년, 그의 사망 이후 지금에야 그의 종적을 더듬는 것은 너무 늦거나 빠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가 니엡스, 다게르로부터 1800년대 초반에 대중에게 공개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재빠른 순간이기도 하다.



어떤 남자가 물웅덩이를 건너기 위해 뛰는 순간. 자전거가 계단 아래 길을 지나는 순간, 조지 6세의 대관식을 바라보던 영국 국민의 모습. 멕시코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아이. 창문 너머로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 서독의 사람들. 필시 전쟁에서 다리를 잃었을 남자의 걸음, 레닌그라드의 아이와 아버지. 샤넬의 담배피는 모습. 마티스의 스케치, 포크너의 시선. 자코메티의 걸음과 마르셀 뒤샹의 손길. 스트라빈스키의 얼굴 앞에 원근처럼 어우러진 손. 뉴욕의 거리, 케이프 커내버럴의 사람들. 뉴욕의 사무직 노동자의 순간, 국회의사당의 한 사람. 중국의 노동자, 인도의 간디.


이 책에는 브레송의 모든 초기 사진, 시기별로 분류된 사진, 단행본, 논문, 에세이, 사진집과 그의 데생까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시선이 담겨있다.



전설처럼 굳어진 어떤 위인을 살펴볼 때에는 살짝 시선이 굳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평가를 내리기에는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작가가 작품을 통해 남기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일에 게을러선 안될 거란 생각에 이 사진집을 살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주치게 되는 그의 시선. 신화적 인물의 등 뒤, 전설의 얼굴, 권위와 고전의 시선. 그 유명한 생 라자르 역의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남자를 찍은 모습을 보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렬하고 솔직하다. 그의 사진에 풍경보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생에 대한 찬가를 그가 부르고 싶었을 거란 생각도. 삶에 대한 환희와 경이가 구도와 형식의 완벽함을 타고 전해져 온다. 브레송의 손 안에 꼭 쥐어진 라이카로 표현된 황금의 수는 그가 이십대 초반 머릿속에 소중히 새겨둔 초현실주의, 데생의 섬세함, 로트의 가르침을 따른 구도의 순수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는 유명인만큼이나 일반인의 얼굴이 더 다양하다는 말을 한 적 있다. 라이카를 들고 시장과 골목,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들이 만든 온갖 행동이 담겨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물들고 생생함과 움직임이 보인다. 워커 에반스의 말처럼,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는 우리가 이제껏 탐험해본 적이 없는 무언가가 있다.' 에반스에게 그러했듯 브레송에게도 사진은 데생 대신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라이카를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어느 사회나 중심부튼 관습에 장악당한 반면, 참모습은 주변부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철학을 고수한 그의 사진은 어쩌면 처음부터 늘 주변에 관심을 두는 그의 반순응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현장을 지키되 그 현장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시선. 그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드러난 사회는 늘 뜻밖의 얼굴을 보여준다.
만리장성이 없는 중국, 피라미드가 없는 이집트, 빅벤이 없는 영국,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가 그의 사진 속에 담겨 있다. 대신 그의 사진에는 거리, 카페, 상점,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엇갈린 시선으로 다른 곳을 향하는 전직 군인과 현직 군인의 모습을 담는다. 그 마법같은 구도를 잡기 위해 그가 생 라자르 역에서만 하루를 보내며 기다렸다는 일화가 생생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의도치 않은 순간 삶이 뜻밖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마법같은 황금율이다.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나타나고 예기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우연이 만나고 필연적인 스침이 생겨난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담는 시선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그가 찍은 미국은 빠르게 모든 것이 연소되는 마천루의 도시. 거대함과 폭력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나타난다.





언젠가 보나르가 브레송에게 '왜 바로 그 순간 셔터를 눌렀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브레송이 보나르의 미완성 작품 중 하나를 가리키며 '왜 여기를 노란색으로 칠하셨나요?'라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재치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중요한 것은 시선이라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사진도 예술일까? 사진도 회화와 같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브레송은 피사체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삶 속에 들어가서 삶을 함께 숨쉬고 겪은 다음 다시 존재를 잊고 환경에 녹아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브레송의 사진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잰슨의 말에 다르면,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작품이 '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판명된다.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주제, 양식은 사진을 찍는 이가 속한 세계의 안팎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곤 한다. 탐구와 모색, 관찰과 이해. 실현과 평가. 이 모든 것을 한 장에 담으려면 피에르 아술린의 말처럼 송어의 민첩성과 궁수의 부동심을 적절히 배합해야 하는 것이다. 회화와 소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진의 영역을 바라보노라면, 사진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별함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그넘이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자신이 로버트 카파, 다비드 스치민, 조지 로저, 일리엄 밴디버트와 함께 창설했다며 말년에는 비아냥거리는 편지를 보냄으로 자신의 마침표를 찍었던 매그넘. 존재하는 이야기, 우연이 아닌 필연, 전쟁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의 의문에 답할 세계의 눈. 그와 동시에 브레송은 이제 전문 사진가가 되었음을 뜻한다.



시대를 증언하되 증언에만 그치지 않는 사진, 초현실주의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는 일. 그 묘한 역설을 활용하려는 태도는 브레송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작은 차이점들이다. 일반적인 생각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작은 차이점들을 찬양했던 스탕달 만세! 1밀리미터가 바로 차이를 만들어낸다. 증거만을 얻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수평 공간 안에, 직각자로 잰 듯 완벽한 수직선을 이루는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부동자세로 멍한 시선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밥그릇을 쳐다보면서 먹고 있다. ... 왼편 구석의 검은 그림자와 오른편이 문이 호응을 한다. 문 위쪽으로 상감된 두번째 사각형이 최면효과를 자아낸다. 왼편 문 너머로 텅 빈 어둠이 들여다보이는데, 열린 공간은 역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멍한 시선의 중국인 사내와 대비를 이루면서 테두리를 형성한다. 사내의 부동자세와 앉아서 먹느라 여념이 없는 또 다른 사내가 호응을 한다. 앉아있는 사내는 정확하게 황금비례가 형성되는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한다. 사내는 밥공기를 손에 쥐고 있다. 이는 바닥에 놓인 또다른 밥공기와 대조를 이룬다. 테 없는 검은 모자가 바로 두 밥공기 가운데서 경계를 형성한다. 조각난 그림자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장면의 평온한 수평을 깨뜨린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아비그도르 아리카, 화가.






브레송의 사진은 그가 말한 여섯 범주로 나뉘어 전개된다.
르포, 주제, 구도, 색채, 테크닉, 고객.
브레송이 낸 자신의 사진집 서문을 읽어보노라면 사진에 임하는 그의 시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르포르타주란 문제를 표현하고 사건이나 인상을 고정할 목적으로 머리와 눈, 그리고 마음이 동시에 점진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나에게 사진이란,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의 대상의 의미와 또 이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형태들의 엄정한 조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 주제란 사실들을 그저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들 그 자체는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들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고, 사실의 진면목을 심오한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포착하는 일이다. 사진에서는 아주 작은 대상도 커다란 주제가 될 수 있고, 사소한 인간적 디테일도 라이트모티프가 될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 서문.





그의 사진 속에는 아시아를 신비롭게만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이 없다. 이를테면 상하이의 동맹은행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아래와 같은 캡션이 달렸다.



"상하이, 1948년 12월. 골드러시. 동맹은행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형성되어서 이웃 거리로까지 뻗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밀고 당기는 소동이 벌어져서 십여 명이 사망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인당 금 40그램씩만 바꿔주기로 정했었다. 지폐를 바꿀 요량으로 24시간 이상 줄을 선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의 경찰은 15년 전부터 중국 땅에 눈독 들이던 잡다한 군대에서 차출된 인원들인 만큼, 치안은 허술했다."






삶을 담되 한박자 늦출 것. 있는 그대로를 담을 것. 황금의 수 안에서 미래주의의 역동성과 다다의 개념까지 활용할 것.

굳이 브레송이 이러한 원칙 아래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닐테지만 그의 사진 속에는 늘 이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암시적이고 은근하다. 현실의 모습을 다루되 그의 사진의 경이로움은 그가 언제나 되새김질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삶에 관해 진실함을 표명했다면 브레송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표명했으리라. 동작과 의미, 구성과 항금의 비례. 앗제와 만 레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1920년대 후반 입체주의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은 그의 사진을 보노라면, 예술가의 시선은 한 가지 성향만으로 대표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형식주의자의 시선은 이런 것이었다.






세월은 어림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제목은 브레송의 사진집 제목 결정적 순간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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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봐도 좋네요. ^^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보셨군요!
브레송의 사진에는 늘 사람이 있어요. 참 좋지요?
dreamout님이 잘 보고 가셨다니 제가 다 기뻐요 :)



dreamout 2013-08-28 22:50   좋아요 0 | URL
정면 사진들이 많죠.

저는 남의 뒷통수 찍기를 좋아하는데..
그러고보면, 옛 사진가들은 참 잘 훔쳤어요. ㅎㅎ

oren 2013-08-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페이퍼에 올려주신 글로도 브레송의 사진들을 훌륭하게 감상할 수 있군요. 수많은 사진들을 손수 찍고 편집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덕분에 좋은 사진, 좋은 글 잘 감상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올해가 로버트 카파 100주년이라면서 1년 전부터 '전시회' 준비에 골몰해 오던 친구 녀석('ㄱ신문 사진부 기자)이 '전시회 개관일에 꼭 오라'고 했던 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네요. 개관일에 공짜로 볼 기회는 놓쳤지만, 그래도 전시회 마감 전까지는 꼭 가보겠노라 약속을 했건만 여태 꾸물거리고 있네요.ㅠㅠ
* * *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2013년 8월2일~10월28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사진전을 '널리 알려달라'는 제 친구의 요청 때문에 여기에 '불법광고' 남겼음을 용서하세요..)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7   좋아요 0 | URL



oren님, 브레송이 찍은 사진을 저야 뭐 가장 단순작업만 하여 올렸을 뿐인걸요, 뭘.
오히려 사진이 하나같이 다 좋아 선별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습니다. 좋은 사진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카파 전시회라니, 사진에 관해 여전히 잘 모르는 저도 솔깃해집니다. 갑자기 저도 가고싶어지는걸요! 사진을 좋아하시는, 카파를 좋아하시는 많은 분들이 가셔서 잘 보셨음 좋겠습니다 :)


그나저나 뭐하십니까! 얼른 가신 다음 후기 남기시지 않고!!!



adsl 2013-09-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래간만에 브레송 사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