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브룩스의 파리 스케치북
제이슨 브룩스 지음, 이동섭 옮김 / 원더박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날마다 축제인 곳이라고 헤밍웨이가 말하고 모두가 배우가 되는 곳, 누구도 관객으로 남지는 못하는 곳이라고 장 콕토가 말한 곳, 그곳을 오늘 떠올렸습니다. 봄날 집에서 맡는 저녁같은 냄새의 도시. 에펠탑과 보주 광장, 마카롱과 카페 드 플로르, 디올의 부티크, 툴르즈 로트렉과 모딜리아니, 에콜 드 파리, 인상파와 아르 누보, 기마르 헥토르의 메트로폴리탄, 개선문의 도시, 파리.











P,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겪습니다. 그걸 당신은 그저 보여 주곤 해요. 들려주고 보여주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당신은 '뒷모습'이라는 사진집에는 에펠탑 뒷골목 쓰레기를 가득 안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고다르 감독의 영화에서는 흑백의 봄날 냄새를 풍기기도 해요. 나는 당신의 꽤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디자이너 브랜드, 카페, 서점, 마카롱, 그곳에 사는 사람의 옷과 향수, 미술품과 생활양식까지. 그리고 당신이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에펠탑까지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도 다시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라고 투덜대는 당신의 잔뜩 찌푸린 낮은 구름 표정이 떠오르지만, 오늘 저는 당신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 3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 모습이었습니다. 건축, 거리, 카페, 패션, 쇼핑, 예술, 이동, 밤. 이 챕터로 당신 얼굴이 200여 컷도 넘게 있었어요. 종종 당신은 그 안에서 냉담하거나 서늘했습니다. 이를테면 저 컷이 그랬습니다. 보주 광장인데 그 날은 추웠나 봅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당신에게 이렇게 썼어요.

'보주 광장은 17세기 초에 조성되었다. 나는 건물 회랑 앞에 올곧게 서 있는 잘 손질된 나무들을 그렸는데, 잎이 다 떨어진 한겨울의 삭막한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서 길게 이어져 있다.'










당신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해요. 그러나 이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라본 당신은 아주 화려한 화장을 벗고 오랜만에 무표정한 무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카페 테이블에서 웃고있는 연인은 얼핏 브라사이의 사진같기도 하고, 도로 뒤편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은 핫젯의 사진처럼 절반 정도만 보인다. 만약 당신이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따뜻한 카페 안으로 뛰어들었다면, 스스로 헤밍웨이 소설 속 인물이라도 된 듯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이야말로 파리가 품은 마법과도 같은 매력이다. ... 파리는 세느 강을 기준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뉜다. 그리고 중앙의 1구부터 동쪽의 20구까지 시계 방향으로 나선형을 이루며 20개의 구로 분할되어 있다. 물론 모든 지역은 각각 고유한 특징과 거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차들이 오가는 파리 외곽 순환도로 한가운데 서 있자니 파리 자체가 하나의 우주로 느껴졌다.-책 속에서















아마 저 가로등 앞을 지날 때 비가 온다면 당신은 가느다란 은빛 빗살무늬를 만들겠지요.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가듯 거꾸로 보는 그 빗방울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 보일 거에요. 제이슨 브룩스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 가로등, 각종 현관문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얼굴은 늘 달라요. 그것은 가볍거나 무겁고, 담배 연기 같거나 구름 같고, 두부같은 질감으로 입안에 들어오다가도 마카롱처럼 녹아버려요. 입안에 가만히 당신을 품고 있으면 알 수 없게 녹아버리는데 그 맛을 사람들은 '파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잠시 제이슨 브룩스의 눈으로 마카롱을 한 번 볼까요. 똑같은 마카롱인데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마카롱. 먹기 전에 한번쯤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걸까요? 원래 이 과자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과자였다지요. 설탕, 아몬드, 코코넛, 호두 등 분말을 메렝게로 섞고 구워 크림을 바른 과자. 밀가루를 쓰지 않아 쿠키와 질감이 달랐어요. 그런데 이 오랜 역사를 가진 과자가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꽤 즐겨 먹는 과자가 되었지요. 그것은 초콜릿 볼케이노의 뒤를 잇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는 마케터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초콜릿 볼케이노,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대충 오지요? 초콜릿 화산 케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득하고 진한 초콜릿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케잌이었습니다. 이 케잌이 파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지요. 스펀지 케잌과 초콜릿 크림, 설탕 시럽, 커피 에센스가 주재료인데 마카롱의 담백한 재료와 꽤 많이 달랐습니다. 이 진한 케잌의 인기가 시들해진 다음 유행한 것이 마카롱이었어요.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폭발적인 인기 이후 슬그머니 눈을 돌리는 성향이 있나 봅니다. 강력한 엔진의 사륜구동을 팔고 하이브리드를 사듯 강한 맛의 초콜릿 볼케이노 다음에 가벼운 느낌의 마카롱을 찾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당신 얼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세기를 방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면, 당신을 보는 일은 곧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코르셋 다음의 샤넬이 그랬고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가 그랬습니다. 길을 걷다 들어가는 카페 드 플로르의 커피잔에는 헤밍웨이가 보았을 비슷한 디자인의 커피잔에 여전히 카페 드 플로르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의 당신은 참 달라요. 눈, 코, 입이 눈, 코, 잎으로 보인달까요. 자세히 보면 브룩스가 그린 당신의 모습은 꽤 여러 갈래입니다. 샹젤리제 거리의 일방통행로, 몽테뉴 거리의 명품 숍, 엘리제궁에서 시작해 브랜드의 끝장을 보여주는 포브르 생 토노레 거리, 주얼리 샵의 집대성인 방돔 광장까지,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런던 세인트 마틴 에술학교를 다닐 때부터 보그 주관의 Vogue Sotheby’s Cecil Beaton Award에서 패션 일러스트 부문 수상, 영국 보그의 패션 일러스트 담당. 영국왕립예술학교의 일러스트 석사 등의 학력과 경력을 뽐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저네어, 인디펜던트, 엘르를 오간 다음 칸디 음반사의 비주얼 작업,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광고를 맡았다니 이 작가는 필시 자신의 주력 무기를 당신의 가장 화려한 모습에서 찾은 것이 분명합니다. 거리, 미술관, 밤, 카페의 당신은 곧잘 민얼굴에 느슨한 셔츠를 입었지만, 패션 부분에서만큼은 샤넬의 검은색과 방돔 광장에서 구입한 듯한 보석, 빈티지를 적당히 섞기도 했지만 자신의 얼굴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표정을 드러냈어요. 당신은 오 트 쿠튀르와 기성복, 스파 브랜드와 빈티지를 조화롭게 섞을 줄 알아요. 주목받는 패션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모습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에게 샤넬과 라거펠트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미 로트렉, 드가, 마티스, 모딜리아니가 있었지요. 지금 이곳에는 당신의 모습 중 인상파의 일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 그 질감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중심을 둔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찰나의 순간을 관찰했고 그 거친 터치와 흐트러진 선이 고흐와 고갱, 쇠라와 세잔의 다른 화풍을 가진 후기 인상파로까지 남았더지요. 무엇인가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입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접하는 전체 흐름 속에서 낙숫물처럼 똑똑 떨어지는 그 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당신은 회화에서 특히 잘 보여 주곤 했어요. 크고 도도한 흐름 속, 종종 사람들이 주목하는 지점도 또한 있겠지요. 고흐나 모딜리아니처럼 작가주의 특성이 아주 강한 화가도 있을 것이고 마티스처럼 또렷한 지점을 드러낸 화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로잉을 “특별한 손재주가 있어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속 느낌과 기분을 표현하는 수단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마티스의 작품을 아마도 브룩스도 유심히 본 모양입니다. 마티스는 또한 “비평가들이나 동료들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나를 이해시킬 만큼 내가 분명치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지요. 저는 마티스의 이 말을 실반 바넷의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읽었습니다. 이럴 때의 당신 목소리와 표정은 떨림이 없고 확신에 차 분명하다는 느낌입니다.











위의 사진은 이 책이 아닌 인터넷을 검색하다 얻은 것입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디자인한 화려한 곡선이 제이슨 브룩스의 펜을 거치면서 좀 더 조용한 것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소개하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물 평가의 기준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고 합니다.

기능 Utilitas : 목적과 일치, 실용성
견고함 Firmitas : 구조적으로 단단함
아름다움 Venustas : 디자인

또한 존 러스킨은 “모든 건축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고자 하며 단순히 인간의 몸체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지요.

지하철은 당시 꽤 새로운 교통수단이었을 겁니다. 근대의 새로운 탈 것, 사람들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해주는 기구. 새롭고 또 새로워야 했을 겁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선택한 재료는 철과 유리이며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직선 사용을 거부하고 시대 감각을 나타내며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Jugendstill, Style Guimard, Stile Liberty,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Art Nouveau 라고 불렀지요. 저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이 메트로폴리탄을 보며 잠시 곡선으로 짜인 느린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엿보았습니다. 언뜻 보면 느슨한 스케치이지만, 아마 이 일러스트레이터도 그것을 포착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잠시 지하철이 아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당신의 다른 구석을 떠올려 볼까요. ‘아주 쌩쌩 빠르게’가 아니라 ‘교통체증에 잠시 시달리며 느리게’여도 좋은 것은, 진 세버그가 나왔던 영화 'breathless'가 떠올라서일 겁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그들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축에는 개선문이 보입니다.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이 정식 명칭이며 에투알 개선문이라고도 부릅니다. 샹젤리제 거리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있지요.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열두 개의 거리가 방사형으로 퍼져 있습니다. 잠시 위키 백과의 설명을 들여다보니,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개선문이라고 말하면, 파리의 이 개선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시작,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 위에서 빛나는 "성 = étoile"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은 "별의 광장 (la place de l' E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의 정식 명칭은 'Arc de triomphe de l' Etoile 이다. 그러나 현재 이 광장은 샤를 드골 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승리의 아치’(Arc de triomph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선문 자체는 전승 기념비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파리 시내에도 카르제르 문, 셍 드니 문, 셍 마땅 문 등 다수 존재한다.―위키 대백과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때 이곳에는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기도 했다는군요. 당신은 당신 신체 곳곳에 얼굴 곳곳에 당신의 역사를 숨겨두었어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의 모습은 얼핏 보면 꽤 단선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이 보입니다. 이 책은 당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없습니다. 아주 자세한 설명도 없지요. 백과사전파의 지식은 전혀 없고 그림에 관한 글은 간단한 생각이나 느낌 한두 줄이 대신합니다. 140여 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은 패션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당신의 여러 측면을 쉬엄쉬엄, 짧은 시간 안에 쉬어가며 간단히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화려하거나 소박하고 똑같은 것은 없으며 개성이 강하면서도 맥락을 이어가고, 다른 무엇에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그 구석구석은 당신, 곧 ‘파리’라는 도시의 느낌을 살려줍니다. 보통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당신의 역사, 문화, 사람들, 사건에 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저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저보다 조금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이슨 브룩스의 이 책으로 당신에 관한 모든 사실, 혹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당신, 즉 ‘파리’의 일상과 거리, 느낌의 스케치를 보여주는 데 힘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스치는 시선은 어쩌면 당신을 동경하거나 혹은 당신을 만났던 많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내가 본 이 거리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내지는, ‘나는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이 그림 속 장소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이것이 아마도 일러스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요? 다른 이의 눈을 통해 같은 것을 체험하기. 다른 이의 개성을 필터 삼아 비슷한 감정을 확인하기. 패션 부분을 보면 아주 노련하고 개성 있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의 손끝이 보입니다. 펜으로 한 거리 스케치는 그곳을 사랑하는 이의 애정이 보입니다. 일러스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P, Paris, 당신을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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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1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쟌님은 포토리뷰도 정말 근사하게 쓰네요.

Jeanne_Hebuterne 2013-06-18 15:16   좋아요 0 | URL


포토 리뷰를 쓰려고 사진을 찍을 때 다시 한 번 그린 이가 파리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관찰했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저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만 무언가를 그리는 이의 눈은 그러지 않는 이의 눈과 다르다는 생각도요.

칭찬 고맙습니다. 저도 다락방님의 근사한 리뷰 기대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