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전도감
최지웅 지음 /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추억의 영화 포스터를 내 나름대로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볼 건 여전히 많다. 이 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만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장 어딘가에 없는 듯 꽂혀 있었다고 말하며 식구가 이 책을 내 책상에 올려놔줬다. ˝어, 이 책이 왜 거기에 있었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반갑게 맞았다. 예전 번역판으로 읽은 적이 있다.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것으로 유명한. 이 책은 그 고설의 후속판이다. 공부할겸 원서판을 사서 읽다가 지쳐서 어딘가로 치워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모든 소설은 원어로 읽어야 한다/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외국어 공부를 꾸준히 하는 중이다. 불어는 고딩 때 제2 외국어로 입문한 후 그후도 주기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문학 속의 불어는 일상 불어보다는 한층 어렵다. 이걸 보다가 르몽드 기사를 보면 고딩 영어를 보다가 중딩 영어를 보는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한때 불어, 독어, 스페인어, 일어, 러시아어 등의 제2외국어는 지금과는 달리 찬밥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질서가 미중 양강 구도로 재편되면서 영어나 중국어를 제외한 제2외국어들에 대한 무시가 과도하게 진행되는 느낌이다.

국력과 무관하게 언어는 그 나라와 민족의 중요한 경험과 지혜를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만 이렇게 샹각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생각속에서 세계의 언어들을 공부하며 원서들을 읽어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주일에 한 편 정도는 쓰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새해를 맞았는데, 갑자기 바빠져서 그러지를 못했네요.

요즘 저는 나카 칸스케라는 작가의 <은수저>라는 소설을 원어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전에 쓴 것처럼 슬로리딩의 교재로 사용돼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한 국어교사가 무려 6년동안이나 중고 국어 수업을 이 한 권으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책이길래,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번역판이 나오긴 했으나 절판 상태이고, 또 공부하자는 취지에서 원서를 선택했습니다.

어린 꼬마가 시골에서 상경해서 친척 아주머니 집에서 도쿄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병약하고 외로운 이 소년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겨우 1/4 읽었으니까요.

과연 우리 소설 중 6년간 슬로리딩의 교재가 될만한 작품이 있다면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wasulemono 2019-03-07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 보름동안 읽었다.
 

 

 

 

 

 

 

 

 

 

 

 

 

 

이 작품에 대한 정보는 어딘가 다른 책에서 얻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을 때, 나중에 꼭 읽어봐야지 하는 다짐을 했었던 것같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기가 그렇고,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도 힘들다. 하물며 문학이나 영화나 음악같은 예술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중국산 문화예술에 대해서 대체로 관대한 편이다. 때로는 도전적인 정신으로 무장하고 덤벼들 때도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소위 중드라고 하는 중화권 드라마, 그중에서도 사극은 내가 제일 싫어하고 아예 관심을 둘 관심 부스러기도 없는 쪽이다.

 

특히 가끔 채널 돌리다 보면 변발한 황제 가문의 남자들과 예쁜 궁중 처녀들의 투샷이 잡히면 그렇게도 소름이 돋을 수가 없다. 변발은 청나라의 상징일 텐데, 굳이 청나라만 내 취향이 아닌 건 아니고 여하튼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 사극 드라마는 그 콘셉트 자체에서부터 비호감이다.

 

그런 거부감은 연예 멜로드라마 자체에 대한 거부감인 것같다. 중국 무협 영화는 꽤 많이 봐온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협지나 수십부 짜리 무협 사극은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시간을 들일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러던 차에 공상임의 <도화선>을 읽게 됐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이 작품이 희곡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소설이라고 짐작하고 읽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산 희곡을 읽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고, 또 이건 청초 작품이라 갑자기 책을 잡았던 손에 힘이 약간 빠지기도 했다.

 

'도화선'이란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를 뜻하는 것으로 극중 연인의 애정 상징같은 것이다. 처음엔 그런 이야기로 시작되길래 뭔가 잘못된 선택인 걸까, 하는 낭패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양상은 작품 초반에 불과했고, 이후는 명 멸망 당시의 어지러운 정황들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충신과 역신들이 뒤얽히면서 결국은 명은 망하고 청이 들어서기 전 충신들이 강호에서 은거하고 열사를 제사지내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충신장 이야기같은 느낌이다.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고 지조를 지키며 자신의 지위를 탐하지 않는 자들은 무수한 중국 협객들의 '반청복명'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작가 공상임도 조심조심하면서도 그런 정신을 내비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을 대본으로 한 드라마도 분명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중국 전근대 희곡이라는 태생적 핸디캡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려하고 경쾌하게 작품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마치 실제 무대에 선 배우들의 움직임을 보는 듯한 실감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기존 세계 명작 리스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이 왜 명작 반열에 포함됐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읽고 나니 포함시켜도 좋을 것같았다. 번역자의 번역 솜씨 좋았고, 다 읽지는 않았지만 꼼꼼한 각주도 빛나 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5중주 중에 <숭어>란 곡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빵집 체인 크라운베이커리 광고에도 사용돼 어느 연령대 이상에게는 익숙한 선율의 곡이다. 물론 ‘숭어‘가 아니라 ‘송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슈베르트의 이 곡때문에 숭어는 서구적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겠으나 한국문학의 맥락에서 보면 숭어는 엄흥섭이란 작가때문에 비극적인 기호이기도 하다.

엄흥섭은 남한 출신이지만 한국전쟁때 월북했다. 카프 작가였으나 그렇게 지명도 있는 작가는 아닌데, 그가 1930년대에 쓴 작품 중에 <숭어>란 단편이 있다.

숭어가 명물로 소문난 마을의 소작농 주인공 춘보가 어느 여름날 하루를 투자해 잡은 숭어때문에 둘쨋딸 옥순이를 잃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숭어가 왜 딸을 죽였던가.

가난한 춘보는 잡은 숭어를 밑보인 지주 김참봉에게 소작 유지책으로 선물하려 하나, 김참봉은 그런 허접한 물고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숭어를 팔기 위해 장터로 걸음을 옮겼으나 다 죽어가는 물고기를 사줄 사람은 없었고, 그걸 버리도 오기엔 너무 가난했던 그는 썩은 내를 풍기는 숭어를 집까지 가져다가 아내더러 조림을 만들라 했고, 그 조림의 썩은 내보다 주린 배가 더 공포스러웠던 둘쨋딸은 썩은 숭어 조림을 먹고 배탈이 났다. 그 배탈기는 다스리고 한끼를 굶겼으나 부모가 없는 사이에 깬 옥순은 여전히 남아있던 숭어 조림을 잘못 먹고 가시가 목에 걸렸다. 어떻게 해도 딸 목에 걸린 가시를 뺄 수 없었던 춘보가 김참봉을 비롯한 동네 유지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둘쨋딸은 죽어 있었다.

생선 가시에 걸린 딸 옥순이의 고통은 어린 시절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패닉을 경험한 사람들은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죽지 않을 걸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을 것만 같던... 그런 고통에 지쳐 잠들고 결국 그 고통과 씨름하다가 똥을 한 무더기 싸놓고 옥순이는 숨이 멎은 것이다. 이미 첫쨋딸을 잃은 경험이 있는 주인공 춘보에게 그 둘쨋딸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탓한다. 지주에게 알량한 선심을 바쳐 소작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장터로 작행해서 빨리 팔았더라면, 한여름 똬약볕에서 빨리 썪어버린 생선을 과감히 버렸더라면... 그러나 결국 분노는 소작제적 모순의 타깃인 김참봉에게로 향한다. 달리 무슨 대안이 있을까. 내가 춘보라도 낫을 들 것같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하 소작농의 비참이란 무엇인가를 절절하게 되새기게 하는 구석이 있는 명편이다. 특히 자신이 잡은 생선 가시로 딸 자식을 잡은 가난한 아버지의 이야기란 점에서 오랫동안 가난했던 이 땅에서의 삶을 상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김동인의 <감자>는 얼마나 장난같은 수준인가.

북한에서도 어른에 대한 존경과 타인에 대한 예절을 중시한다. 그럼에도 한때 계급적 적대세력에게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차없는 증오를 가르치고 장려했다고 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가 지주라면 꼬마에게도 그를 ‘지주놈‘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어법에 과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식민지 지주제하 소작농이 겪었을 고통들을 생각할 때, 그런 분노의 언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도 일종의 미러링이라면.

여하튼 살면서 ‘숭어‘가 언급될 때마다 ‘슈베르트‘나 ‘회‘가 아니라 ‘엄흥섭‘이나 그의 주인공 ‘춘보‘나 그가 죽인 불쌍한 딸 ‘옥순‘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어떨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11-04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V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어떤 나이 든 무연고자는 음식쓰레기통을 뒤져서 생계를 연명했어요. 지금도 복지의 사각지대 속에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wasulemono 2018-11-04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있어선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