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5중주 중에 <숭어>란 곡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빵집 체인 크라운베이커리 광고에도 사용돼 어느 연령대 이상에게는 익숙한 선율의 곡이다. 물론 ‘숭어‘가 아니라 ‘송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슈베르트의 이 곡때문에 숭어는 서구적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겠으나 한국문학의 맥락에서 보면 숭어는 엄흥섭이란 작가때문에 비극적인 기호이기도 하다.
엄흥섭은 남한 출신이지만 한국전쟁때 월북했다. 카프 작가였으나 그렇게 지명도 있는 작가는 아닌데, 그가 1930년대에 쓴 작품 중에 <숭어>란 단편이 있다.
숭어가 명물로 소문난 마을의 소작농 주인공 춘보가 어느 여름날 하루를 투자해 잡은 숭어때문에 둘쨋딸 옥순이를 잃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숭어가 왜 딸을 죽였던가.
가난한 춘보는 잡은 숭어를 밑보인 지주 김참봉에게 소작 유지책으로 선물하려 하나, 김참봉은 그런 허접한 물고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숭어를 팔기 위해 장터로 걸음을 옮겼으나 다 죽어가는 물고기를 사줄 사람은 없었고, 그걸 버리도 오기엔 너무 가난했던 그는 썩은 내를 풍기는 숭어를 집까지 가져다가 아내더러 조림을 만들라 했고, 그 조림의 썩은 내보다 주린 배가 더 공포스러웠던 둘쨋딸은 썩은 숭어 조림을 먹고 배탈이 났다. 그 배탈기는 다스리고 한끼를 굶겼으나 부모가 없는 사이에 깬 옥순은 여전히 남아있던 숭어 조림을 잘못 먹고 가시가 목에 걸렸다. 어떻게 해도 딸 목에 걸린 가시를 뺄 수 없었던 춘보가 김참봉을 비롯한 동네 유지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둘쨋딸은 죽어 있었다.
생선 가시에 걸린 딸 옥순이의 고통은 어린 시절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패닉을 경험한 사람들은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죽지 않을 걸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을 것만 같던... 그런 고통에 지쳐 잠들고 결국 그 고통과 씨름하다가 똥을 한 무더기 싸놓고 옥순이는 숨이 멎은 것이다. 이미 첫쨋딸을 잃은 경험이 있는 주인공 춘보에게 그 둘쨋딸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탓한다. 지주에게 알량한 선심을 바쳐 소작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장터로 작행해서 빨리 팔았더라면, 한여름 똬약볕에서 빨리 썪어버린 생선을 과감히 버렸더라면... 그러나 결국 분노는 소작제적 모순의 타깃인 김참봉에게로 향한다. 달리 무슨 대안이 있을까. 내가 춘보라도 낫을 들 것같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하 소작농의 비참이란 무엇인가를 절절하게 되새기게 하는 구석이 있는 명편이다. 특히 자신이 잡은 생선 가시로 딸 자식을 잡은 가난한 아버지의 이야기란 점에서 오랫동안 가난했던 이 땅에서의 삶을 상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김동인의 <감자>는 얼마나 장난같은 수준인가.
북한에서도 어른에 대한 존경과 타인에 대한 예절을 중시한다. 그럼에도 한때 계급적 적대세력에게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차없는 증오를 가르치고 장려했다고 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가 지주라면 꼬마에게도 그를 ‘지주놈‘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어법에 과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식민지 지주제하 소작농이 겪었을 고통들을 생각할 때, 그런 분노의 언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도 일종의 미러링이라면.
여하튼 살면서 ‘숭어‘가 언급될 때마다 ‘슈베르트‘나 ‘회‘가 아니라 ‘엄흥섭‘이나 그의 주인공 ‘춘보‘나 그가 죽인 불쌍한 딸 ‘옥순‘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어떨까.